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읽었지만 오래된 이야기여서 조금은 살려볼까 하는 생각에 다시금 들어 읽게 되었다. 거진 이야기가 초반의 중심적인 내용을 겉도는 식이기 때문에 핵심적인 초반과 그람시에 대한 논의에 초점을 맞추어 읽었다. 박정희 개인에 대한 초월적인 서술(빠든 까든)보다는 강압과 동의의 복합성으로 체제를 생동적으로 풀고 있어 박정희 시대 연구에서 한발 나아간 느낌을 준다. '우리가 기반한 역사에 대한 인식론' 이것이 적당한 표현이겠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기반한 역사적 상황이란 어떤 곳/것일까? 조금 다르게 마르크스이 말을 빌리자면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한물 지난 제주 해군기지 혹은 제주 강정마을을 주목해 본다. 지구한 양식 속에서 별다른 주목 없는 80인의 박수를 말이다. 안보와 개발에 대한 평화와 자연이란 대립의 투쟁 역사화는 어쩐지 실감되지 않는다. 허구 장치에 의한 역사적 인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대립을 세우고 있는 양식-싸우고 투쟁하는 장면들은 필시 안보와 개발이라는 논거로 초점을 모으는 오목 거울이다. 평화는 마을이 짝을 지을 수 없는 담론이고, 자연은 너무나 오독됐다. 어차피 여기서의 자연은 환경조사와 보존적 가치라는 인본적 관점이 아닌가. 나는 그 무엇보다 '행정 절차상 하자 없는' 사실인 80인의 -조금 얼빠진 말로 슈미트에서의 '갈채'(물론 갈채는 박수라는 행동 양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의 의지라는 점에서 오히려 행동하는 반대급부가 주목된다)와 같은- 박수에 주목한다. 이는 [동원된 근대화]에서 말하는 "추구하는 목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분야에 자원을 집중하고 다른 분야는 배제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자원 분배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66)하는 것을 경유하며 더욱 근저에 자리잡는다. "이런 점에서 지배는 민중들을 자신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호명하는 방식으로 민중의 지배에 대한 태도를 구성해 가고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197)


 이 사건에 대한 많은 질문이 '필요성'에 대해 묻고 있기에, 당연한 이야기로, 그것이 긍부정이든 필요성에 대한 사물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개발의 논리 선상에서 마을의 가치는 검토, 측정된다. 질문은 항상 집단이다. 대답은 듣는 과정의 부스러기다. 대답자가 '말을 한다는' 행위 자체가 대답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대답은 질문자의 물음에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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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란 시대는 어떤 예견과 태동의 두근거림일까? 우주를 생각할 수 있고 비로소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존재란 숨 막히는 앞-에-섬 속에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여전히 하루를 근근하는 이차원의 숙명의 시간에 (역시 이차원적으로) 숨이 막힌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진 근대와의 대칭성, 그로 인한 지칭성의 묵음(또는 합의 불가능의 전제라고도 하는)들이 잘 생각나질 않는다. 조금 뜬금 없지만 <늑대와 춤을>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마음이 답답해지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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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이란 과잉이다. 그것은 언제나 제값이 아닌 상태로 지불하거나 되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이라든지 이에는 이라는 등의 상호성은 동어의 술어 같지만 사정은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의 제값이란 없다. 그러나 폭력이 '값어치'라는 수단으로써 지불되는 그림에는 같은 통화지만 다른 그림들이 그려진다. 외계인이 부르기를 그 값어치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유전성이고, 푸른 지구의 추악한 과실이다. (영화 내용을 포함해) 외계인은 그 끝내 '치유할 수 없는 인간적인 폭력성'의 귀결을 목도하고 심심풀이로 실패한 지구, 정확히 말해선 인류를 멸망시킨다. 물론 여기엔 병구와 교환할 수 없는 폭력성의 자산을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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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은 건 아니고.. 2013년에 있은 EBS 초청 강연을 새삼 뒤늦게 지금 본 까닭에 그냥 생각해 봤다. 우리나라에선 이른바 '미소금융'이란 이름으로 실행되고 있는 마이크로크레딧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국에서 강단이 아닌 가난이란 현실과 맞닥뜨린 유누스 박사가 기본의 금융권에선 도무지 돈을 빌릴 수 없는 계층을 상대로한 은행, 그라민 뱅크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빈곤을 제도의 문제로, 그래서 잊히거나 과거의 유물로 남게하자는 그의 포부가 남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돈을 대출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가령 솔라 시스템이라든지 유아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영양 요거트 기획이라든지 하는 여러 방면에서의 사회적 기업 활동이 인상에 남았다.


 물론 이처럼 그가 하는 활동이 다방면에 있는 만큼 그를 꼭 마이크로크레딧의 전신(全身)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마이크로크레딧에 대한 몇몇 뼈 있는 글도 있다는 걸 생각하며 균형 있는 독서생활(?)을 가져본다. (구글에서 도서 검색란에 '장하준 그라민'이라고 치는 것만으로도 해당하는 내용 단락은 충분히 볼 수 있다)

















 여기에 추가로 [경제와사회]에 실린 '국제금융기구와 빈곤 축소 프로그램'이라는 글도 읽으면 좋겠다. 가령,


"NGO의 영리화 현상은 그라민 은행과 미국의 몬산토(Monsanto) 그룹 간의 계약 에서도 관찰된다. 유전자 변형농산물 생산으로 유명한 몬산토 그룹은 빈번하게 국제 농민, 환경단체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98년 6월 25일 그라민 은행은 몬산토 사에서 15만 달러의 자금을 받기로 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전 세계 환경운동 및 농민단체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 돈은 그라민 은행을 통해 대출 형태로 방글라 데시 농민에게 배분되었는데, 대출을 받은 농민들은 이 돈을 몬산토 사의 제초제, 혼성미(hybrid rice), 혼성 옥수수, 목화 종자를 포함한 농업제품과 기술을 구입하는 데 써야 했다. 이 사건에서처럼 공동체의 신뢰와 사회적 자본에 토대를 둔 NGO와 마이크로파이낸스 네트워크는 국제금융공동체의 구조조정이 거시적인 차원에 서 수행하는 금융적 징계, 즉 조건부 지원을 미시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수행 하는 저비용 ‘사립탐정(Pinkerton)’(캐나다의 농업 및 환경 NGO인 RAFI가 그라민 은행을 비판하며 붙인 별명)으로 기능하기도 한다(RAFI, 1998)."


 라는 단락의 시사점과 그 방향성을 말이다. 위 논문 결론에서의 말처럼 비판적인 평가가 섣부른 만큼 효과성에 대한 단언도 어렵다는 반증으로 많은 참고를 할 필요가 있겠다. 단지 사회적이고 명망이 있다는 이유로 너무 따르기만 하기 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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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의 흐름은 아주 평이하다 할 수 있다. 특수부대를 다룬 여타의 영화처럼 자국의 요원이 첩보활동을 하던 중 정체가 탄로나게 되어 적에게 잡히고, 그런 요원을 구출하게 되면서 드러나는 더 큰 음모를 저지하는 영화겠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여타의 영화와 특이점을 달리하게 되는 이 영화만의 고유성은 무엇보다 '실제'를 강조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전술, 무기, (분기돼 있지만 영화로 통합되는 각각의) 실제 사건의 재현들. 그렇기에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은 너무나 압도적인 힘이 운영되는 미국을 선전한다고 시달리지만, 동시에 (지칭되는 그가 아닌) 힘의 작동 양식을 비춘다. 이 영화를 공포와 폭압이라는 세력에 맞서 자유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국가를 위해 희생한 남녀(the men and women) 모두에게 헌사하며 미래를 호명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취를 감추는 미국(과 적대)이라는 공허의 유산은 그래서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몸이 떨리는 무서움을 느끼게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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