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인들을 만나서도 그랬고 주변에서 다들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을 참 많이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은 가장 은밀한 남녀의 일 같지만, 알고 보면 가장 궁금한 세상의 일이지요."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 법사가 화두를 던지자 부여장(백제 무왕)과 선화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page 15
그런데 한국사에서 남녀의 사랑이 갖는 가치는 단순한 관심사를 뛰어넘는 무게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근대 이전에는 당사자가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남녀의 만남은 어른들이 정해주는 집안일이었으며, 성과 혈통은 신분 질서를 떠받치는 사회적 자원이었다. 사랑은 또한 권력의 한 축을 이루며 역사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로 작동했다. - page 5
그리하여 고대의 소서노와 주몽의 사랑 이야기부터 근현대의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 이야기까지,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15편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백제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이며, 한양 하북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재위 13년에 죽으니 조선 역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다."
기원전 37년까지 이토록 위대한 여정이 펼쳐졌던 그녀, 소서노.
졸본 부여 출신의 공주이자, 연타발의 딸이었던 그녀는 아직 젊은데다 집안의 재물이 막대해 구혼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들 형제를 키우는 어머니가 함부로 남편을 맞이할 수 없었던 그녀.
"내가 하늘의 명을 받아 이곳에 나라를 열고자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나라를 열겠다고 큰소리치는 청년 주몽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를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예씨 부인과 아들 유리가 찾아오게 되고 제2왕비로 밀린 그녀와 자식들의 미래가 캄캄해지자 소서노는 자신을 따르던 졸본 사람들과 함께 백제를 세우게 됩니다.
사랑의 배신마저 꾸역꾸역 삼키고 어머니의 강인한 힘으로 새 역사를 써 내려간 소서노.
그런가 하면 영조가 맏아들 효장세자(진종)를 잃고 나이 마흔에 다시 얻은 사도세자.
영조는 사도세자가 성군의 재목이 되기를 바라지만 학문에 관심이 없었던 그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야단을 쳤던 영조.
영조의 닦달과 편벽으로 사도세자의 마음은 알게 모르게 병들어갔고 그런 남편이 말도 못 하고 가슴 앓이 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혜경궁 홍씨.
결국 정성왕후의 혼전에서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가두어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영조는 총명하고 효심이 지극한 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올리고 '역적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해서 왕통을 지키게 되는데...
남편의 죽음을 묵인하고, 자식을 품에서 놓아준 끝에 이들 부자가 국왕 반열에 올라서는데 일조하게 된 혜경궁 홍씨.
버림의 미학이요, 애틋한 모정이다. - page 188
무엇보다 저에게 인상적인 이야기는 <인습에 희생되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였습니다.
"대단히 미안하나 이 유언서를 본적지에 부쳐주시오."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일본 시보노세키항을 출발해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향하는 부관연락선 도쿠주마루 3호실 선객이 남겨놓은 메모.
바다에 몸을 던진 것 같은데 몇 시에, 어느 지점에 그랬는지 알 수 없었고 결국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이들.
남자는 목포 대부호 김성규의 맏아들이며 극작가·연극평론가로 알려진 '김우진'이었고
여자는 평양 출신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나온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 '윤심덕'이었습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정사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언론에서는 윤심덕과 김우진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남자가 처자식 딸린 유부남이었기에 비관해 동반 자살을 택한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이들이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죽음으로 이끈 것은 예술적 동병상련이었다는 것을...
예술과 사랑은 단비가 되어 메말라가던 그들의 삶을 해갈해주었다. 하지만 인습에 사로잡힌 조선, 이방인에게 척박한 세상을 적셔주지는 못했다. 휘둘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칠수록 점점 더 얽매이는 불가항력의 현실이 사방에서 근대 예술의 선구자들을 조여왔다. - page 263 ~ 264
살아 있을 때는 죽고 싶을 만큼 욕하다가 죽고 나면 되살리기라도 할 듯이 숭배하는 게 세상인심이었던가.
현해탄 정사 사건에도 이런 심리가 깔리게 됩니다.
윤심덕을 비난해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노래에 눈시울 붉히며 그녀를 부활시킨 것도 '대중'이었음에.
유서를 남기는 심정으로 불렀던 <사의 찬미>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사랑'.
이보다 잔인한 것은 없었고
이보다 더 슬픈 것도 없었으며
그 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