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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또 한 명의 일본 작가를 만났다. 그것도 무명(無名) 신인 작가가 아닌 일본 소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익숙한 일본 대표 문학상인 나오키상 2012년 수상 작가로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작가라는 “츠지무라 미즈키”의 <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원제 オ-ダ-メイド殺人クラブ / 북스토리 / 2012년 9월)>이란 작품이다. 항상 느껴온 것이지만 추리소설 분야에서의 일본의 저력 - 물론 순문학(純文學)에서도 노벨 문학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으니 결코 약한 것은 아니겠지만 순문학은 “무라카미 하루키”에는 별로 접해본 적이 없다 - 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지, 거기에 어떻게 매 작가, 매 작품마다 저마다 다른 색채와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지 부러움을 넘어 시샘이 날 정도이다. 이제 일본 작가를 대할 때면 새로운 작가에 대한 낯설음보다는 어떤 재미와 감동을 선사할 지 기대감이 먼저 앞서는 수준이 되어 버렸던 터라 이 책도 제목만큼 기발하고 멋진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시작하였다.
중학교 2학년 소녀인 “고바야시 앤” - 어머니가 <빨강머리 앤>의 골수 팬이라 딸 이름도 “앤”이라고 지었다 - 은 절친했던 “세리카”와 “사치”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다. 얼마 전 세리카가 열광하는 인기 그룹에 대해 몇 마디 한 말 때문이다. 앤은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같이 활동하는 농구 동아리에서도 외면하는 둘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이런 왕따 관계는 부담임인 “사카다”에게 앤이 대들자 쉽게 끝나버리고 셋은 친구 관계를 회복한다. 그렇지만 앤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살인 사건이나 청소년 자살 기사를 스크랩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던 앤은 어느 날 엄마가 스크랩 기사가 감춰져 있는 책상 서랍을 열어 본 것을 알고 크게 실망을 하고는 자신도 스크랩 기사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앤은 같은 반 친구이자 통학 길에 죽은 쥐를 버리던 남학생인 “도쿠카와”에게 "소년 A” - 청소년 살인 기사에서 익명의 범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 , 즉 자신을 죽여 달라고 제안한다. 그렇다고 단순하고 평범해서 금세 잊혀질 그런 죽음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죽음이어야 한다.
언제까지고 텔레비전에 나오고, 나중에 되돌아봐도 틀림없이 올해 최고로 꼽힐 사건이 아니면 안 돼. 사람들이 아아, 그 사건이 있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구나 하고 희자하고 바로 기억에서 끌어낼 수 있을 만한 사건이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사건을 저지른 사람한테나 죽은 사람한테나 아무 의미가 없어. 아무도 저지르지 못했던, 새로운 패턴이 아니면........ 앞으로 나타날 소년 A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언제까지나 '아, 그 패턴이구나'하고 기본이 될 만한, 그런 사건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 P.143
그렇게 둘은 특별한 죽음을 계획한다. 둘은 “비극의 기억”이라는 노트를 공유하며 살인방법, 장소, 시간들을 상의하고 시내 사진관에서 앤의 죽은 모습까지 모의 촬영까지 해본다. 그러던 중 풀린 줄 알았던 앤과 세리카, 사치의 관계는 세리카의 남자 친구와의 이별과 자살 소동 등 일련의 일들로 인해 다시 한번 꼬이게 되고 앤은 또 한 번 두 친구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힘든 학교생활이 계속되는 와중에 앤과 도쿠가와가 약속했던 죽음의 시간인 연말이 어느새 성큼 다가온다. 과연 앤이 주문(오더 메이드)한 살인은 일어날 것인가?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뇌리에 오랫동안 남을 “특별한” 살인이 될까?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랍니다)
추리소설인 줄 알고 읽었는데 소재만 “살인”, 그것도 계획만 할 뿐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고 15세 소년소녀들이 겪는 사춘기적인 감수성과 성장통 - 책에서는 “중 2병”이라고 부른다 - 을 다룬 “성장 소설”이었다. 처음부터 추리소설이라고 예단을 하고 읽어서 그런지 읽으면서 언제쯤 주인공 “앤”이 자기가 바란 대로 특별하게 죽는지, 생각해보면 참 끔찍하고 잔인한 상상이 이뤄지길 기대하며 계속 읽었지만 결국 그런 기대(?)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고 실망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나의 제멋대로의 예단(豫斷)일 수 도 있었지만 <살인클럽>이라는 제목과 “난 오늘 살인을 주문했다”라는 띠지 문구, “청춘 미스터리 걸작”이라는 뒤표지 문구 등 여러 면에서 이 책이 추리소설일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정황(?)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나만의 오해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망감은 잠시잠깐이었을 뿐 성장소설의 감동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금세 잊혀지지 않는 여운으로 오랫동안 남았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을 보낸 지 수십 년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의 사춘기 시절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책 속 상황에 오버랩이 되었고, 당최 모를 것 만 같았던 요즈음 청소년들의 정서와 고민을 어느새 공감을 하게 되었다. 나도 학창시절 어머니께서 내 일기를 몰래 훔쳐보시는 것을 알게 되고는 어머니께 대들었다가 아버지께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앤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어떤 방법으로 죽어야 부모님께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추리소설과 범죄 영화 - 아마도 추리소설 마니아가 된 게 이때 무렵 같다 - 들을 보면서 살인 유형과 방법들을 수집하고, 나 나름대로의 완전 범죄 트릭을 구상하고는 심지어 소설로 써보기까지 했었다. 그 때 그런 고민들과 구상들을 잘 만 다듬고 완성했으면 오늘날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 있을 법도 한데 그저 공상으로만 끝낸 것이 아쉬운 마음마저 든다. 또한 지금처럼 왕따나 이지메라는 용어는 없었지만 우리 학창시절에도 친구들에게 돈 빼앗기고 매일 얻어맞는, 이른바 “왕따”들이 있었고, 내가 직접 괴롭히거나 돈을 빼앗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그 아이들을 무시하고 따돌림 했던, 혹시라도 동참하지 않으면 나도 따돌림 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던 많은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춘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일종의 성장통 쯤으로 여겨질 수 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가장 큰 불안과 고민꺼리였다. 주인공인 앤이 수십 년 전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기에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었고, 추리소설로써 잔인한 결말을 바라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부디 좋은 결말(Happy Ending)로 끝나기를 바라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눈길을 뗄 수 가 없었다.
마침내 앤은 이런 모든 힘든 일을 견뎌내고 내가 바라던 대로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앤은 이렇게 독백한다.
그날, 나는 확실히 죽을 각오였다. 소녀 A와 나를 가르는 벽은 그렇게나 얇았다. 가까웠다. 저지르지 못한 '비극의 기억'을 우리는 언제까지나 가슴에 안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 여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정하고, 각오하고, 포기하고, 가능하면 즐겁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P.462
앤에게는 정말 힘들고 괴로웠던 중학교 2학년 생활이었지만 그런 괴로움이 앤을 한 뼘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친구들에 비해 늦되었던 생리의 시작과 함께 말이다. 여느 성장소설 속의 흔한 성장통과 결말이라고 볼 수 도 있지만 부쩍 커버린 앤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본 듯한 느낌이 들면서 행복한 결말이 주는 안도감에 흐뭇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책 읽기를 마칠 수 가 있었고, 이런 감동 때문에 추리소설로써의 실망감은 금세 잊을 수 가 있었던 같다.
이처럼 성장 소설로써는 꽤나 재미있고 감동적인 잘 쓴 작품(秀作)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긴 요즘처럼 청소년 성폭력이나 자살 사건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 소설 속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잠시나마 실망했다니 내 정신상태가 영 이상한 것일 수 도 있겠다. 아무래도 요즈음 추리소설에만 몰두하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내 감정이 너무 피폐해져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혹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게임이 청소년들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처럼 - 그저 최근 청소년 폭력의 원인을 게임에다 전가시키려는 꼼수로 보여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나도 청소년 시절 게임을 즐겨했고 음란물도 봤지만 지금 결코 변태 성욕자나 폭력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 추리 소설이 나쁘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주기 바란다. 아뭏튼 이 책, 내 사춘기 시절을 돌이켜 보게 만드는 성장소설로써는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던 별 다섯 개 만점을 주고 싶지만, 추리소설로 오해(?)하게 만든 것은 괘씸해서 별 하나를 깎아서 별점 4개를 준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심술이니 오해 없기를^^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분들은 이 책을 추리소설이 아닌 성장소설로 읽기를, 그래서 나처럼 심술이 나지 않기를 당부하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