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퍼즐 - 권지예 소설
권지예 지음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올 봄에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하는 전시회에 갔다가 관람을 마치고 퍼즐 한 상자를 사가지고 왔다. 퍼즐 그림은 우리가 관람한 작품들 중 하나로 베드로 성당의 내부를 큼지막하게 그린 작품으로 성당내부의 기둥과 장식, 뛰엄뛰엄 점처럼 흩어진 사람들까지 퍼즐맞추기 그림으로는 상당한 난이도를 요하는그림임에 틀림없었다. 퍼즐맞추기의 욕망에 빠진 두남자(남편과 아들)의 소청을 묵과할 수 없어 용기내어 거금을 쓰기로 한 것이다. 집에 가져온 그 날 저녁부터 시작된 퍼즐놀이는 근 일주일이 걸려서야 마지막 화룡점정의 통쾌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사실 1000피스짜리 퍼즐맞추기는 무한한 인내를 요하는 과정이었다. 색상이 거의 동일해 어느 것이 어느자리인지 헷갈리는 부분에는 포기의 유혹이 샘물같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온 가족이 퇴근후의 졸음과 맞서서 퍼즐완성에 몰입하였다. 난제로 치부되었던 부분을 기어코 해결하고서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의기양양 뽐내기도하였고 하루종일 씨름해도 풀지 못한 부위를 딸아이가 현관문을 들어서자 마자 덤벼들어 마치 신들린 듯 퍼즐조각을 맞추는 걸 보고 씁쓸해지기도 하였다. 심신이 제일 바쁜 아들아이도 다른 가족이 쩔쩔매는 부분이 있으면 가만히 들여보다 한두개 도와주고 저 방으로 들어가곤했다.
자, 이것이 1000피스짜리 퍼즐과 관련한 나의 기억이다. 그런데 퍼즐이란 아이텀을 두고 신기한 소설하나를 써내려간 작가의 글을 대하고 보니 어떤 대상이 부여하는 놀라운 다중적 이미지와 메시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어찌되었건 퍼즐이란 끝까지 맞춰지도록 운명지어진 대상임에 분명하고, 우리집에 다 맞춰진 천피스 퍼즐이 흐트러지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장농위에 고이 모셔둬진 것처럼 퍼즐에서 완성되지 못했을 때의 불안정감은 퍼즐 자체의 것이라기보다 퍼즐을 맞추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게 아니겠는가.
작가는 한 조각 남은 마지막 피스를 분실하고 현실에서는 도저히 끝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주인공이 마침내 자신을 한조각의 퍼즐로 사용하는 상황을 연출해낸다. <다빈치코드>에서 소피에게 메시지를 나신의 온몸으로 전하고자 했던 소니에르할아버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주인공은 딸아이를 가진 남자와 재혼해 사는 주부이다. 그녀는 이미 딸이 하나 있다는 이유로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주기 원하는 시어머니에 의해 세번의 유산경험을 가진 여성이다. 자신의 아이를 타의에 의해 사라지게 한 여주인공의 정신은 그야말로 피폐의 극한에 달해 있다. 지체장애자인 파출부의 아들은 현실에서 그녀가 버릴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대체표상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숨바꼭질하면서 자신이 우물속에 들어간 것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도록 당부한다. 낡은 우물 뚜껑을 열고 그와 그녀가 "고개를 쳐박고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았을 때" 이미 그녀의 운명은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우물뚜껑이 무겁게 닫히고 그녀의 파리한 숨소리가 잦아졌을 무렵 그제야 마지막 퍼즐 한조각의 장렬한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비단 이 작품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번 단편집에 실린 몇개의 단편들의 제목을 보고 처음엔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제목에서 보이는 패러디기술은 비틀기의 전형처럼 느껴졌다. 바람의 딸, 나비야 청산가자, 오영실, 딥 블루 씨를 작가는 바람의 말, 네비야 청산가자, 여주인공 오영실, 딥 블루 블랙으로 고쳤다. 꽃진 자리 역시 어딘가에서 수월찮게 들어 온 말이고 어느 시인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가 왜 이리도 제목에서 패러디를 부렸는지는 이 제목의 원전들에 대한 자신만의 감수성이 베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동시에 이미 익히 들어온 제목의 어휘들은 소설에 다가가는 독자와 거리를 줄이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퍼즐의 여주인공이 죽음, 자살로 이야기를 마감하듯이 이 책에 담긴 소설의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 베드의 남자도 진짜 사랑에 허우적거리는 우울증이 있었고 네비야 청산가자의 화자의 아버지역시 통일되면 택시몰고 갈 북쪽 고향이 사무쳤을 멍에가 있었다. 남자 등장인물도 자살을 택하지만 여자 인물들의 죽음은 더 섬뜩한 데가 있다. 반면 현실의 버거움으로 목숨을 버리는 인물들이 왜 꼭,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내겐 설득력이 부족하다. 더 자세한 심리적 복선을 강조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인훈의 광장에서 맛보던 막다른 길같은 도구는 아닐지라도 좀더 갑갑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설정이 아쉬운 건 사실이다. 딥 블루 블랙의 여주인공 작가에게는 불륜의 대상과 맺어질 수 없는 현실이 시모의 책망어린 시선과 남편의 부도라는 가정내의 불우함보다 더 큰 장애로 다가온다.
감히 불륜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소설들에 등장하는 남녀주인공들이 벌이는 연애와 애정행각은 정상적으로 언급된다. 주인공들은 폴리가미의 세상으로 박차고 나간 방탕아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용기있게 벌인 불륜을 끝까지 책임질 정도로 사랑에 신념을 거는 사람들도 아니다. 단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불륜으로 해소해보지만 불륜의 성공은 또다른 정체라는 두려움을 불러올 뿐이다. 주인공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상의 단조로움에 대한 두려움이고 나아가서 인간존재의 종국에 대한 두려움이다. 결국 이 공포는 죽음으로써 해소될 뿐인 것이다. 연내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전직대통령이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말했다는데 많은 이들이 그 말을 더듬어 보았을 것같다. 그의 죽음에 결코 정당함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의 위치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데 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산 자는 그 어떤 수식어도 달 자격이 없다. 인간 존재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과정에 의해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닌가. 작가라는 특별한 상상력의 귀재에게 있어 죽음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최고의 난제일 것이다. 파묵역시 그의 <새로운 인생>에서 그토록 많은 버스 사고를 묘사하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기 위해 주인공들을 험난한 여행으로 몰고가지 않았나.
이 소설집은 한권의 장송곡집과 같다. 작가역시 일련의 납량특집극으로 여겨 달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불륜이란 소재가 핵을 이루고 그것에 갈등하는 무기력한 주인공들이 안쓰럽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이란 일상은 결코 회피할 수 없음을 상기하게 된다. 주인공들은 체념하면서 동시에 그 불꽃으로 몸을 던져버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 평범하지 않다. 이야기들은 작가의 착착 감겨드는 문체와 적절하다못해 속을 들켜버린 것같이 공감대를 부르는 비유들과 제대로 다져진 복선의 형식들에 의해 잘 받쳐진다. 작가는 인간심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자만이 부릴 수 있는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