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우리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한 넌센스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아주 초반,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빠삐용에게 내려지는 선고다. "프랑스를 잊어라!" 그러니까 당신이 프랑스를 위해 해주어야 하는 일은 프랑스를 잊는 것이다.


 우리 안의 타자는 어떠한 모습인가? 그들은 정치적인? 사회운동적인? 호소만을 할 뿐, 그것은 철저히 구상될 수 없는 비역사성에 갇혀있다. 민주화? 그 동떨어진 모습은 분명히 '그러니까 당신이 한국을 위해 해주어야 하는 일은 한국을 잊음'의 차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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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이 영화의 흥미로운 장면. 처음 가족에게 배달된 로봇은 간략한 소개와 함께 '로봇 3원칙'에 대해 언급한다. 이에 좋다고 답하자 로봇은 '물러나야 잘 보인다'며 권고하곤 지금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화려함으로 무장한 입체 그래픽스를 선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상영되고 있는 로봇 3원칙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로봇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 그러니까 순전히 로봇 외의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그 수수께끼의 전언은 순전히 로봇의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와의 계약인가? 누구와의 위반을 암시하는가? 이런 질문이 남는다.


 영화는 한참을 흘러, 로봇은 자신을 인간으로 오인하고 그것을 주장한다. 이 흥미로운 풍경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도 포착된다. '그들'로 지칭되는 것들.; '우리'로서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그들은 우리인가? 그들인가? 아니, 우리가 대체 뭔가? 또한 그들은? 우리의 지시가 구분하는 그들을 낳고, 그들이 하는 구분이 우리를 구성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아닌 것인가? 우리는 그들이 아닌 것인가? 물론 영화는 그런 둘의 함정을 비껴가는 그 나름의 모범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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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짐멜의- 이 한 마디로 축약이 가능하다. "대도시에 작용하는 힘들은 전체 역사적 삶의 뿌리와 정점에 자리 잡고 있고 우리는 하나의 세포 같은 덧없는 존재로서 그러한 삶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불평하거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이해하는 데에 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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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노. 우리는 이 상황을 (정확히 말해) 즐긴다. 편의점 노예는 문제의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싸움과 분쟁을 싫어하며, 순전히 잉여적이므로. 우리의 미덕은 웃음이다. 그 어떤 제동도 없는 끝없는 동력. 그 무한성을 따라서. 필요한 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의 돌림병처럼 약속된 언어를 듣는다. "꼭 네가 아니어도 여긴.." 물론 필요로 하지 않음의 필요를 정점으로 돌아가는 생태계의 뻔함과 모순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도' ("꼭 네가 아니어도 여긴 누군가에 의해서 채워질 자리이기에 당신이 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한 잉여의 자리를 찾는다. 당신의 알바를 즐겨라! -현대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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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수 아닌 연수를 받고 있던 아침, 별 대수롭지 않은 뉴스 하나가 첫 화면에서 시선을 끌었다. 대형 여객선 하나가 침몰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사고의 경위도, 인명에 대한 이야기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윤곽이 없는, 금방이면 지나갈, 조만간 약속된 안전 불감증에 대해, 특유의 한국이라는 집단 정서에 대해 떠들어댈 하나의 가십거리 정도로 생각했다. 나는 그 어떤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을 생각할 수 없었다. 생환. 그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2. 어렴풋하지만 잊히지 않고서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보도를 막 벗어난 도롯가엔 차바퀴에 짓눌려 으깨어진 개의 사체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터져 널브러진 장기도, 헐떡이며 미동하는 숨조차도 느낄 수 없이 말라 비틀어져 박제된 과거였다. 그러나 그것은 몸소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살아 있었음을. 살아 있음을. 완벽한 무방비로 노출된 그것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3. 실종. 이것이 희망과 거짓을 오가는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있는가? 집계에 신경질적인 저널리즘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들의 죽음은 숭고가 아니다. 그들이 있고자 했던 오늘과 여기를 생각할수록 그것은 더욱이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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