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본 이름에 속하는 저자여서 집어 온 책이다. 책은 4장으로 구성돼 있다. 언어와 국가를 다루는 1장, 2장 일본정신분석, 3창 투표와 제비뽑기-기쿠치 간의 [투표], 4장 시민통화와 작은 왕국-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은 왕국]. 그리고 부록으로 책에서 언급되었던 작품을 제공한다.


 4개의 장은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첫장은 네이션=스테이트=캐피탈리즘의 '교환'을 분석한다. 이를 위해 '랑그'를 '국어'로 착각하게 되는 배경이 설명되고, 가상과 초월론적 가상에 대한 '사상된 공동체'가 논의된다. (비록 인용구는 2장이지만)


 "문자언어는 역사적인 문제다. 문자언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느 민족이 제국의 문자(문화)를 도입한 뒤 어떻게 자기를 확립했는가, 어떻게 자신들의 사상이나 감정을 나타내려고 했는가 하는 역사적인 사정을 생각하는 일이다."


 이를 부연하고 펼치기 위해 2장 "일본의 정신분석", "일본정신의 분석"으로 이어진다. 주변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일본의 지위를 은폐하고 초현실적으로 점잖게 서술되는 '일본적인 것'을 분석한다.


 3장은 민주주의 문제를 다룬다.


 "물어야 할 것은 중앙집권적인가 반중아집권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인가 아나키즘인가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중앙집권주의를 막을 수 있을까, 관료적인 지배를 막을 수 있을까를 물어보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술'이다."


 현행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대의 투표제와 현행 민주주의가 불구화한 제비뽑기를 통해 민주주의의 정신을 생각해 본다.


 4장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쓴 [작은 왕국]이라는 단편소설을 고찰하면서 1장에서 다룬 네이션=스테이트=캐피탈리즘의 다시 집중하고, 무한한 자본의 축적운동을 지양하기 위해 시민통화를 고민해 본다. "윤리적이며 경제적인 어소시에이션"이라는 1장에서의 언급처럼, 이 구상은 "따라서 여기서는 '화폐가 있어서는 안 된다'와 동시에 '화폐가 없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율배반이 (...) '시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와 '시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율배반"이 함께 다뤄진다. 


 칸트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만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을 도덕법치깅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법칙이 실현되는 세계를 '목적의 왕국'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인간을 '타자'로 간주해야 한다. 실제로 지구 온난화나 환경오염의 피해를 입는 것은 미래의 인간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타자를 수단으로만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순환형 경제로 이행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이행이 개개인의 도덕적 억제나 국가의 규제가 되어버려서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경우에도 시민통화가 열쇠가 된다. 시민통화에 기초할 경우, 미래의 인간을 희생시키는 경제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윤리적-경제적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타산적일 때 윤리적 행동과의 불일치를 느끼곤 한다. 그렇다면 이 '타산'에는 그 어떠한 이유에도 불변하는 진짜가 존재한다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이 책의 문제가 출발하고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떠한 조건과 결과 속에서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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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초장은 참 많은 것에 공감을 하게 되면서도 관심의 대상이 2차세계대전 전후로 집중해 있었다는 점에서 의문스러웠는데, 책 곳곳 역자의 부연이나 뒤의 후기를 통해 이 책이 50년에 쓰였다고 하니 참 놀라웠다.


 책은 많은 것을 다루지만 기본 골자는 저자가 마지막에 인용하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자본가에 대한 도덕적인 추궁이 아니라 자본 상황에 대한 사색과 그런 활동을 통해 얻어낸 사회주의라는 성찰을 공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라기보다는 당초에 원제 자체가 'The Truth About Socialism'이니 말이다.


 참고로 역자는 후기에서 이러한 당부를 남겼다.


 "일러둘 게 한 가지 더 있다. '계획'과 '몇 가지 질문' 장에서 원래 원서에 있던 소비에트 연방에 관한 대목을 뺐다는 점이다. 책 출간 당시에는 사회주의라는 주제를 다룰 때 소련이 대표 소재였겠지만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존재여서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내용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련이 미국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로 강력히 부상하는 시기에 저술된 데서 비롯되는 한계가 두드러져 보였다."



 생각을 다듬어 주는 흥미로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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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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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분야로 발달해 있는 일본답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아주 나근하게 설명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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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게 읽히는 책이다.


 먹는 것과 관련해서 내가 기억에 남는.. 뭐 구태여 추억이라 포장할 그런 물질은 내가 보았던 '얼라이브'라는 영화다.
















 영화는 대충 아마도 이럴 건데, 비행 사고로 조난을 당한 사람들의 생환기겠다. (스포인가?.. 무튼 중요한 스포는 뒤의 내용에서 계속)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호기심에 이끌려 계속 보게 되었는데 단연 이 영화의 압권은 식량이 떨어져 선택하게된 궁여지책이 동료의 사체. 어떻게 이럴수가... 그래서인지 그들이 결국 생환하게 되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란 참으로 복잡미묘하게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다른 길로 샜지만 어찌 되었건 사람의 요식 행위에는 어딘가 정신나간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인간은 그대로의 날것이 아닌 음식을 추구하는 존재인 걸까? 언젠가 친구와의 이야기에서 그 경계에 대해 음식이란 인간 존엄의 마지노선이라고도 말했었는데 지금도 딱히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 다른 한친구는 여기에 대해 체감이라고 답한 것도 같다. 거기엔 맵다, 쓰다, 달다니 하는 등등의 것으로는 모자라는 직접적인 충돌이 존재한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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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동네 서점이라는 어휘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잡지가 있어 근처 서점에 들른 나는 이내 책방에 해당 잡지를 찾을 수 없어 주인분에게 물었고, 들여오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후에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아마 으레 '들여오도록 해보겠다'는 립서비스를 들었던 거 같다. 하겠다도 아니고 '해보겠다'는 어휘를 체감하지 못했던 건지, 나는 멍청하게도 몇일 뒤 해당 서점을 다시 찾아 일전에 말한 잡지에 대해 물었다. 주인은 그런 얘기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반응이었다. 그뒤로 돌아온 나는 그냥 구독을 결정했다.



 오늘 밀린 책을 반납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내'(이 단어를 수도권 친구들 앞에서 쓰면 촌놈이라 놀림 받는다)에 있는 서점을 들렀다. 수험서 같은 경우 가격도 만만치 않아 덜컥 사기에는 무리라 아무래도 조금은 훑어봐야 해서였다. 좋든 싫든 정가제 영향도 있었고.


 어제, 원래는 야간일이 끝난 아침에 가볼 요량으로 전날에 영업시간을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뒤적였는데,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소위 '까는' 얘기가 있어 읽어보았다. 주차권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였지만 적잖이 기타 불만이 있던 분들의 댓글이 연달아 달린 걸 보니 문제가 있기는 확실히 있어 보였다.


 이날 가보니 확실히 변화를 느꼈다. 아니, 내가 평소에는 그렇게 의식적으로 주목하지 않아 평소에도 그랬는지 몰라도, 계산을 치르는데 손님마다 주차권에 대한 이야기가 꼭꼭 체크되었다. 그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관은 계산이었다. 값을 치르고 양도되는 물건을 찍고는 매대에 툭툭 던지는 점이나 거래를 증명하는 서명을 묻지도 않고 자기가 알아서 결제를 해버리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주목받지 않기 힘들었다.



 메모선장이라는 분의 블로그에 올라온 '친절하지 않은 정도는 괜찮다'(http://tirips.egloos.com/5878186)는 내게 가히 충격이었다. '종사'의 의미에서 당연히 친절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을 개발살 내는 내용이었다. 


나는 서비스업이라도 친절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다른 곳에 비해 친절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거나 다른 곳을 이용하겠다고 발걸음을 돌릴 수는 있지만 천하에 빌어먹고 저주받을 곳이라고 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로봇이 아니고 인간인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오늘 아침 급히 집을 나오다가 새끼발가락을 모서리에 심하게 박는 통에 뼈에 금이 갔을지도 모르고, 어제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에 다녀와 심란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라고 딱히 그걸 헤아려줄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심리 상태가 내 권리나 심리 상태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면 그 나름의 사정이 존재해도 괜찮다. “유리가면"의 츠키카게 선생이 연기 중에 우는 마야를 보고 윽박지르듯이 ‘가게에 들어서서 제복을 입은 이상 넌 인간이 아니라 웨이트리스야! 가면을 깨뜨려선 안 돼!’라는 논리는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중립을 지킨 자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지만, 서비스업은 딱히 사상과 진영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넌 친절하지 않으니까 불친절하기 짝이 없군!” 하고 매도할 수는 없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지도 않고 불친절하지도 않은 중립지역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상종 못할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남들은 다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주는데 넌 왜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을 주지 않는 거야!”라고 요구하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런 경우가 줄어들고 서로 좀 무뎌져야 모두 덜 피곤해지지 않을까?


출처:친절하지 않은 정도는 괜찮다


 기억나는 글이 있다. 파업 현장에서 소위 '짱깨'를 시켰는데 배달이 오지 않자 항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홍세화 씨는 한 사회학자의 말에 공감한다고 했다. "싸우는 과정 자체가 이 싸움을 통해 획득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풀었다는 점이나 대단히 두서 없는 단편이 되었지만, 그런 생각들이 스쳤다. 서점에 대한 발전적 논의라든지 개인적으로 느꼈던 불쾌에 대한 응당한 조치는 어차피 서로를 피곤하게 할 뿐이다. 루소에 상응하는 '보편 서비스'를 감사할 오지랖을 부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보편의 입장에서 오히려 감사 자체가 역설적이지만 말이다.)


 먹고 사는 입이 늘상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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