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난 자리, 그러니까 손이 하얗다며 나를 나무라는 친구들의 핀잔 사이에 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A라는 친구가 후일담처럼 "끈기 있기란 참 힘들더라"라고 말했다. 바로 나는 맞장구쳤다. 정말 살면서 끈적하게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크게 깨달아 가기 때문이다.

 뜸해진 독서에 자연히 소홀해진 이 공간을 되새기니 "끈기 있기란 참 힘들더라"는 친구의 그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 그 소홀함에 어떤 반작용이 될까? 문학적인 시도는 좋았지만 아마 내가 원래 생각했던 끈기의 의미에는 맞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왕에 써내려왔으니 언젠가 다시 보며 쿡쿡 거릴 나를 상상하며 글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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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하루는 참 이상한 날이었다. 이번주 내내 계속되는 국정조사의 태도들 앞에서 그렇게 들끓던 심정도, 갑자기 오늘 아침을 맞이하며 아무렇지 않게 내게 다가오게 됐다. 탄핵소추 의결은 고대하던 만큼 내게 실감 나지 않았고, 그간의 일들이 좀 야박하게까지 느껴졌다. 대통령 너머 개인의 삶에 집중하게 되며 그간 없던 얄팍한 동정의 마음까지도 들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그러지 말라 하지 않았나. 막상의 현실로 가시화돼 가니 뭔가 괴롭히는 몹쓸 짓에 가담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렇게 명료했던 것들이 복잡한 심정으로 헝클어졌다.


 그런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에 본회의가 시작됐고 투표가 진행됐다. 볼썽사나웠던 앞의 탄핵과 다르게 질서 정연했고 신속하게 치루어졌다. 가결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반대의사에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의외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공표되자 기쁨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랬다, 내게는 혹시나 작동하지 않을 장치에 불안이 있었다. 다행히 그것은 그런대로 작동했다.


 그리고 국회 바깥 풍경을 전하는 내용이 뒤따랐다. 누군가는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고, 덕담처럼 민주주의를 건넸다. 어떤 사람은 이 기쁨에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에게 뽀뽀를 한다고 했다. 그 모습들이 정겹게 느꼈다. 그런 가결 소식에 앞으로의 헌재 결정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결의들도 볼 수 있었다. 슬프게 보내고 기쁘게 맞으면 된다.


 하지만 그 기쁨 이면에 자리한 많은 슬픔도 생각하게 된다. 세월호의 시간과 가습기 살균제에서 배제된 피해자들, 그리고 기억되지 않고 있는 많은 것들이 기억으로 돌아와 많은 게 동시에 가시화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 모습을 눈동자에 모두 담을 수 있을까.


 보수를 자처한 몇몇은 촛불을 레디컬한 반동적 무언가로 생각했지만, 이미 오랜 세월 한국이라는 정치 지형 속에서 촛불은 제도로 자리했고, 촛불은 잃을 것 없는 자들의 혁명이 아니라 잃은 것들과 잃을 것들에 대한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많은 것을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더는 빼앗지 말아달라는 매우 기본적인 요청이었다.



 촛불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생각이 있었지만 결국 답은 국민에게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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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BS 라디오의 '시사자키 전관용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매주 노동권 문제를 이슈로 한 인터뷰가 진행되었었다. 나는 매번 인터뷰 전문으로 읽어온 탓에 그 중단이 연재의 종료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인터뷰 진행이 없어 아쉽다고 생각한다.


 [날아라 노동]은 그런 저자의 이력처럼 노동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노동이라는 '말하기'가 갇혀 있는 생각들을 고민해 보는 것이다. 나는 발제보다 나가며 닫는 글이 이 책의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된다. "왜 계속 노동권이냐고?"라는 저자 스스로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2008년 <<참여사회>>라는 작은 좋은 잡지에서 좋아하는 책 소개를 해달라는 청탁을 받아 글을 쓰면서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래서 꽤 길지만 그 글을 소개한다.


이미 15년쯤 되었나 보다. 두 번째의 감옥살이는 꽤 길었고 시작부터 힘겨웠다. 고문 후유증과 정신적 피로 때문이었는지 소장과 대장을 잘라 내는 대수술 말고도 결핵에 후두염까지 내내 병치레로 보냈다. 몸을 누이면 꽉 차는 창문 없는 독방, 여름에는 35도를 넘고 겨울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나 말고 다 얼었네?"하며 웃던 그곳. 오죽 건강했으면 전기충전 인간이라고 '아톰'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지만 너무 아파 가끔은 앉아 있기도 버겁던 그곳, 그 어두운 방에 누워서 손에 놓지 않았던 것이 시와 소설이다. 온갖 질문과 의혹으로 마음이 지옥일 때, 말하는 법을 잊은 것은 아닐까 문득 두려울 때, 여사 뜨락의 유일한 나무에 봄빛이 하얗게 웃는 것을 보다 눈물이 나려 할 때, 문자 세대인 나에게 벗이 되어 준 수많은 책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

 그중에서도 이 세상에서 내 짐이 가장 무겁고 가장 아프게 느껴질 때 만났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다시 찾아 읽는다. 그의 번역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중 '나의 어머니'에서 브레히트는 말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이 짤막한 구절을 발견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다른 사람 역시 나 이상으로 아프고 힘겹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옥의 긴 세월 동안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힘겹지만 또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부라는 느낌은 따스한 행복이자 위안이었다.

 이 위로가 작은 희망으로 커진 것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접한 후였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무려 5권으로 완간되었지만 당시에는 1권만이 발간된 그 책을 읽으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군 일군의 사라들을 만났다. 나의 20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마르크스주의도 그와 같은 꿈의 일환이라는 발견은 내게 희망을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희망을 꿈꿀 권리가 있고, 비록 끊임없이 실패한다 해도 꿈을 꾸는 사람들은 또 생겨난다. 나의 실패는 작은 것일 뿐, 인간의 역사에서 아주 작은 것일 뿐,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라 해도 꿈을 꿀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는 소박한 확신이 아픈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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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팟캐스트로 김영하 작가가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청취했다. 첫회가 <금각사>였고, 작가는 서두를 낭독해 읽어주었다. 당시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던 나는 무엇에 마음이 이끌렸는지 바로 <금각사>를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책 얘기는 그랬다. 말을 더듬는 주인공이 세계를 탐색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열등한 고민으로 점철된 주인공에게 금각사라는 존재가 그의 세계에서 절정으로 자리한다. 막연히 상상으로 떠올렸을 때부터 그것을 목도하고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도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금각사를 불태우기로 결심한다. 자신을 짓누르는 그 관념의 사물을. 


그날의 나는 까닭 모르게 실소했다.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의 뚜겅이 열리지 않게 삼각김밥을 얹어 놓고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물을 떠다니는 새우 건더기의 살집에 대해 생각했고, 새우탕 컵라면 하나가 1,050원이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적당히 먹기 좋게 후후 불며, 삼각김밥을 먹다 남은 김을 국물에 풀어 먹었다. 내 하루는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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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당 냉난방비 예산과 관련한 기사를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최근 만나는 자리에서 푸념 하듯 아버지를 주제로 얘기를 하고는 하는데, 딱히 모아둔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노후 대비도 없는 실정에 조만간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도 나이인지라 아버지 본인 역시도 대단히 노년에 일할 거리에 자신을 잃은 상태이고.. 나는 사안에 느끼는 부담에 대해 토로했다. 친구 A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이라며 최근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드렸는데 거기서 받은 대우가 사람에 대한 자존심을 찾기 힘든 곳이었다며, 그런데도 그마저도 '잘려서' 지금은 집에 계신다는 얘기를 했다.


대단히 막연한 개념이지만 '아버지 세대'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있다면 일평생 부족하지 않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해왔을 뿐인데 그 대가치고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세상은 이제껏 뭐했냐며 마구 다그친다. 열심히 살아온 건 경제적으로 무능을 대변하고, 그 결과는 죄에 대한 엄벌로 나타난다. 집안 분위기는 건조해지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서로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게된다..


꽃보다 아름다운 노년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플라톤의 <국가>, 그 살벌한 정치론으로 무장한 세계에서도 노년은 황혼으로 물들어가는 휴식으로 기억된다. 듀런트의 비판을 빌리자면 '그럼에도 플라톤은 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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