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 권지예 소설
권지예 지음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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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하는 전시회에 갔다가 관람을 마치고 퍼즐 한 상자를 사가지고 왔다. 퍼즐 그림은 우리가 관람한 작품들 중 하나로 베드로 성당의 내부를 큼지막하게 그린 작품으로 성당내부의 기둥과 장식, 뛰엄뛰엄 점처럼 흩어진 사람들까지 퍼즐맞추기 그림으로는 상당한 난이도를 요하는그림임에 틀림없었다. 퍼즐맞추기의 욕망에 빠진 두남자(남편과 아들)의 소청을 묵과할 수 없어 용기내어 거금을 쓰기로 한 것이다. 집에 가져온 그 날 저녁부터 시작된 퍼즐놀이는 근 일주일이 걸려서야 마지막 화룡점정의 통쾌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사실 1000피스짜리 퍼즐맞추기는 무한한 인내를 요하는 과정이었다. 색상이 거의 동일해 어느 것이 어느자리인지 헷갈리는 부분에는 포기의 유혹이 샘물같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온 가족이 퇴근후의 졸음과 맞서서 퍼즐완성에 몰입하였다. 난제로 치부되었던 부분을 기어코 해결하고서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의기양양 뽐내기도하였고 하루종일 씨름해도 풀지 못한 부위를 딸아이가 현관문을 들어서자 마자 덤벼들어 마치 신들린 듯 퍼즐조각을 맞추는 걸 보고 씁쓸해지기도 하였다. 심신이 제일 바쁜 아들아이도 다른 가족이 쩔쩔매는 부분이 있으면 가만히 들여보다 한두개 도와주고 저 방으로 들어가곤했다.

 

자, 이것이 1000피스짜리 퍼즐과 관련한 나의 기억이다. 그런데 퍼즐이란 아이텀을 두고 신기한 소설하나를 써내려간 작가의 글을 대하고 보니 어떤 대상이 부여하는 놀라운 다중적 이미지와 메시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어찌되었건 퍼즐이란 끝까지 맞춰지도록 운명지어진 대상임에 분명하고, 우리집에 다 맞춰진 천피스 퍼즐이 흐트러지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장농위에 고이 모셔둬진 것처럼 퍼즐에서 완성되지 못했을 때의 불안정감은 퍼즐 자체의 것이라기보다 퍼즐을 맞추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게 아니겠는가.

 

작가는 한 조각 남은 마지막 피스를 분실하고 현실에서는 도저히 끝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주인공이 마침내 자신을 한조각의 퍼즐로 사용하는 상황을 연출해낸다. <다빈치코드>에서 소피에게 메시지를 나신의 온몸으로 전하고자 했던 소니에르할아버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주인공은 딸아이를 가진 남자와 재혼해 사는 주부이다. 그녀는 이미 딸이 하나 있다는 이유로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주기 원하는 시어머니에 의해 세번의 유산경험을 가진 여성이다. 자신의 아이를 타의에 의해 사라지게 한 여주인공의 정신은 그야말로 피폐의 극한에 달해 있다. 지체장애자인 파출부의 아들은 현실에서 그녀가 버릴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대체표상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숨바꼭질하면서 자신이 우물속에 들어간 것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도록 당부한다. 낡은 우물 뚜껑을 열고 그와 그녀가 "고개를 쳐박고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았을 때" 이미 그녀의 운명은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우물뚜껑이 무겁게 닫히고 그녀의 파리한 숨소리가 잦아졌을 무렵 그제야 마지막 퍼즐 한조각의 장렬한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비단 이 작품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번 단편집에 실린 몇개의 단편들의 제목을 보고 처음엔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제목에서 보이는 패러디기술은 비틀기의 전형처럼 느껴졌다. 바람의 딸, 나비야 청산가자, 오영실, 딥 블루 씨를 작가는 바람의 말, 네비야 청산가자, 여주인공 오영실, 딥 블루 블랙으로 고쳤다. 꽃진 자리 역시 어딘가에서 수월찮게 들어 온 말이고 어느 시인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가 왜 이리도 제목에서 패러디를 부렸는지는 이 제목의 원전들에 대한 자신만의 감수성이 베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동시에 이미 익히 들어온 제목의 어휘들은 소설에 다가가는 독자와 거리를 줄이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퍼즐의 여주인공이 죽음, 자살로 이야기를 마감하듯이 이 책에 담긴 소설의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 베드의 남자도 진짜 사랑에 허우적거리는 우울증이 있었고 네비야 청산가자의 화자의 아버지역시 통일되면 택시몰고 갈 북쪽 고향이 사무쳤을 멍에가 있었다. 남자 등장인물도 자살을 택하지만 여자 인물들의 죽음은 더 섬뜩한 데가 있다. 반면 현실의 버거움으로 목숨을 버리는 인물들이 왜 꼭,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내겐 설득력이 부족하다. 더 자세한 심리적 복선을 강조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인훈의 광장에서 맛보던 막다른 길같은 도구는 아닐지라도 좀더 갑갑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설정이 아쉬운 건 사실이다. 딥 블루 블랙의 여주인공 작가에게는 불륜의 대상과 맺어질 수 없는 현실이 시모의 책망어린 시선과 남편의 부도라는 가정내의 불우함보다 더 큰 장애로 다가온다. 
 

감히 불륜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소설들에 등장하는 남녀주인공들이 벌이는 연애와 애정행각은 정상적으로 언급된다. 주인공들은 폴리가미의 세상으로 박차고 나간 방탕아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용기있게 벌인 불륜을 끝까지 책임질 정도로 사랑에 신념을 거는 사람들도 아니다. 단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불륜으로 해소해보지만 불륜의 성공은 또다른 정체라는 두려움을 불러올 뿐이다. 주인공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상의 단조로움에 대한 두려움이고 나아가서 인간존재의 종국에 대한 두려움이다. 결국 이 공포는 죽음으로써 해소될 뿐인 것이다. 연내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전직대통령이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말했다는데 많은 이들이 그 말을 더듬어 보았을 것같다. 그의 죽음에 결코 정당함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의 위치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데 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산 자는 그 어떤 수식어도 달 자격이 없다. 인간 존재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과정에 의해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닌가. 작가라는 특별한 상상력의 귀재에게 있어 죽음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최고의 난제일 것이다. 파묵역시 그의 <새로운 인생>에서 그토록 많은 버스 사고를 묘사하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기 위해 주인공들을 험난한 여행으로 몰고가지 않았나.

 

이 소설집은 한권의 장송곡집과 같다. 작가역시 일련의 납량특집극으로 여겨 달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불륜이란 소재가 핵을 이루고 그것에 갈등하는 무기력한 주인공들이 안쓰럽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이란 일상은 결코 회피할 수 없음을 상기하게 된다. 주인공들은 체념하면서 동시에 그 불꽃으로 몸을 던져버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 평범하지 않다. 이야기들은 작가의 착착 감겨드는 문체와 적절하다못해 속을 들켜버린 것같이 공감대를 부르는 비유들과 제대로 다져진 복선의 형식들에 의해 잘 받쳐진다. 작가는 인간심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자만이 부릴 수 있는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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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 - The Pursuit of Happy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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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am a major weeper.

얼마전 보았던 로맨틱홀리데이에서 알아들은 몇개안되는 대사중 하나, 주드로가 캐머론 디아즈에게 한던 말.

근데 이 영화보면서 내가 바로 메이저 위퍼가 되어버렸다.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행복한 장면보여주기를 거부한다.

 

하는 일 마다 되는 게 없는 재수꽝아저씨의 좌충우돌 좌절기이다.

골밀도스캐너에 전재산을 투자해 외판원이 된 윌 스미스, 그는 어린 아들과 아내를 둔 가장이지만 골밀도스캐너가 대박나리란 기대가 무참히 짓밟히면서 아내는 야간타임의 허드렛일까지 맡아야하는 지경이 된다. 한개를 팔아야 적어도 한달을 버틸 돈이 나오는데

이게 한개도 안팔릴 때가 있다는 게 문제다. 번번히 거리의 히피족에게 자신의 스캐너를 도난당하고 어렵게 찾아내고를 반복하며 증권중개인이 되기위한 인턴쉽의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답답한 생활에 진력이 난 아내는 급기야 집을 나가고 뉴욕으로 일을 찾아 떠난다. 28세가 되어서야 아버지를 만난 그는 자신의 아들만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기에 아들을 자기가 맡는다.

살던 아파트에서 밀려나고 모텔로 옮기지만 그마저 쫓겨나는 신세가 된 그, 노숙자를 위한 쉼터에 자리를 얻지 못하면 거리의 천사가 될 수 밖에 없다. 지하철의 벤치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부자는 스캐너를 타임머신으로 하여 공룡시대로 돌아가고 공룡을 피하기 위해 동굴(화장실)로 피신한다. 손닦는 페이퍼타올을 깔고 화장실바닥에 누운 두 부자... 바깥에서 문을 열려고 쿵광거리는 소리가 나자 그는 발로 문이 열리지 않게 꽉 밀고 있었다......

 

모텔을 나서며 아들이 하는 말

아빠, 이런 이야기가 있어.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그때 보트 한대가 지나갔어.

보트에 탄 사람이 "Do you need a help?"라고 말했지.

그런데 그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아니오, 하느님이 날 구해줄거요."라고 했어. 그러다 또 보트 한대가 지나갔어.

역시 보트에 탄 사람이 건져줄까요?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이 사람 또 똑같은 말을 했지.

마침내 이 사람은 죽어서 하늘나라로 갔어.

하늘에가서 물어보았지. 왜 저를 구해주지 않으셨나요?

그래 하느님이 무슨 말을 했을까?

내가 두번이나 보트를 보냈는데 네가 거절하지 않았느냐라고 했대.

 

하는 일 마다 꽝꽝이어서 보는 내내 갑갑함을 참을 길 없었다.

안타까움은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해소되었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자만이 진정한 성공의 의미, 행복의 의미를 알 것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pursuit는 행복을 찾는 주인공의 무수한 좌절과 노력을 담은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동전에 나온 제퍼슨이 기조한 미국헌법에 나오는 행복추구권과도 관련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만 이런 시련을 겪어야하나하고 주인공은 생각하지만 그는 결코 행복으로 가는 열차를 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상에 내 한몸 담을 자그마한 방 한칸이 있음에 오늘도 행복해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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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깃발 - Flags of Our Fa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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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서 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무심코 나온 말 " 이아저씨 또 상받겠네... 상복도 많네..."

클린트 이스트우드, 작곡까지 했다, 감독과 제작도 모자라서.

황야의 무법자나 아우트 로같은 영화에서 볼땐 이 사람 길게 갈까 할 정도로 기대 많이 안한 사람인데 나이들어

깊은 잔잔한 영화로 성공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보면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영화일 수 있을 테지만 우리가 볼 떄는 미국인들이 제발 알아야 할 내용같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어서 더욱 실감이 나지만 인간세상에는 저처럼 왜곡된 현실을 진실인 양 믿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실뒤에 감춰진 진짜 현실을 찾을 수 있는 눈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 내러에이션처럼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세상에는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기금마련을 위한 채권수매를 홍보하는 전령사 말하자면 '도구'가 되어야 했던 세 영웅 그들도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언론은 대중을 조작하고 대중은 언론에 잘 길들여진 양들처럼 전쟁이 끝나고 깨끗하게 그들을 잊어준다.

세 명의 조작(?)영웅들 중에서 과연 나라면 그 세명들 중 어떤 유형에 속할까?

레니, 닥, 아이라... 닥처럼만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리라... 그런데 닥의 방식조차도 온건한 순응주의라는 생각이 머리를 친다.

나같으면 아이라처럼 괴로워하고 현실의 비현실성에 대해 구토를 거듭했을 것같다. 물론 비참한 말로로 삶을 저버리지는 않을테지만...... 인디언이라는 출신성분은 미국인들에게 자연성이 남아있는 어떤 보루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나보다.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객사하고 마는 그는 패배적 인물처럼보이게 만들었는데 더 철저하고 처절한 반성위에 만들어진 영화라면 아마도 주인공은 아이라같은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이 지점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현실과의 타협점이다. 그는 아이라보다는 존 닥 브래들리라는 인물로 대중에게 접근한다. 파격보다는 제너럴한 시각을 우선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레니같은 인물도 악한 인물은 아니다. 기회주의적 성향은 타고 났다할지라도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법한 그런 기회주의이기도하다. 그 역시 전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힘없는 한 사람의 병사인 것이다.

 

현실은 본디 모습의 현실을 많은 부분 왜곡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어떨때는 언론에 의해 어떨때는 정치적 의도에 의해 현실은 많이도 굴절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만을 진실이고 현실이라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점만이라도 관객이 알게 된다하더라도 영화는 성공한 것이다.

 

아카데미상후보에 이 영화가 아니라 같은 감독의 이오지마에서온 편지가 후보에 올랐다고한다.

무척 시각이 궁금해지는 영화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본 같은 전쟁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

아마도 미국인들은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약간의 치욕을 느낄지 모른다. 반면 이오지마에서의 편지에서는 현재 그 관계과 거의 밀월에 이르고 있는 미일관계라는 측면에서 내 입장이 아닌 적의 입장에서의 지난 전쟁의 회고라는 주제가 그다지 밉지 않았을터이다.

일본의 이차대전역사가 아직도 우리에겐 상처로 남아있기에 일본시각의 전쟁영화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설지 모르겠다.

그러기에 개봉일도 정해져있지 않다.

이건 아마 일본이 제작한 일본영화보다도 더 껄끄러운 소재일터이다. 그래도 용기있는 결정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일본은 위안부라는 형식으로 자국군대의 성생활까지 조직적 관리를 했다는 측면에서 지독한 아니 상식으로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국민성을 가진 나라이다. 한국과 동남아, 호주 뿐 아니라 심지어는 네덜란드여성 100명도 위안부로 몰았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 알았다. 전시상황에서 이런 측면까지 철저히 계획하고 관리하고자한 그들의 정신상태가 기이하게 생각된다. 전체 국민이 아니라 천황을 받들고 제국주의에 눈이 멀었던 권력계층의 지도이고 공모였다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너무나 컸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제국주의의 망동을 걱정한 일부지식인계층만이 외로운 일본인이었는지 모른다. 과연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을까...

 

파티석상에서 세명의 전쟁영웅에게 주어지는 깃발사진모형의 아이스크림케잌,

요리사는 초콜렛크림을 원하는지 딸기시럽을 원하는지 묻는다. 케익위에 빨갛게 퍼지는 딸기시럽은 마치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피색처럼 닥에게 다가온다. 전쟁의 잔혹성과 무의미함,, 현실의 불합리성,, 역사의 조류에 희생되는 힘없는 인간들,, 세상은 한 인간의 운명을 너무나 쉽게 쥐고 흔들어버린다.

이런 경우는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손쉽게 찾을 수 있고 문학은 그 소재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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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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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영화 파이트클럽을 감독했던 사람이라는 정보는 유용했다.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과 그의 또다른 분신 브래드피트의 연기를 통해 거칠고 어두운 이미지 이면에 희한할 정도의 나름 신선한 메시지가 넘실거렸다고 기억된다. 이 영화 역시 그의 독특한 연출기법이 녹아 있다. 예컨대 번개를 일곱번이나 맞았다는 할아버지의 경우나 오페라 아리아를 불러대던 하얀머리의 할머니 등은 코믹함과 동시에 선득한 기운을 함께 느끼게 했으며 예인선의 캡틴이란 캐릭터 역시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고픈 욕망과 개같은 인생에 대한 욕설을 품에 지니고 살지만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자신만의 인생철학의 한마디를 남길 줄 아니 막가파식 문신아티스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듯 등장하는 주변인물들마저 귀여운 이 영화의 소재는 정말 쇼킹하다. 스콧 핏제랄드의 단편을 이리도 긴 인생역정의 스토리로 엮어낸 각본가의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낼 지경이다. 정작 단편에선 아버지가 직접 아이를 키우고 예일대에 까지 보내지만 접수계에서 퇴짜를 맞자 자신은 아까운 인재하나 놓친 줄 알라며 예일대건물을 박차고 나온다. 영화의 여주인공 데이지가 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이름에서 따왔던 것도 원작에 비중이 없는 러브스토리를 키우고 싶었던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원작에는 소셜 파티에 등장한 버튼이 연장자를 더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힐데가드와 만나면서 둘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벤자민은 데이지에 의해 마지막 돌봄을 겪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책에서는 자신의 아들이 낳은 아이, 즉 손자의 유모에 의해 손자와 함께 돌봐지게 된다. 책은 연대적으로도 훨씬 이전이지만 영화에서는 볼티모어를 뉴올리언즈로 바꾸면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출몰시기를 현재로 지정했다. 그리하여 거꾸로 가는 시계를 허리케인의 홍수에 떠내려가게함으로써 벤자민의 거꾸로 가는 인생이야기도 정리되는 것으로 처리된다.

 

개인적으로 브래드 피트의 분장은 그럴 듯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노인분장이 전체 비율적으로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다. 이는 양로원에 맡겨진 벤자민을 노인들과 융화되게 하기위한 생각에서 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노인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비참한 노인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마지막 시기를 거두어줄 공간을 찾아드는 당당한 노인들을 보여줌으로써 비천하지 않는 그러나 약간은 외로움을 어쩔 수 없는 노년을 보여준다. 죽음앞에서 누구나 같은 입장인 인생의 덧없음도 물씬 느낄 수 있다.

 

주제야 말로 그저 큐어리어스한 한 케이스이다. 아니 한 케이스일 뿐이다. 몇세기가 지난 뒤에 유전자 조작이 일상화되는 시기가 온다면 실수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을 한 케이스이다. 그러나 공상과학영화라기보다는 이 영화는 달콤한 코믹 로맨스이지 않은가. 이 영화의 각본은 깊이 있는 인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원작에서도 그런 성격은 없는 듯하다. 무미건조한 한 이야기, 그러나 아주 신기한 한 이야기를 스크린 플레이하면서 아기자기하고 배짱좋고 너스레떠는 이야기로 만든 역량이 돋보인다. 휴머니즘적이지 않다고 해서 기발함에 저평가할 이유가 없다. 그만큼 각본에 점수를 더욱 주게된다.

 

틸다 스윈턴이 노령에 해협을 완영하는 장면은 애교스럽기 그지없고 그녀의 집중력있는 연기도 주목을 끈다. 케이트 블랑셋의 데이지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진정 맡고 있다고 할 것이다. 기존용재가 이렇게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바로크가 재현한 것과도 유사한 기법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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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미치다 - 현대한국의 주거사회학
전상인 지음 / 이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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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들의 바로 옆에 있어서 너무나 익숙하지만 한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것. 아니 부동산시장에선 가격의 기준이 된지 이미 오래고 부동산 시장의 가장 매력있는 투자처가 된 아파트. 그러나 좀더 깊이 있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바로 아파트다. 이제는 어디사니?가 아니라 어느 아파트에 사니?로 상대방의 주거에 관한 질문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미 아파트는 보통사람들의 거처로서 상징적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목이 대단히 선동적이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아파트에 미쳐있다는 이야기다. 영어의 어딕션이 어디에 빠져서 못헤어나는 의미라면 아파트 어딕션이란 말도 가능할 것같다. 아파트 중독...... 나역시 결혼후 소형아파트에서 시작하여 우려 여덟, 아홉번을 아파트 평수와 경쟁하며 이사한 끝에 이제 소위 빌라라고 하는 연립주택에 도달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아니, 서양개념의 아파트 의미로 보면 우리나라의 빌라라는 것도 아파트에 다름없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아파트 거주자인 셈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이자 사회학자인 저자는 이 아파트라는 물건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 사회학적 의미를 파헤치고 있다. 사실 이 책의 제목만을 보았을 때 아파트가 미치는 도시환경의 추한 모습에 대한 비판적 글이려니 하고 상상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보다 건축학적인 시선이 강조되어야하는 테마일 것이다. 그에 비해 이 책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해서 아파트라는 주거환경과 처음 접했고 어떤 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아파트라는 건물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사적으로 검토한 후에 아파트라는 한 대상의 사회적 속성들을 분석고찰해나간다. 거기에는 이데올로기와 미시적 규모의 정치적 의미도 포함된다.

 

홍콩에 갔더니 구룡반도의 좁은 길에는 현대건설이 지었다는 초고층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좁은 땅에 최대의 주거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스카이 스크래퍼의 초고층 아파트들이 필요하리라. 홍콩에는 화장장도 도심한가운데 있다고 하지 않던가. 어떤 건축가는 서울이란 도시는 공간효율성이란 면에서 좀더 높아져도 된다는 말을 한다고도 한다. 강남과 여의도에 이어 용산을 뒤덮어가는 초고층 력셔리 아파트들을 보며 걱정도 되었는데 아직은 더 높아져도 된단 이야기인가.

 

지방의 왠만한 도시에도 15층짜리 이상의 아파트들이 늘어간다.  80년대에 기차나 버스를 타고 경부선을 오가며 간혹 볼 수 있었던 지방 도시의 아파트들이었건만 이제 수도권의 비교적 덜 개발된 지역에도 빈틈없이 아파트가 들어섰다. 한국에 아파트가 뒤덮인 이유로 책은 기본적으로 알려진 것들 외에 공급과 수요라는 두 측면에서 접근했다.가장효율적인 주택공급방식으로 아파트를 택한 정책이 그 한 원인이고 한편 수요의 차원에선 난방과 방범및 부대시설이라는 차원에서 무시못할 편의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경제개발정책과 발전한 국내 건설기업체들의 기술성장이란 배경도 중요한 한몫을 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저자는 이슈에 대한 논쟁적 서술이리라는 기대와 달리 많은 부분 분석적 접근에 책을 할당한다. 브랜드 아파트의 등장과 더불어 조장된 신분차별적 의미, 부의 원천으로서의 투자가치로서의 의미, 개폐식 삶으로 일원화된 주거모습이란 의미, 아파트내에서의 새로운 사회공동체 현상, 구조에서의 한국적 아파트의 등장등 다양한 접근방법으로 아파트를 해체한다. 마지막 장에서 한국의 건축문화와 관련하여 단독주택 멸종위기, 작금과 미래의 아파트 전성시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보여주지만 독자의 기대에는 크게 부족하다. 저자는 강릉의 선교장, 해남의 녹우당, 담양의 소쇄원과 같은 귀중한 문화유산이 100년, 200년 뒤에 후손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인가 걱정한다. 그는 이 시대를 대표할 주택문화의 상징물이 남을 수 없으리라 예감했다. 물론 타워 팰리스가 100년뒤 흉물스런 모습으로 전해지진 않을지 모르겠다. 80년 뒤쯤에는 완벽한 폭파기술을 이용해 말끔히 청소하고 그 자리에 다시 또다른 스카이 스크래퍼를 쌓아 올릴 것이다. 아, 갑갑한 마음을 달래줄 진정한 건축가의 시선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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