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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3대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투르게네프(1818~1883)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오룔 주에서 5000명의 농도를 거느린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귀족 자녀답게 훌륭한 교육을 받은 투르게네프는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거쳐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프랑스, 영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는 베를린에서 러시아의 이상주의자들을 만났고 서구문명을 접하면서 '계몽과 교육과 이성의 힘을 신봉하는 서구주의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p.444 작품해설)
무엇보다 투르게네프하면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 폴리나 비아르도와의 그 유명한 사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를 만난 날을 '성스러운 날'이라고 부를 정도로 투르게네프의 폴리나를 향한 사랑은 사랑을 뛰어넘는 숭배에 가까웠다. 폴리나의 남편, 루이 비아르도와도 친구로 지내면서 세 사람은 국경을 넘어 서로의 집을 넘나들며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폴리나와 남편은 네 명의 자녀를 낳아 끝까지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고, 투르게네프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두 부부와 우정과 사랑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폴리나를 향한 투르게네프의 사랑은 절대적이었고 평생을 그녀 곁에서 맴돌다가 전 재산을 그녀에게 물려주고(!)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였다니 정말 대단한 사랑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첫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의 가수' 투르게네프의 소설 세 편, <첫사랑>, <귀족의 보금자리>, <무무>를 담고 있다.
<첫사랑>은 1860년 발표, 투르게네프 자신이 '창작이 아니라 나의 과거'라고 말했을 정도로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경험한 사랑의 환희와 고통을 1인칭 화자가 고백하는 형식으로,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열여섯 살 소년의 심리를 서정적인 문체로 그리고 있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몹시도 유쾌하고 자랑스러운 기분이었다. 얼굴에 지나이다가 한 키스의 감촉을 생생하게 느끼며, 환희의 전율 속에서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뜻하지 않은 행복을 너무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기에 심지어 두려워지기까지 했고, 이 새로운 느낌의 원인 제공자인 그녀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운명에게 더 이상 바랄 게 아무것도 없는 듯 싶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숨이나 실컷 쉬고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p.73)]
사랑의 기쁨과 신비, 알 수 없는 두려움까지 담고 있는 이 문장은 주인공이 앓고 있는 사랑의 열병이 얼마나 깊으며, 사랑의 위력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세월이 흘러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 중에서 과연 무엇이 실현되었는가? 그리고 벌써 내 인생에 황혼의 그림자가 밀려오기 시작하는 지금,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봄날 아침의 뇌우에 대한 추억보다 더 신선하고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p.121)]
화자는 한때 자신을 잠 못 이루게 하고 '온갖 흥분과 고통으로 얼룩진' 그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한다. 아름다움보다는 그 미숙함과 아픔으로 인해 떠올리기 싫은 첫사랑, 투르게네프는 우리 모두에게 그 부끄럽고 떠올리기 싫은 첫사랑을 생각해 보라고 이 소설을 통해 말을 하는 것 같다.
1859년 발표한 <귀족의 보금자리>는 272페이지의 장편소설이다. '애국주의자이자 슬라브주의적 이상주의자인 라브레츠키의 사랑과 좌절을 통해 1840년대 귀족 출신의 슬라브주의적 이상주의자들의 사회, 역사적 활동과 그 의미'(p.452 작품해설) 를 묻는 작품으로 역시 사랑 이야기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결혼해서 파리에 살던 라브레츠키는 믿었던 아내의 외도에 충격을 받고 혼자 러시아로 돌아온다.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사촌 집을 방문, 사촌의 딸 리자에게 관심을 갖게되고 조금씩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프랑스 신문에서 아내의 사망 기사를 읽게 되고, 자유를 느낀 라브레츠키는 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근데 다음 날, 죽은 줄 알았던 아내가 딸을 데리고 나타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절망적으로 바뀐다.
<귀족의 보금자리>에는 인물들 간의 대화가 많이 나온다. 다양한 대화를 통해 인물들의 심리와 사상, 관점 등이 드러나 당시 러시아 사회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 등을 보여준다.
특히 무조건 서구를 숭배하고 러시아적인 것을 무시하는 서구주의자들을 풍자하면서 그들의 경박함과 속물성을 비판한다. 또한 라브레츠키와 리자의 사랑을 통해 당시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러시아 사회 속에서 개인의 행복과 사회 윤리,도덕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무무>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짧은 작품이지만 읽고 나서 가장 진한 여운이 남는 그런 소설이다.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농노인 게라심과 그가 키우는 강아지 '무무'의 슬프면서도 감동적인 사랑을 담고 있는 이 소설에는 변덕스럽고 자기만 아는 못된 여지주가 나오는데, 투르게네프는 실제로 농노들을 가혹하게 대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이야기 또한 실제로 어머니 영지에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당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농도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 알 수 있다.
<무무>는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농노제도를 비판하고,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투르게네프의 연민과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투르게네프의 또 다른 작품 '<사냥꾼의 수기>와 함께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 제도의 폐지(1861)를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p.464 작품해설)
오늘 길거리에서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다 '무무'처럼 보여서 혼자 피식 웃었는데, 그만큼 읽고 난 후의 그 여운이 오래가는 소설이다.
<첫사랑>이 유명하지만 나는 <무무>가 가장 좋았다.
게라심과 무무의 슬픈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