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파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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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악몽(惡夢)을 꾸게 만들 정도로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겼던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일곱 번째 권인 <스노우맨> - 국내에서는 시리즈 중 이 책이 첫 출간 작품이었다 - 을 읽고서 “스티그 라그손”의 <밀레니엄>과 함께 서구 스릴러 소설의 평가 기준이 될 것이며, 후속작이 기다려지는 작가 중 1순위가 바로 “요 네스뵈”가 될 것이라는 감상글을 올렸던 적이 있었다.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주변 지인들에게 입소문을 퍼뜨렸고, 몇 몇에게는 책을 구입해서 선물도 했었는데, 첫 반응은 너무 두껍고(624 쪽), 노르웨이 이름과 지명이 어렵다는 시큰둥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의 반응도 한 목소리였는데, “너무” 재미있었다는 - 다들 “너무”라는 수식어를 꼭 붙였다 - 소감과 시리즈라는 데 후속권은 언제 나오느냐는 질문이었다. 출판사 카페를 드나들면서 출간 소식을 주고 받으며 기다린 지 8개월 만에 드디어 기다리던 해리 홀레 시리즈의 신작을 만나게 되었다. 한층 더 두꺼워지고(780 여 쪽) 제목 또한 더욱 강렬해진 <레오파드(원제 The Leopard : Panserhjerte / 비채 / 2012년 10월)>이 바로 그 책이다. 지인들은 출간하자마자 책들을 구입해서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오늘 몇 페이지까지 읽었다며 짧은 감상들과 스포일러 - 정작 나는 아직 읽기 시작도 하기 전인데 말이다 - 를 주고받으며 책에 열광했고, 며칠 만에 다들 읽고는 내게 보내온 반응들 또한 전작인 <스노우맨>과 마찬가지였다. 책 “너무 너무” - 이번에는 “너무”가 하나 더 붙었다^^ - 재미있고, 다음 책은 또 언제 나오느냐고.

 

 

보통 감상글을 적을 때는 줄거리 소개를 하고 감상을 적곤 하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책 읽기를 늦게 시작해서 그만큼 감상글도 늦게 올리게 되었고, 이미 인터넷 서점들에 감히 내 허접한 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고 훌륭한 서평들이 많이 올라와서 기존의 감상글 형식으로는 중언부언(重言復言) 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 아직 <스노우맨>을 읽지 않은 후배에게 <스노우맨>과 이 책을 선물하면서 조언(?)으로 해준 “레오파드 읽는 방법(讀法)”으로 감상을 대신하고자 한다.

 

 

전작인 <스노우맨>을 읽지 않고 이 책을 바로 읽어도 되나?

 

 

<레오파드>는 시점(時點)이 전작인 <스노우맨>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후이다. 책은 주인공인 “해리 홀레”가 스노우맨 사건 때문에 가운데 손가락과 연인을 한꺼번에 잃고 홍콩의 뒷골목에 숨어 살고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책 속에는 스노우맨 사건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고, 등장 인물들 또한 전작에 이어 나오는 인물들도 몇 몇 있어 <스노우맨>을 읽지 않았다면 홀레가 전 사건으로 입은 심신(心身)의 깊은 상처(트라우마)나 등장인물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반가웠던 장면인 바로 해리가 병원에 갇혀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스노우맨을 찾는 장면 - 연쇄살인범을 만난다는 게 반갑다는 게 이상하겠지만 워낙 전작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범인인지라 그의 후일담을 접하는 게 마치 드라마 주인공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반가웠다 - 이었는데, 이 또한 전작을 읽었던 분들이라면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전작인 <스노우맨>을 꼭 먼저 읽기 바란다. 전작도 만만치 않은 분량이던데 언제 다 읽느냐고? 다음 조언에도 언급하겠지만 한번 잡기 시작하면 단숨에 읽게 될테니 분량은 전혀 걱정마시길. 그래도 부담이 된다면 다른 독자들의 <스노우맨> 서평도 많이 올라왔으니 그 글이라도 먼저 읽어보길 바란다.

 

 

분량이 너무 많아 언제 다 읽을지 걱정되고 갖고 다니면서 읽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그리고 노르웨이 이름과 지명이 영 낯설기만 하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전작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처음 대하는 분들은 웬만한 책 두 권 분량에 미리부터 겁을 먹게 되고, 낯설기만 한 노르웨이 이름과 지명, 단어들에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전작을 읽을 때 그런 부담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전혀 걱정하지 마시라. 시작이 어렵지 시작하고 나면 그런 부담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사라지고 말테니 말이다. 우선 노르웨이식 낯선 인명과 지명은 조금만 읽다 보면 금세 익숙해진다. 어차피 노르웨이어보다는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를 자주 접한다고 해도 우리말이 아닌 이상 낯설긴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리고 줄거리를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페이지를 꽉꽉 메우고 있는 많은 사건들과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 그리고 치밀한 심리묘사들은 조금만 읽어도 탄력이 붙어 분량에 대한 부담감이나 지루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페이지를 쉴새없이 넘기게 만든다. 그렇게 숨 가쁘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남은 분량이 읽은 분량보다 적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깜짝 놀라게 될 것이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는 그 분량도 너무나도 짧다는 생각이 들어 1~2백 페이지가 더 계속되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다음 책은 언제 나오는 거야 하는 조바심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책을 주로 출퇴근 시간과 밤에 침대에서 뒹굴뒹굴 거리며 읽는 터라 처음 이 책을 받아들고서 들고 다니면서, 또한 누워서 읽기가 만만치 않은 8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와 다른 책들에 비해 줄 간격도 빽빽하고 작은 글자 크기 - 많은 분량을 한 권에 편집하려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 또한 영 부담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종이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책(e-book)을 구매해서 이번에 장만한 전자책 기기에 담아서 읽었다. 글자 크기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기기 자체가 책(800g)의 1/4 밖에 되지 않은 무게(215g)인지라 휴대는 물론 누워서 읽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고, 전자책 기기는 특성상 한 페이지씩 읽을 수 있어 오히려 종이책보다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어서 가독성(可讀性) 또한 만족스러웠다. 아직은 종이책 특유의 읽는 맛을 훨씬 즐겨하지만 그래도 가격도 종이책보다 싼 데다가 휴대에도 부담이 없으니 여러모로 이 책처럼 분량이 많은 책은 전자책으로 읽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물론 전자책 기기 값이 아직은 부담되는 가격이긴 하지만 말이다.

 

 

살인 장면이 너무 잔인하다는데........

 

 

좀 잔인하다는 평은 인정한다. 전작인 <스노우맨>에서는 여인의 머리를 잘라내 눈사람 머리로 장식하는 장면이 나오며, 이번 책에서는 “레오폴드의 사과”라고 작은 공 모양의 장치를 입에 물리고 줄을 잡아당기면 24개의 바늘이 튀어 나와 얼굴을 꿰뚫어 피가 목 안에 고여 익사(溺死)하는 잔인한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 여인의 목에 밧줄을 걸고 풀장 다이빙대에서 밀어 목이 잘리는 장면이나 불로 등판에 화상(火傷)을 입히는 장면 등 잔인한 장면들이 여럿 나온다. 이렇게 장면만 보면 너무 끔찍하고 잔인한데, 막상 읽어 보면 작가가 공포소설 만큼 구체적이고 상세하고 묘사하고 있진 않아서 그다지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개인마다 잔인함을 느끼는 정도는 다를 테니 너무 잔인한 장면은 그 대목만 살짝 스킵해도 좋을 것 같다.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책의 분위기에 몰입하려면 조금은 참아보는 것은 어떨까?

 

 

읽어보니 해리 홀레, 허점도 많고 영 성격이상자 같은데?

 

 

미국 FBI 연수를 다녀오고, 호주에서의 연쇄살인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으며, 노르웨이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인 “스노우맨” 사건도 해결했던 화려한 경력이 보여주듯이 노르웨이 현직 형사 중 가장 유명한 형사인 “해리 홀레”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단서를 척척 찾아내고 범인의 숨통을 죄어가는 수사 능력은 여느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소설 탐정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탁월하고 뛰어난 능력을 선보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는 전작에서도 그러더니 이번 편에서도 작은 단서를 확대 해석해서 범인을 오판(誤判)하는 실수도 여러번 저지르며, 범인에게 죽임을 당한 뻔한 위기도 여러 번 맞이할 정도로 허점을 많이 노출한다. 그래도 사건을 해결했으니 수사 능력만큼은 인정해주자.

 

 

그렇다면 개인적인 성품이나 사생활 면은 어떨까? 스노우맨 사건 때문에 손가락을 잃고, 사랑했던 연인마저도 떠나가 버린 그는 홍콩으로 도피해 와서 - 원래는 뉴질랜드로 가려고 했는데 기내(機內)에서 술을 너무 마셔 홍콩에 강제로 내려졌다 - 아편을 피워대고, 경마 도박을 하는, 말 그대로 “폐인”으로 살아간다. 스노우맨 사건을 모방한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며 자신을 찾아온 여형사에게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귀국을 거부하지만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는 금세 마음을 고쳐 먹고 귀국길에 올라 여차저차해서 살인사건을 담당하게 되지만 역시나 삐딱한 성격은 여전하다. 자신이 속한 강력반과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는 “크리포스” - 우리 식으로 하면 강력사건 전담 특별 조직 쯤이라고 할까? - 와 사사건건 부딪혀 상사를 곤란하게 만들기 일수이고, 홍콩에서 귀국하면서 몰래 들여온 아편을 피워대다가 크리포스 수장(首長)에게 협박을 당하기도 하며, 알코올 중독자 경력을 십분(?) 살려 술에 진탕 취해 크리포스 수사원들 회식 장소에 가서 행패를 부리다가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정의(正義)롭지 만도 않은, 오히려 지극히 이기적이기까지 한데, 눈사태에 갇혀 사경(死境)을 헤맬 때 살릴 가망성이 높은 동료 남자 형사는 버려둔 채 연인이 된 여형사를 먼저 구해는 바람에 동료 형사가 죽게 되고, 결말에서 범인과 대치하는 장면에서 연인이 아닌 다른 여성 인질 - 그것도 그녀의 어머니께 구해오겠다고 약속한 - 에게 총을 쏴서 결국 그 인질과 범인을 함께 사살(射殺)하기까지 한다. “선택”이야 해리의 자유라지만 비난받을 만한 그런 선택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강력반 반장이라는 직책이 무색할 정도로 성격이 여린 면도 있어서 위독하신 “아버지” 때문에 폐인 생활을 접고 다시 돌아오고, 스노우맨 사건으로 자신 곁을 떠난 연인과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그녀의 아들을 못 잊고 애타 하지만 그녀에게 연락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며, 결말에서 자신을 정리해볼 시간을 달라며 다시 홍콩으로 떠나지만 어찌보면 새롭게 시작한 사랑을 책임지기 싫어 도피하는 것으로 오해살 만하다. 이쯤 되면 어느 분이 말하신 “다크 히어로” 수준을 떠나서 “사회 부적응자”, “인격 파탄자”, “성격이상자” 등 비난이 쏟아질 만 하다.

 

 

그런데 오히려 해리의 이런 “인간적인” 면이 추리소설 속의 천편일률적인 정형화된 캐릭터에서 벗어나 그를 더 현실감있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괜한 고집을 부리고, 상사들과 사사건건 부딪히기도 하지만, 작은 상처에도 아파하고, 때로는 지극히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너무나도 인간적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플롯과 트릭의 기발함과 정교함이나 충격적인 반전이 아니라 바로 주인공 “해리 홀레”라고 생각한다.

 

 

다른 스릴러 소설하고 비교해보면 어때? 예를 들면 <밀레니엄> 시리즈하고 비교해 보면 말야.

 

 

추리·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올해 많은 작품들을 만났다. 그동안 써 놓은 감상글들을 읽어 보니 호들갑을 떤 감상글들이 여럿 눈에 띄인다.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몰입하는 성격 탓이기도 하고 그만큼 재미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의 경중을 비교하는 것은 작가들에게 실례이고, 또한 개인 취향이 다를 수 도 있으니 다른 책들의 실명을 거론하지는 말기로 하자. 다만 이미 언급했으니 <밀레니엄> 시리즈와 비교해본다면 서두에서도 밝힌 것처럼 “동급(同級)”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다만 <밀레니엄> 시리즈는 작가가 안타깝게도 사망해서 이제 더 이상 만나볼 수 없지만 이 “헤리 홀레” 시리즈는 이 책에 이어 아홉 번째 작품인 <유령 The Phantom>까지 나왔다고 하니, 국내에는 <스노우맨>과 이 책, 두 권 밖에 출간되어 있지 않다니 만날 기회가 더 많다는, 그래서 즐거움과 재미를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리 홀레” 시리즈에 점수를 좀 더 주고 싶다.

 

 

이 글 시작할 때는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역시나 주저리주저리 글이 늘어졌다. 내 감상도 서두에서 언급한 지인들이 반응처럼 “너무 너무 재미있다”, “후속권은 빨리 만나보고 싶다”로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어느 독자분 말씀대로 올해 추리·스릴러 소설은 <스노우맨>으로 시작해서 <레오파드>로 끝을 맺는, 나에게는 “해리 홀레” 시리즈로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수 있었던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그래서 올 한 해 읽었던 스릴러 소설에서 하나 만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이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를 추천하고 싶다. 앞으로도 이어질 “해리 홀레” 시리즈, 조바심나지 않게 좀 더 빠르게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보며 두서없는 이 감상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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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 클럽 3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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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인 지난 6월에 “할런 코벤”의 <용서할 수 없는>을 읽고서 할렌 코벤에 대한 낯설음은 이제 끝났고, 그의 팬이 되었다라고 감상글을 쓴 적이 있었다. 두 권 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이런 감상을 남겼던 이유는 스릴러 소설로서의 긴장감과 재미, 그리고 묵직한 생각꺼리를 던져주는 그의 스타일이 내 입맛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할런 코벤”은 나에게 작가 이름만으로 선뜻 책을 선택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작가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번에 출간된 신작 <숲(원제 The Woods/비채/2012년 10월)>을 받아들고서 작은 흥분과 함께 설렘까지 들었던 이유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대감과 설렘을 100% 충족시켜주는 멋진 소설이었다.

 

20 년 전 숲에서 여름 캠프에 참가했던 4 명의 청소년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중 2 명의 남녀는 시체로 발견되지만 2 명은 피 묻은 옷가지만 발견되었을 뿐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범인은 캠프장 상담원이었던 “웨인 스튜벤스”로 이 살인 사건 외에도 여러 건의 살인사건을 저지른 연쇄살인범이었음이 밝혀져 무기징역형에 처한다. 그러나 그는 여름 캠프장 살인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부인하고 끝내 2명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는다. 딸을 잃은 한 아버지는 토요일마다 숲에 들어가 죽은 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땅을 파헤치고, 여동생을 잃은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몰래 지켜본다. 20 년 후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앨 꼭 찾아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20 년 전 여동생을 잃고 땅을 파헤치던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인 “폴 코플랜드”은 장성해서 에식스 카운티의 검사가 되었다. 사랑했던 아내와는 사별하고 여섯 살 난 어린 딸과 살고 있는 그는 딸의 학예회에 참석했다가 낯선 형사 두 명의 방문을 받는다. 한 남자가 피살되었는데 주머니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가 나왔다며 시신을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형사들을 따라 시체공시소로 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만다. 시신은 20 년 전 살인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자 자신의 여동생 “카밀”처럼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던 “길 페레즈” 였던 것이다. 그런데 연락을 받은 페레즈의 부모는 시신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20 년 전 사진을 꺼내본 코플랜드는 페레즈 부모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의문에 빠진다. 한편 20 년 전 여름 캠프장 주인의 딸이자 당시 코플랜드와 사귀었던 “루시”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대학교 학생 과제물을 읽고 깜짝 놀라게 된다. 20 년 전 코플랜드와 자신이 숲 속에서 밀회를 나누던 장면을 그대로 그려낸, 즉 20 년 전 끔찍한 살인사건이 있던 날 밤의 일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루시는 그날 이후 만나지 못했던 코플랜드에게 연락을 하고, 둘은 그날의 사건의 진실을 캐기 시작한다. 과연 20 년 전 그 숲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20 년 만에 코플랜드와 루시에게 그날의 사건이 들춰지게 되는 것일까?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20년 전 그 사건은 조금씩 그 베일을 벗게 되고, 마침내 충격적인 반전과 함께 그날의 모든 진실이 드러난다.

 

전작인 <아들의 방>, <용서할 수 없는>에서 맛보았던 할렌 코벤 스타일, 즉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결코 눈길을 뗄 수 없는 긴장감과 스릴 넘치는 사건과 반전의 연속,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쉽게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여운을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맛볼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에 몰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20 년 전 과거에 벌어진 살인사건에 숨겨진 진실의 정체와 그리고 과연 그 진실이 어떻게 밝혀질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 북유럽 소설 열풍을 불러온 “스티그 라그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도 1부에서 수 십 년 전에 벌어진 소녀의 실종사건을 다뤄 큰 관심과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 것처럼 말이다. 20년, 그저 사건과 무관한 일반 사람들에게는 전혀 기억도 나지 않을 긴 시간이겠지만 사건의 관계자들, 특히 가족들에게는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최근에 30년이 훌쩍 지나버린 전 모 재야인사의 의문사가 다시 화제가 되는 이유도 그의 죽음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아직도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20 년 전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었던 코플랜드와 루시에게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로 계속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결코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상처가 20 년이 지난 후에 다시 생채기가 난다면 그 아픔은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다. 거기에 그간에 알려졌던 진실이 송두리째 뒤집혀 버릴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면 주인공인 두 사람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독자들 또한 궁금증이 커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비밀은 당시 사건의 살인범으로 수감 중인 “웨인 스튜벤스”나 어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주인공인 코플랜드와 루시, 20년 만에 다시 나타난 페레즈와 그의 부모, 캠프장 주인이자 루시의 아버지인 “아이라 실버스타인”, 심지어 딸이 살해된 후 보상금을 가지고 가출했던 코플랜드의 어머니와 딸의 시신을 찾아 헤매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건의 관계자 “모두”에게 숨겨진 비밀 - 물론 비밀의 경중은 서로 차이가 나지만 - 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충격적인 진실이 하나 둘씩 밝혀지면서 독자들은 경악하게 되고, 긴장의 고삐를 더욱 바짝 조일 수 밖에 없어진다. 그래서 이런 궁금증과 놀라움은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책 넘김을 더욱 숨가쁘게 만들어 버리고, 결말의 충격과 반전으로 놀란 가슴과 여운은 쉽게 진정되지 않고 자꾸 책을 펼쳐보게 만든다. 결국 전작들과 똑같은 경험을 이 책에서 다시한번 고스란히, 아니 더 충격적으로 재현된 것이다.

 

할런 코벤은 이 책에서 누구라도 궁금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과거 사건 속에 숨겨진 진실이라는 탁월한 소재 선택 능력과 함께 어느 한 구절 소홀히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만의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력으로 긴장감과 스릴 넘치는 사건과 반전을 촘촘히 배치한다. 여기에 “휴머니즘”이라고 일컬어지는 작가 특유의 메시지, 즉 “가족”의 진정한 의미와 가족애라는 미명하에 왜곡되고 감춰진 진실이라는 묵직한 생각꺼리와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까지, 자신만의 장점들을 어느 하나 빠짐없이 꼼꼼히 담아내어 이 멋진 소설을 완성해냈다. 여느 정형화된 스릴러 소설들의 스타일과 전혀 다르지만 확연히 차별화된 긴장감과 재미, 여운을 선사하는 할런 코벤만의 스타일에 이 책을 읽고 난 후 “역시 할런 코벤!”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오고, 할런 코벤에 대한 나의 기대와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면 너무 호들갑스럽고 과장된 감상일까? 먼저 읽은 독자들의 서평들 또한 호평들인 것을 보면 역시 내 감상이 과히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아뭏튼 할런 코벤, 앞으로도 이름만 들어도 즐겁고 설레이는 작가로 계속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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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 - 미천왕, 도망자 을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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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나라 대표적 대중소설 작가인 “김진명”은 발간 1 년 만에 300 만 부가 팔렸다는 초특급 베스트셀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으로 처음 만난 후 신간 소식을 들을 때마다 꼬박 꼬박 찾아 읽었을 정도로 푹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권 두 권 읽은 책들이 쌓이다 보니,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음모론과 과도한 민족주의라는 동일한 패턴의 반복에 어느새 식상함과 실망감이 함께 느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의 신간 소식이 더 이상 내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고 이제 그와 멀어진지 한참이 되었다. 즉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읽고 나면 실망스러운, 나에게 있어 “재미”와 “실망”, 두 가지 모두를 느끼게 하는 작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작년(2011년)에 출간되어 50만부 이상 팔렸으며 인터넷 서점에서 “2011년 네티즌 선정 올해의 책 선정도서”로 선정되었다는 그의 역사소설 <고구려>시리즈 도 몇 몇 지인들의 권유와 독자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출간된 지 1년이 훌쩍 넘은 후인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엉뚱한 이유에서다. 최근에 전자책(e-book)을 선물 받게 되어 가입되어 있는 전자책 도서관에서 테스트용으로 <고구려 1; 도망자 울불(2011년 3월/새움)>을 대출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저 전자책이 읽는데 어떨까 하는 테스트 목적으로 읽기 시작한 이 책, 결국 읽던 종이책을 뒤로 밀어두고 두 권을 더 대출 받아서 이틀 만에 세 권을 모두 읽었다. 다 읽은 후 소감부터 말하자면 오랜만에 만난 김진명의 소설은 역시 재미있었다.

 

미천왕 때부터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까지 여섯 왕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는 <고구려> 시리즈 중 이번에 만난 책은 고구려 제 15왕인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을 그린 1권 <도망자 울불>과 2권 <다가오는 전쟁>, 3권 <낙랑축출> 이었다. 그런데 역대 고구려왕 들 중 한 번도 소설이나 드라마로 다뤄지지 않았을 정도로 별로 주목받지 않았던 미천왕을 첫 소재로 한 이유는 뭘까? 작가는 어느 지방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빼놓고 미천왕을 처음으로 다룬 이유는 미천왕이 고구려왕 중 최고로 훌륭하기 때문이며 일반인이 모를 뿐이지, 미천왕은 중국 세력을 몰아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즉, 400 여 년 가까이 옛 조선(古朝鮮)의 영토를 지배했던 한사군(漢四郡)인 “낙랑군(樂浪郡, 313년)”,“대방군(帶方郡,314년)”을 점령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여기에 미천왕이 어릴 적 숙부(叔父)인 14대 왕 “봉상왕(烽上王, 292~300)”의 핍박을 피해 소금장수로 숨어 살다가 성인이 되어 숙부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연이 꽤나 극적(劇的,dramatic)이어서 소설로써 충분히 그려볼 만 한 점도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고대 영웅설화(英雄說話)나 무협소설(武俠小說) 등을 통해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정형화된 스토리 라인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김진명은 이런 미천왕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워낙 많은 분들이 읽었고, 서평들 또한 많이 올라와 있으니 줄거리 요약은 중언부언(重言復言)이 될 테고 개인적인 감상 몇 가지만 언급해보자.

 

이 책,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틀 만에 세 권 1,0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읽어낼 정도로 참 재미있다. 울불이 숙부 봉상왕의 살해위협을 피해 노비와 소금장수로 떠돌다가 낙랑으로 피신하고, 수많은 위험과 고초를 꿋꿋히 이겨내고 마침내 숙부를 폐위하고 제15대 왕위에 올라 10년을 준비한 끝에 낙랑군을 점령하는 과정 하나 하나가 영웅설화와 역사소설 특유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만든다. 특히 3권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와 낙랑군과의 전쟁 장면이 참 재미있는데, 그중 고구려의 중장기병(重装機兵)인 “개마무사”와 낙랑군의 장창보병(長槍步兵)으로 구성된 “장창방진(長槍方陣)”과의 최후의 전쟁 장면은 여느 역사소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장쾌한 스케일에 손에 땀을 쥐는 박진감과 스릴, 그리고 비장미까지 느껴져 이 책에서 백미이자 압권이라 부를 만하다. 이렇게 치열했던 전쟁과 처절한 희생 끝에 마침내 성을 점령하고 미천왕이 자신과 함께 했던 병사들과 전우(戰友), 그리고 선조들에게 승전을 고하는 장면에서는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처럼 이 책, 역사 소설 특유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고, 재미와 더불어 다른 나라가 아닌 바로 우리나라 역사이기에 감동적이기까지 했던 소설이었다.

 

그러나 역시 아쉬움은 남는다. 그동안 그의 한계로 지적되어 온 “과도한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이 소설에서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용납해줄 만 한 수준이다. 왜냐하면 현대사(現代史)를 배경으로 어설픈 음모론(陰謀論)과 역사 왜곡 수준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주창해온 그간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소설이 아예 민족주의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으니 민족주의를 좀 지나치게 담아냈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에서 미천왕과 일대 전쟁을 치룬 숙적인 낙랑태수 “최비(崔毖)”가 실제 역사에서는 진(晉) 나라의 평주자사(平州刺史)로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지내다가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에게 쫓겨나 고구려에 도망 와서 319년(미천왕 20년) 고구려에 귀화했다고 하니 낙랑군 점령(313년) 훨씬 후의 인물이었다는 점이나 지금의 평양(平壤)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낙랑군을 요동(遼東) 지역에 있었다고 설정 - 물론 한사군 위치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고 하니 한사군 요동 위치설이 틀렸다고는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남한 사학계 정설은 한반도 내륙설이다 - 한 점은 소설적인 허구(虛構)로써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극적인 재미와 감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오히려 너무 작위적(作爲的)인 느낌을 곳곳에서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낙랑군과 고구려 간의 전쟁에서 낙랑군이 부상병을 앞세우는 장면이나 마지막 대목에서 전쟁에서 패한 낙랑군들이 성 밖에 고조선 유민들을 세워 놓고 성으로 진격하면 유민들을 활로 쏴죽이겠다며 미천왕 군대의 입성(入城)을 막는 장면이 특히 그러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유민들이 고구려 장수 - 그것도 전장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장수가 사실은 살아있었다는 설정 - 의 설득으로 자진해서 화살 받이가 돼서 모두 몰살당하는 장면은 나름 비장미는 있지만 그동안 여러 역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통속적인 장면인데다가 극적인 효과를 너무 지나쳐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여기에 정통 역사 소설에 걸맞지 않은 무협소설적인 설정들,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 라는 표지 문구처럼 그만큼 작가가 삼국지를 의식하고 썼다는 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삼국지와 유사한 인물 설정 등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들었다.

 

아쉬운 점을 들다 보니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것처럼 쓰게 되었지만 이 책, 이런 아쉬움들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참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김진명 작가는 그동안 현대사 소재 작품들만 읽어봤었는데 - 역사소설로 <살수>라는 작품이 있다는데 읽어보지 않았다 - 역사 소설에도 꽤나 재능이 있는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작품의 완성도나 문학적인 성취를 떠나 “재미” 하나 만큼은 단연 발군인 작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올 김진명의 소설들 중 이 <고구려> 시리즈 만큼은 계속해서 찾아볼 생각이다. 당초의 기획대로 “장수왕” 편까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책과 관계 없는 사족 하나, 이 책으로 해본 전자책 테스트는 성공적이었다. 이 책 외에도 여러 책들을 테스트해봤는데, 종이책 못지 않게 몰입할 수 있었고, 수십 권을 한꺼번에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휴대의 편리성은 가히 신세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조작이 불편하고, 컨텐츠(책)가 많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많은 개선이 필요할 것 같아 아직은 종이책을 대체하기에는 요원할 것 같다. 그래도 전자책 덕분에 책읽기가 더 편리해지고 즐거워질 것 같아 벌써부터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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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1 - 쾌자 입은 포졸이 대륙에 불러일으킨 거대한 바람 쾌자풍 1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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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혁 작가는 데뷔작인 <퇴마록(1994)>부터 최근작인 <바이퍼케이션(2010)>까지 모든 작품을 읽어 본, 나에게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더불어 “유이(唯二)”한 전작주의(全作主義)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을 찾아 읽는 이유는 신화(神話), 역사, 판타지, 초능력, 스릴러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소재와 장르 소설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을 계속 읽다보니 설명문이 지나치게 많고, 이야기 전개가 늘어지는 한계 때문에 실망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어느 작품을 읽어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즉 나에게는 검증된 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을 챙겨 읽고 있다. 2년 만에 새로 나온 그의 신작 소설 <쾌자풍 1(해냄/2012년 8월)>을 선뜻 선택한 이유도 바로 “이우혁”이라는 이름 석 자가 주는 신뢰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연 그는 나의 이런 신뢰를 이번에도 지켜 줄 수 있었을까?

 

중국 명(明)나라 홍치제(弘治帝) 2년(1489년), 고위 관료들이 잇달아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황실(皇室)을 지키는 최고의 정예무인들인 금의위(錦衣衛) 소속 무사인 “남궁수”와 “엽호”는 시랑 염승필의 피살 현장에 조사를 나왔다가 사건 정황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탁견을 선보여 현장 수사를 지휘하던 제독 동창(東廠) “유온”에 의해 발탁된다. 제독 동창은 그들에게 사건의 단서를 찾아내라고 명령하면서 조선에 밀사로 파견한다.

 

한편 조선 북쪽 변방 고을인 의주(義州) 위화(威化) 마을 말단 포졸(捕卒) “지종희”는 고을 이방인 형네 집에 얹혀 살면서 압록강 너머 난전(亂廛)을 드나들며 술 꽤나 퍼마시고 뒷돈을 챙기며 <수호지(水湖志)>의 양산박(梁山泊) 108 호걸들을 본 따서 맺은 의형제들이 108명을 훌쩍 넘겨 버린 한량(閑良)이다. 하는 짓은 영 무뢰배이지만 그래도 매사 반듯하고 도리를 지키는 형의 영향 - 엄밀히는 아침마다 하는 놀이인 손바닥 쳐내기에서 자신을 날려 보내는 형이 무서워서이지만 - 을 받아서인지 적당한 수준에서만 뒷돈을 챙기고 폭력을 휘둘러도 사람 목숨을 해할 정도까지는 아닌, ‘사람으로서의 선’을 지킬 줄 아는 녀석이다. <춘추(春秋)>를 공부하라는 형의 성화를 피해 난전으로 넘어온 지종희는 국경 수비대에서 노닥거리다가 갖은 고생 끝에 조선 땅에 다다른 남궁수와 엽호를 만나게 된다. 만나자 마자 활을 싸대고 화포를 들이 밀어내는 난리법석 끝에 지종희는 남궁수와 얼렁뚱당 의형제까지 맺게 되고, 그들을 난전으로 데려간다. 난전에 들어선 그들을 사람들이 에워싸더니 칼을 들고 들어왔다며 누명을 씌우고는 단체로 폭행을 가하기 시작한다.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는 규칙에 애검(愛劍)을 지종희에게 맡기고 적수공권(赤手空拳)인 상태로 들어온 터라 둘은 변변히 무공 한 번 펼쳐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구타당하고 만다. 속사정은 바로 지종희식 의형제 길들이기였던 것이다. 조선에 입국도 하기 전에 천하에 몹쓸 놈 때문에 굴욕과 고초를 겪은 남궁수와 엽호는 고위 관료 살인범을 추적하는 조선측 동행인으로 지종희를 지목한다. 이렇게 중국 전역에 쾌자 바람(快子風)를 일으킨 지종희의 일대 모험이 시작된다.

 

책을 받아들고서는 전작들에서 선(善)과 악(惡)의 대결, 종말론(終末論), 우리 민족과 외세와의 대립 등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들을 다뤄왔던 이우혁이 이번에는 우리나라 전통 웃음 코드인 “해학(諧謔)”을 들고 나왔다니 조금은 엉뚱하다는 생각이 앞섰었다. 그런데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이우혁 작가에게 원래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해학을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여 내어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을 정도로 참 재미있었다. 특히 천하의 몹쓸 놈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주인공 지종희의 엽기 행각들이나 명문 무림세가인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종복(從僕)으로 남궁수와 엽호를 수행하는 “아칠”의 행동들은 작가가 코미디적 요소를 아예 작심하고 연출했다는 것을 여실히 느껴볼 수 있었다. 또한 설명문도 간략해졌고, 이야기도 비교적 빠르게 전개되어 앞서 언급한 그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것으로 느껴졌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영웅문(英雄門)>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대만의 무협 작가 “김용(金庸)”의 <녹정기(鹿鼎記)>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었다. 무협소설의 신(神)이라 불리는 김용과 어떻게 비교가 되냐고 김용의 열성 팬들은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지만, 김용 작가가 충의(忠義)를 강조하던 기존 작품들과 달리 천하제일 사기꾼이라는 전례없는 주인공을 등장시킨 <녹정기>로 작품 세계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은 이우혁 작가가 이 소설로 그동안의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가볍고 유쾌한 주제로 전환했다는 점과 많이 닮아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였는지 어쩌면 이 작품이 이우혁의 작가생활에서 어떤 분기점(分岐點)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시리즈 첫 권이니 너무 성급한 판단이겠지만 그래도 유쾌함과 즐거움을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우혁 작품은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한다라는 나의 기대를 다시금 충족시켜준 참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쾌자풍 시리즈, 첫 권부터 이렇게 즐겁고 유쾌하게 출발했으니 이어질 작품들에서는 또 어 떤 기상천외하고 기발한 사건들로 나를 즐겁게 해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래서 이우혁 작가는 앞으로도 계속 나에게 전작주의 작가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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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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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을 대표하는 두 장르인 “공포(恐怖) 소설”과 “추리(推理) 소설”은 분위기면에서 “무섭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지만, 무서움(恐怖)을 야기하는 주체가 주로 귀신, 악마 등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존재들인 공포소설과 달리 추리소설은 주로 “인간(人間)”이라는 면에서 서로 다르다. 추리소설이 무섭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주변에 추리소설이 무서워서 읽기가 두렵다고 말하는 분들이 몇 몇 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추리소설은 무섭다"라는 명제가 결코 그릇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구분이 정확히 맞는 것은 아니어서 몇 몇 공포 소설들은 인간이 저지르는 흉악하고 끔찍한 범죄를 주제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저런 식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추리소설은 작법(作法) 원칙상 비과학적인 초능력이나 마법,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금기(禁忌)로 하고 있으니 두 장르의 접점은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실재(實在)”가 아니라 우연이나 또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트릭에서 비롯된 오해(誤解)때문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분위기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한 공포로 전개되지만 결말에 이르러 인과관계가 명확히 밝혀지는, 즉 과학적인 해석이 가능한 추리소설로써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공포와 추리가 결합된 “호러 미스터리” 소설을 여럿 만나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巷說百物語)> 시리즈와 제목이 “~것”으로 끝나서 <것 시리즈>라고도 불리는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시리즈 전 권은 아니지만 시리즈별로 한 권 씩 - <속 항설백물어>, <산마처럼 비웃는 것> - 을 읽어봤는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공포 분위기와 절묘한 트릭과 반전이라는, 공포와 추리 두 장르적 재미를 한껏 보여주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멋진 작품들이었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도조 겐야> 시리즈의 서막을 연 첫 번째 작품인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원제 厭魅の如き憑くもの / 비채 / 2012년 9월)>이다. 책을 받아들고서 첫 느낌은 검고 붉은 색감과 그림으로 공포스러움을 부각시켰던 기존 작품들의 표지 - 그만큼 거북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 와는 다르게 하얀색 바탕에 일본 전통 의상을 입은 인형처럼 예쁜 소녀가 그려져 있는 표지 때문이지 단순(simple)하다는 느낌이었다. 대신 공포감이 좀 덜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읽고 나니 전편 못지않은 공포와 기막힌 반전으로 이 시리즈가 왜 성공했는지를 절로 알게 해 주는 멋진 작품이었다.

 

궁벽한 산골마을인 “가가구시” 촌은 그 지리적 궁벽함에 걸맞게 일본 전통의 민속 신앙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마을이다. 마귀 계통인 흑의 기운을 상징하는 “가가치”가(윗집)과 전통 신도 신앙을 숭앙하는 백의 기운을 상징하는 “가미구시”가(큰신집)이 대립하고 있는 이 마을에는 선신(善神)인 산신(山神)과 악신(惡神)인 “염매(厭魅)”- 책 뒷표지에 ⓛ가위누르는 귀신 ②짚으로 만든 인형(제웅)을 매개로 삼는 주술의 일종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병에 걸리게 하려고 귀신에게 빌거나 방술을 쓰는 행위“라고 씌여 있다 -, 두 가지를 상징하는 “허수아비”들이 마을 곳곳에 세워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거나 귀신들림을 치료하기 위해 가가치 집안의 무녀(巫女)인 “사기리”를 찾아가곤 한다. 어느날 적대 관계라 할 수 있는 가미구리 가의 젊은 마님인 “가미구시 지즈코”가 딸 “지요”기 빙의(憑依)“ 되었다며 무녀를 찾아온다. 일흔을 넘겨 체력은 감퇴했다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은 여전한 사기리는 손녀딸이자 신을 몸에 받아들이는 손녀딸 “사기리” - 이 집안의 무녀들은 모두 “사기리”라는 이름을 쓰는데, 구별하기 위해 “리” 자 옆에 점을 찍어 표시한다. 그런데 이게 일본어 발음상으로 달라지는 표기인지 아니면 단순히 구분 목적인지는 모르겠다 - 와 함께 축귀(逐鬼) 의식을 펼치는 데 손녀딸 사기리의 입에서 “저 놈은 예사 마귀가 아니다”라는 말이 터져 나온다. 간신히 의식을 끝낸 사기리는 손녀딸에게 마귀를 봉인한 물건을 전통 의식에 따라 강물에 떠내려 보내라고 이르는데, 손녀딸 사기리는 축귀가 끝나면 늘상 해오던 일이었는데도 왠지 모를 공포를 느끼면서 치를 떨게 된다.

 

괴담(怪談) 수집가인 “도조 겐야”는 이무렵 가미구시가의 초대장을 받아 마을을 방문하게 된다. 시작부터 시골 특유의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을 톡톡히 맛본 도조는 두 가문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시작하는데, 사람이 한 짓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은 괴이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평소 괴이담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버릇이 있는 도조는 마을의 이런 종교적 전통을 깨뜨리고 싶어 하는 가미구시가의 아들 “렌자부로”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그러나 괴기스런 살인 사건이 계속 이어지면서 마을에는 염매가 강림했다, 손녀딸 무녀 사기리의 죽은 쌍둥이 언니가 생령(生靈)으로 나타났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면서 마을 전체가 공포에 떨게 된다. 과연 이 연쇄살인사건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마을 전체를 떠도는 염매와 생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책은 가가치가의 손녀딸 무녀 사기리의 일기와 도조 겐야의 취재 일기, 가미구시가의 청년 렌자부로의 일기, 이렇게 세 가지 시점으로 번갈아 전개되고,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이 수수께끼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탐정 도조 겐야에 의해 베일을 벗고 마침내 그 속살을 드러낸다.

 

일본 현지에서 2006년 2월 이 작품이 출간된 이래로 지난 6년 여 동안 아홉 번째 시리즈 까지 이어졌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도조 겐야” 시리즈의 첫 출발점인 이 책은 그간 출간된 여느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처음 시작이 난감한 소설이다. 책 표지를 열면 별지 형식으로 가가구시 촌 지도와 함께 가가치가와 가미구시가, 두 가문의 가족관계도가 실려 있는데, 등장인물 수 만 해도 30 명이 넘고 마귀촌이라 불리는 가가구시 촌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각 등장인물들 간의 얽히고 설킨 사연들이 워낙 방대하고 복잡해서 읽다 보면 인물 이름을 까먹어서 몇 번을 별지를 확인하고, 앞 페이지들을 들춰 보게 만든다. 특히 우리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일본 민속학적 전통은 쉽게 적응이 안되어 책 읽는 속도를 더디게 만든다. 그런데 이 고비(?)만 잘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페이지가 넘어간다. 기괴한 살인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등골이 오싹해지고 소름이 돋는 공포 분위기에 절로 물들여져 가고, 빨라지는 호흡 속도에 맞춰 페이지 넘김 또한 절로 빨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은 페이지가 얼마 되지 않은데도 쉽사리 그 비밀이 드러나지 않자 절로 걱정이 들었다. 도대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의문거리를 어떻게 풀어낼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나의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머리를 후려치는 반전과 함께 도조 겐야의 명쾌한 추리 솜씨로 사건의 비밀을 단숨에 밝혀버리고, 짧은 후기를 남기고는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초반은 더디지만 갈수록 빨라지는, 그리고 결말에서는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휘몰아치는, 그래서 550 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결코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읽기였던 셈이다. 이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이유는 뭘까? 먼저 주인공인 도조 겐야라는 독특한 캐릭터부터 책 속 문구들을 통해 간단하게 짚어보자.

 

이 책의 탐정인 도조 겐야는 앞서 말한 대로 괴담 수집가이다. 그런데 명탐정이었던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괴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고 해석하려고 든다.

 

괴이담을 좋아하는 사람은 보통 이야기 속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멋대가리 없는 짓은 하지 않고 괴이 자체를 즐긴다. 겐야도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았지만, 가끔 괴이가 가져다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본인은 어디까지나 지적 호기심이라고 주장하지만) 추리를 하기도 한다. 게다가 괴이의 합리적 해석이 불가능함을 밝혀 거꾸로 괴이 자체를 긍정하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하니 하여간 성가시다.

 

괴이담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첫 번째 버릇과 이따금 괴이를 해석하고 싶어하는 두 번째 버릇, 그리고 꼭 합리적 해결을 본다는 보장은 없다는 세 번째 버릇(이를 버릇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는 결국 이 버릇들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터무니없이 기괴한 사건에 말려들어 심지어 위험에 처하곤 한다 - P.179

 

이렇듯 괴이를 해석하려는 버릇이 그를 사건에 말려들게 하고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가 가는 곳에는 늘 끔찍하고 기괴한 사건들이 예비 되어 있다. 물론 그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건들이 일어나는 지도 모르겠다. 살인을 몰고 다니는 명탐정 “누구”와 마찬가지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괴이를 무조건 해석하려고 드는 것만은 아니다. 괴이를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석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생각해보지 않고 괴이를 받아들이는 건 인간으로서 한심한 일이야. 그렇다고 인지를 뛰어넘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건 인간으로서 오만한 거고 - P.266

 

세상의 모든 일은 흑백을 명확히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안 돼.-P.273

 

즉 괴이를 일단 의심해보고 최대한 파헤쳐 볼 것, 그런데도 밝혀낼 수 없다면 -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라면 - 쿨하게 인정할 것 이 바로 도조 겐야의 신조인 것이다. 꽤나 독특한 신조인 셈이다. 캐릭터의 독특함은 주인공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원 수가 많아 초반에는 헷갈리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자리 잡혀가는 주변 캐릭터들 또한 하나하나가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다. 즉, 이 책이 재미있는 첫 번째 이유는 독특하고 생동감있는 캐릭터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주인공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다면 독자들은 다음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의 사건은 결국 도조 겐야가 그 비밀을 속 시원하게 밝혀낼 것이라는, 혹시 못 밝혀낸다면 도조 겐야처럼 쿨하게 인정해버리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힌트가 하나 있다. <도조 겐야> 시리즈는 앞에 “공포”라는 말이 붙기는 했지만 엄연히 “추리소설”인 만큼 반드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말로 끝맺을 것이란 것을.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이 힌트를 깜빡깜빡하게 된다. 구전 동요나 전설에 맞춰 연이어 일어나는 괴이한 살인사건, 그리고 명탐정(도조 겐야)의 등장과 함께 아무리 불가능한 사건이라도 결국 해결된다는 어쩌면 지극히 뻔한 도식(圖式)을 따르고 있음에도 식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책 속 사건들의 기괴함과 공포가 그런 힌트를 깜빡깜빡 잊게 만든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작가는 공포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우선 도입부에서 지루하기까지 한 지역 전설과 유래, 인물들 간의 얼키고 설킨 관계 등 공포 분위기 조성용 소품들을 꼼꼼하게 배치한다. 이런 소품들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하나 둘 씩 서로 촘촘하게 맞물리게 되는데, 이런 결합이 서로에게 상승 작용을 일으켜 공포 효과를 더욱 고조시키고,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 나간다. 처음에는 그저 배경 설명이겠거니 하고 지나치기 쉬운 소품들이 결말에 이르러 부속품처럼 맞물려 전체의 그림이 완성되면서 비로소 작가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일종의 단서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결말에서 설명을 지루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오히려 결말을 알고 나면 허망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쾌하게 결말짓는다. 물론 독자들도 탐정처럼 단숨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힐 수 는 없지만 이번 작품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좀 시시할 수 있었겠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결말을 맺는다. 결말을 듣고 나면 절로 납득이 가는 그런 깔끔한 결말로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이 재미있는 두 번째 이유는 결말까지 읽을수록 점점 빠져들게 되는 공포 분위기와 명쾌한 결말을 꼽고 싶다.

 

감상글이 “참 재미있다”라고 한 문장만 쓰면 될 것을 글이 참 두서없이 지루하게 길어졌다. 아뭏튼 이 책, <산마처럼 비웃는 것> 감상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나에게는 공포소설과 추리소설의 장점만을 극대화시킨 최고급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었다. 너무 더워서 일부러 공포소설을 찾아 읽기까지 한 여름에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가을에 만나다 보니 살갗에 닿는 바람이 차갑다 못해 으스스하게까지 느껴지니 계절을 잘못 만난 셈이 되었다. 부디 다음 <도조 겐야> 시리즈는 여름에 만나보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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