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4일. 집회가 있었다. 나는 생일이었고, 그냥 집에서 죽이나 치며 집에서 시켜준 족발이나 먹고 있었다. 티비 곳곳에서는 시위에 대한 생중계가 있었다. 선수 입장하시죠. 사실 별다른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장면을 연중 보이며 진행자들은 시합을 중계하듯 대치 상황에 열기를 돋우기 위해 열심해 애무했다. 그런 장면을 보며 아버지는 약해진 공권력에 대해 말했다. 옛날이 다시 등정하고 박정희가 부활해 어쩌고 저쩌고.. 캄보디아에서 힌트를 찾던 차지철을 알고나 하는 말일까 했지만, 뒤이어 요즘 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단박에 세상이 뒤집힌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나를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을 느끼게 했다.


 대체 이게 뭘까? 문학에서나 보던 '소리 없는 아우성'의 전형성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서로 부르기를) 시위자? 강경진압? 아니면 태평하게 방관하는 생일자? 이슈 없는 이슈. 질문 없는 문제. 그날에 대한 기록은 감내해야 했던 불편이라든지 폭력의 양상, 세계시민적(?) 평화소양 등등..


 예전의 나는 이런 실천적 행동에 (문자그대로) 한껏 기분이 고양돼 '어차피'라는 운으로 시작해 냉담하게 내리깠었지만, 지금은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군중이 된다는 게 세상의 차별적인 시선에 매몰된다는 고지이기도 한 현상황일수록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한계가 예전과 다르게 씻어지는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대단히 높게 평가하기 바빴던 대안언론의 역할의 한계는 여전히 '좋아요' 수준에 머물고 있고, 담론 없는 이미지의 생산과 거기에 소비되는 에너지들의 틀은 바뀜이 없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남겼는가? 


 대의제의 전제는 언제나 패자를 양산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승자 독식의 세상이다. 이 당연한 이치 속에서 민주주의는 '응답 없는 요청' 정도의 지위를 누린다. 임기라는 일종의 나름의 제동장치가 마련돼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속하는 운행의 '일탈'에 가깝다.


 살기 팍팍해지는 세상에서는 머리를 맞대기 보다는 서로를 상대화고 자신을 동물적으로 감각화하는 경향성이 짙어지기 때문에 '일상의 유지' 또는 '일상으로의 회귀'가 가장 강력한 테제로 자리하는 앞으로의 상황이라면 기존 방식의 담화가 지닌 한계성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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