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는 표절이 문제가 아니었냐마는 이번 신경숙 표절(에 특정한 '사건'이라고 덧붙여야 하는)은 느끼는 바에 있어서 좀 다르다. 좀더 표절에 대한 본질적이랄까 하는 느낌에서 그렇다. 


 해당 지적이 가리켰던 문장을 놓고 본다면야 문장의 유사성에서 "반가운 마음"보다 살짝 달리된 표현과 사이사이 중간에 삽입된 문장들로부터 고도의 심리적인 인상을 받는다. 문단이라고 하는 토막 하나가 "작품 전체를 좌우할" 정도의 "독창적인 묘사"가 아니라는 조급한 반론은 (비록 지금에는 사과로 번복되었지만) 논점을 흩트리려는 다분한 의도에 비열성까지 느끼게 한다.


 나는 표절 시비와 같은 단어 선택에서 숨기기 힘든 엄숙주의를 느끼게 된다. 마치 대단한 사실인양 치장되는 이야기들. 멋진 구상들. 고매한 품짓. "몰래 따다 쓴다"는 표절의 풀이는 틀렸다. 어떻게 따다 쓰면서 모른다는 말인가? 소위 말하는 무의식적 글쓰기에 뒤따르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은 인정이다. 두고 온 물건에 설명이 필요한 때는 변명일 뿐이다. 그렇기에 저열한 논리는 마땅히 '베끼기'란 친숙한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영 찜찜한 가능성, 본인은 사실을 잊었고,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는 진실은 마치 "매장하려는 움직임" 같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닥 충돌하는 부분도 없다. 사실은 가르기가 아니라 종합하는 것이니. 작가는 모른다, 그러나 독자라는 삼자로 전치하자면 이해될 법도 하다.. 이제 판단은 당신의 몫으로, 당신은 자유롭다. 누구도 대신하지 못하는 당신이 생각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난 어째선지 '기업친화적'이다.

 내 사정보다는 회사가 우선이고,
 언젠가 문을 두드렸던 면접관이 했던 말(같이 방문했던 형이 근로시간에 대해 물었는데)
 "일이 있으면 휴일에도 해야죠. 회사가 있으니까 밥 벌어먹고 사는 건데.."
 을 질색하던 형과 달리 그럴싸한 그 논리에 매료되는 나인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거긴 가지 않았다.)
 나 정도면 경제인 사면은 OK이지만 정치적 사면은 NO라는 논리 오류(법제도의 근간을 갱제적 효용성에 두는)도 충분히 수용가능하다. 철지난 유머에 대입해 보자면 나라 경제를 이야기하는데 파리가 앉는 격이다. 경제를 살립시다.

 안 그래도 요즘 일이 끊겨 회사에 출근해 빈둥거리다 밥이나 축내는 터에 죄스러운(!?) 이 때에 친구가 휴가 얘기를 물어왔다.
 나는 요즘이 휴가 시즌이기는 하지만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친구는 쌍팔년도냐는 식으로 그런 것이 아직 대한민국에서 현존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하며 거긴 노조도 없냐고 물었다.
 나는 거기에 대해 그게 뭐냐고, 노라조? 냐고 답했다.
 친구는 말이 없었다.
 나는 좀 억울하다. 이 나라 최고의 선망인 삼성도 노조가 없는데..
 일이 이 사태가 되도록 삼성은 무얼했는가?
 휴가를 잘 모르겠다는 점에서 오류겠지만, 저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나 삼성 다녀...."가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친구로부터 연락이 없다.
 다시 한번 일이 이 사태가 되도록 삼성은 무얼했는가?
 그러니 삼성은 하루 조속히 나를 데려가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연민, 그러니까 나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어떤 인간적인 동정을 느꼈다. 니체가 혐오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개념에 들어가는 그 정신을 말이다. 나는 비로소 그 정신이 긍정이 아닌 비관적인 에너지, 허무의 초석이 아니라 끝없는 세계의 정념임을 몸소 깨닫는다. 동시대의 연대감이 아니라 그 결과물인 고마움에 대해 생각할 때, 혼란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당연하지만-당연히)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또한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한' 책이다. 그의 '문제작'인 오리엔탈리즘을 필두로 하여 그 생각들로 하여금 에드워드 사이드를 구성하게 한다. 서구와 비서구라는 분법 자체에서부터 은연히 자리한 서구주의 담화를 밝히고, 서구를 서구답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서구로 하여금 비서구답게 하는 출현과 재현의 양식들을 통찰하고 비평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구와 비서구의 대립이 아니라 대립이라는 함몰된 양식이다.

 이 책은 집요하게 사이드의 세계성을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수한다. 지식이 (설령 그 자신이 뜻하지 않더라도) 봉사하는 문화 권력 속에서 "민족주의적 독립의 영역에서 해방이론 영역으로의 거대한 문화적 전환"이라고 표현되는 비평적 힘, 즉 "권력을 향해 진리"를 말함으로써 말이다. 비평과 세계성의 관계는 이렇게 요약된다.


 "대립하는 양쪽, 반드시 어느 한 편에 서게 되는 전쟁, 이 한가운데에서조차 비평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쟁점과 문제를 둘러싸고 혹은 어떤 가치나 심지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울 때, 거기에는 이미 비평적 의식이 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행위자를 사유하는 방식은 그의 저작들이 저항의 이론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책 껍데기의 가정처럼 "에드워드 사이드가 없었다면" '가장 익숙한 낯섦음과의 조우'를 조금 늦게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역시 가정된 가능성이다.)

 

 이 책을 읽으며 으레 외국인이면 물어보는 한국 문화에 대한 질문과 흔히 매체에서 대답되는 24시간과 배달(이 둘은 결국 합쳐 24시간 배달이 되는데)과 자신이 살던 자국에서 겪던 '불편'과 판이하게 다른 편함에 대한 증언과 부연 설명 그리고 그렇게 한국(인)으로써 여길 자랑거리 혹은 자부가 되는 문화론이 떠올랐다. 이 책은 단순히 나가 구상하는 너라는 대항적 관계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그것을 이루는 세계 그곳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격동할 분노나 저주도, 가슴 뛰는 용서와 화해도 아니었다. 그런 격찬 감정보다는 소박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인생에 대한 나른한 찬가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