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요리사의 책이다. 주제 음식이 있고 저자의 일화와 주제사적 지식(??)이 곁들여져 있다. 나는 원래 '맛있게'라는 인간의 포지션이 매우 불만이었던 사람으로, 요식이란 건 배부르면 장땡주의자였다. 가격대비 성능에서 맛이라는 요소 항목은 먹을 수 있는지의 여부 따위 정도. 인간이 먹기 위해 일삼는 무분별한 사치를 생각하면 내 생각은 더욱 타당했다.


 하지만 최근의 나는 여전히 그런 발상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살기 위해 먹는다' 따위의 생각과는 이별했다. 인간이 자행(!)하는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각적인지를, 쌉싸름한 시금치를 먹으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책이 뜨거운 한 숟가락이 아니라 한입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노중훈의 여행의 맛 잘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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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 말았다. 작품에 대한 개별 사례론으로 기대했는데 내 헛발이었다. 모든 것에서 재미를 추구하려는 현대적 괴질에 걸린 나로는 진지한 문학론에 질려버린 것이다. 다만 히익! 오따꾸를 전개해 나가는 작가의 고찰은 나에게 백수라는 즐거운 상상력을 떠올리게 해준다. 팍팍한 살림이 아니라 한가롭고 세상의 다분화된 주절거림들이 말이다. 지나칠 정도로 멍청하지만 유쾌한 에너지의 생각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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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4일. 집회가 있었다. 나는 생일이었고, 그냥 집에서 죽이나 치며 집에서 시켜준 족발이나 먹고 있었다. 티비 곳곳에서는 시위에 대한 생중계가 있었다. 선수 입장하시죠. 사실 별다른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장면을 연중 보이며 진행자들은 시합을 중계하듯 대치 상황에 열기를 돋우기 위해 열심해 애무했다. 그런 장면을 보며 아버지는 약해진 공권력에 대해 말했다. 옛날이 다시 등정하고 박정희가 부활해 어쩌고 저쩌고.. 캄보디아에서 힌트를 찾던 차지철을 알고나 하는 말일까 했지만, 뒤이어 요즘 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단박에 세상이 뒤집힌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나를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을 느끼게 했다.


 대체 이게 뭘까? 문학에서나 보던 '소리 없는 아우성'의 전형성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서로 부르기를) 시위자? 강경진압? 아니면 태평하게 방관하는 생일자? 이슈 없는 이슈. 질문 없는 문제. 그날에 대한 기록은 감내해야 했던 불편이라든지 폭력의 양상, 세계시민적(?) 평화소양 등등..


 예전의 나는 이런 실천적 행동에 (문자그대로) 한껏 기분이 고양돼 '어차피'라는 운으로 시작해 냉담하게 내리깠었지만, 지금은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군중이 된다는 게 세상의 차별적인 시선에 매몰된다는 고지이기도 한 현상황일수록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한계가 예전과 다르게 씻어지는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대단히 높게 평가하기 바빴던 대안언론의 역할의 한계는 여전히 '좋아요' 수준에 머물고 있고, 담론 없는 이미지의 생산과 거기에 소비되는 에너지들의 틀은 바뀜이 없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남겼는가? 


 대의제의 전제는 언제나 패자를 양산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승자 독식의 세상이다. 이 당연한 이치 속에서 민주주의는 '응답 없는 요청' 정도의 지위를 누린다. 임기라는 일종의 나름의 제동장치가 마련돼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속하는 운행의 '일탈'에 가깝다.


 살기 팍팍해지는 세상에서는 머리를 맞대기 보다는 서로를 상대화고 자신을 동물적으로 감각화하는 경향성이 짙어지기 때문에 '일상의 유지' 또는 '일상으로의 회귀'가 가장 강력한 테제로 자리하는 앞으로의 상황이라면 기존 방식의 담화가 지닌 한계성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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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는 발제다. 물론 수학에 대한 신적 권위에 대해서는 별로 찬동할 사람이 많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이 문제로 가기 위한 책에 소개된 도발적인(?) 이야기들.


 (마틴 가드너에게서는) 인간이 그 존재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가드너는 다음과 같은 재치 있는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공룡 두 마리가 숲속 공터에서 다른 공룡 두 마리와 마주쳤다면 그곳에는 네 마리의 공룡이 있게 된다. 그 공룡들을 관찰할 인간도 없고, 공룡이 자신들의 수가 넷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로 영리하지 못해도 공룡이 네 마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이클 이티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개념을 과연 지켜낼 수 있을까? 만약 우주가 1차원이었거나 불연속적이었다면 기하학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수는 확고한 토대 위에 존재하며 수를 세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를 한번 상상해 보자. 만약 지적인 능력이 인류가 아닌 광활한 태평양 같은 깊은 곳에서 홀로 떠다니며 살아가는 해파리에게 있었다면 어떨까? 이 해파리는 개체라는 것을 대한 경험이 전혀 없고 주위에는 오로지 물밖에 없다. 그렇다면 물의 움직임과 온도와 압력 같은 것이 이 해파리의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기본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속적인 세계에서는 불연속적인 수 개념이 발달하지 못하고 셀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수학사도 겸하기 때문에 고전역학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뒤에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대한 다차원적인 접근이라든지 확률 문제는 반납일이 코앞이어서 읽지 않고 그대로 반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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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주제가 있는데 듣고 보면 이상하다. 역사로부터 패배감을 찾고 편향을 읽으며 국민통합의 의지를 밝히는 조합에서 읽히는 서사구조상 화자는 국가이고 경제적인 정치가 읽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걸 다시 짜맞춰 주제화한다면 이렇게 되어야 정상이다. 국정의 역사화라고.


 이 표현이 불쾌하다고? 편향된 생각일 뿐이다. 그런 패배감에 찌들은 사고 방식을 근저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우주적 의지를 가지고 따라부르자. (그러면 우주가 나서서 도울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사실 사안이 황당하다보니 뭔가 진지하기도 어렵다. 다만 교과서의 위상과 공교육의 현실, 학문이라는 지반의 풍토 등을 보면 사안의 무게를 '이쯤이야'하고 낮춰 저울할 수 있지만, 어떻게든 이 사회에 출세하기 위해서는 국정의 역사라는 서사 구조를 '따라 읽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반길 일은 아니란 점은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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