CBS 라디오의 '시사자키 전관용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매주 노동권 문제를 이슈로 한 인터뷰가 진행되었었다. 나는 매번 인터뷰 전문으로 읽어온 탓에 그 중단이 연재의 종료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인터뷰 진행이 없어 아쉽다고 생각한다.
[날아라 노동]은 그런 저자의 이력처럼 노동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노동이라는 '말하기'가 갇혀 있는 생각들을 고민해 보는 것이다. 나는 발제보다 나가며 닫는 글이 이 책의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된다. "왜 계속 노동권이냐고?"라는 저자 스스로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2008년 <<참여사회>>라는 작은 좋은 잡지에서 좋아하는 책 소개를 해달라는 청탁을 받아 글을 쓰면서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래서 꽤 길지만 그 글을 소개한다.
이미 15년쯤 되었나 보다. 두 번째의 감옥살이는 꽤 길었고 시작부터 힘겨웠다. 고문 후유증과 정신적 피로 때문이었는지 소장과 대장을 잘라 내는 대수술 말고도 결핵에 후두염까지 내내 병치레로 보냈다. 몸을 누이면 꽉 차는 창문 없는 독방, 여름에는 35도를 넘고 겨울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나 말고 다 얼었네?"하며 웃던 그곳. 오죽 건강했으면 전기충전 인간이라고 '아톰'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지만 너무 아파 가끔은 앉아 있기도 버겁던 그곳, 그 어두운 방에 누워서 손에 놓지 않았던 것이 시와 소설이다. 온갖 질문과 의혹으로 마음이 지옥일 때, 말하는 법을 잊은 것은 아닐까 문득 두려울 때, 여사 뜨락의 유일한 나무에 봄빛이 하얗게 웃는 것을 보다 눈물이 나려 할 때, 문자 세대인 나에게 벗이 되어 준 수많은 책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
그중에서도 이 세상에서 내 짐이 가장 무겁고 가장 아프게 느껴질 때 만났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다시 찾아 읽는다. 그의 번역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중 '나의 어머니'에서 브레히트는 말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이 짤막한 구절을 발견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다른 사람 역시 나 이상으로 아프고 힘겹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옥의 긴 세월 동안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힘겹지만 또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부라는 느낌은 따스한 행복이자 위안이었다.
이 위로가 작은 희망으로 커진 것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접한 후였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무려 5권으로 완간되었지만 당시에는 1권만이 발간된 그 책을 읽으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군 일군의 사라들을 만났다. 나의 20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마르크스주의도 그와 같은 꿈의 일환이라는 발견은 내게 희망을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희망을 꿈꿀 권리가 있고, 비록 끊임없이 실패한다 해도 꿈을 꾸는 사람들은 또 생겨난다. 나의 실패는 작은 것일 뿐, 인간의 역사에서 아주 작은 것일 뿐,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라 해도 꿈을 꿀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는 소박한 확신이 아픈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