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러시아 제국 변방의 밤
불빛도, 인기척도 없는 겨울 광장. 6년 전, 거액을 털린 은행은 눈보라 속에서 건재했다.
검고 추운 밤, 은행 지붕 위에 누군가가 서 있다.
무표정한 사내다. 그는 사제 폭탄 대신 자루 가방을 들고 있다. - page 13
6년 전 이곳을 참혹한 현장으로 만들었던, 이젠 단단한 얼굴에 34년짜리 나이테가 새겨져 있는 사내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폭동과 테러, 암살을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멀고도 추운 투루한스크로 유배를 떠나기 전 고향의 어머니에게 찾아가게 됩니다.
바느질하던 노파.
야음을 틈탄 아들의 기별에 말없이 문을 열어 사내와 냉기를 함께 들이며 마지막일 듯한 이들의 만남 속에 20년 전 그곳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비밀을 들려주게 됩니다.
"시베리아 어디쯤이니?"
"투루한스크 변경주요."
"투루한스크?"
놀란 노파는 반쯤 남은 보드카 잔을 비워 버렸다.
"참나...... 운명이...... "
비밀은 이미 목젖까지 올라왔다.
"왜요? 아시는 데예요?"
사내의 질문에 노파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투루한스크. 시뻘건 오로라가 드리운, 세상에서 가장 추운 곳이었지."
노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거기에 사셨어요?"
"그래. 아주 예전이지. 툰드라는 일 년 내내 영하 50도였다. 겨우내 오로라에 구걸하면 여름은 적선하듯이 잠깐 들러 줬어. 그 두 달짜리 여름에도 꽃은 피었다. 설화와 붓꽃만이 숲속에......" - page 20 ~ 21
1858년, 니콜라이 황제의 장남인 알렉산드르 2세가 황권을 이어받은 지 4년째.
리센코 후작은 이장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는 정확히 1년 뒤에 일행과 돌아오겠소. 그때 이 그림대로 되어 있으면, 마을 사람 모두가 각자 이만한 돈을 가져갈 겁니다." - page 24 ~ 25
젊은 천재 유전학자이니 리센코는 추위를 잘 견디는 '한랭 내성' 유전자를 만들겠다며 위험한 생체 실험을 강행하게 됩니다.
바로 홀로드나야 수도원으로부터 내려가 동쪽 홀로드나야에 250명의 남자아이가, 서쪽 홀로드나야에 250명의 여자아이를 두고 말입니다.
이 수용소와도 같은 곳에 갇힌 500명의 아이들은 갓난 아기였으며 남녀 구분할 것 없이 차디찬 얼음 입수와 고문, 나아가 강제 결혼과 출산을 겪게 됩니다.
왜?
그 이유는 바로
그제야 차르는 청년 리센코의 꿰뚫는 시선을 주시했다.
"폐하에게 추위를 타지 않는 러시아 백성들을 만들어 올리고 싶습니다." - page 44
유전학과 진화론에 빠져들었던 리센코는 차디찬 얼음 입수로부터 살아남는 이들의 유전자는 그 자손에게도 물려줄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의 유전학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무자비한 실험을 시작하게 되고 이 연구에는 20년의 기한이 주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실험은 좀처럼 진척이 보이지 않고, 이에 목숨을 건 리센코는 점점 미쳐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기적의 케케'라 불리던 소녀 '케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간간이 목숨을 이어나갑니다.
"정말 잘 자라 주었구나, 케케!"
후작의 대견한 손이 닿는 곳마다 땀구멍이 오므라들고 솜털이 곤두섰다. 서류철을 보던 연구원이 케케의 입수 기도 성적을 읊었다.
"후작님, 평균 나이로 환산하면 최상위권 성적입니다."
긴 숫자들의 나열 끝에 결론이 나왔다.
"케케는 가장 넓은 방으로 배정하지." - page 147 ~ 148
'획득 형질의 유전' 자신이 맹신하는 라마르크주의에 사로잡혔던 리센코로부터 기적의 케케와 한랭 내성 챔피언 베소 둘 사이의 아이가 그가 주장했던 결과였지만 검증되지 않았던 이론은 리센코에게 바꿀 수 없는 신념이 되고 초조해질수록 불안은 광기로, 실망은 폭력으로 폭발하게 되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아니었고 케케 역시도 목숨을 걸고 이곳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탈출해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실험체 '케케'.
그리고 '케케'의 아들...
사내는 조용히 손을 내려 훌쩍이는 노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의 기적은 저예요. 제가 세상을 뒤집어엎을 거예요."
...
사내가 신문을 펼쳐 케케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분'이 저에게 새 이름을 주셨어요."
글썽이는 눈물 때문에 케케는 신문의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러자 사내는 손가락으로 자신이 쓴 글의 맨 아래쪽을 집었다.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 강철의 사나이라는 뜻입니다." - page 245 ~ 247
실험의 마지막 결과물이었던 이 사내.
투루한스크로 유형을 떠나기 전 약 10년 그리고 유형을 떠난 이후 약 40년 동안 '혁명'이라는 이름을 걸고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다가 끝내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수천 명을 숙청하며 공포 정치를 펼친 이 사내.
"진짜 악마는 따로 있다."
실존 인물을 토대로 과학적 사유와 역사적 사실이 빚어낸 매력적이었던 이 소설.
그만큼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고 분했었습니다.
유전적 실험을 통해 열성을 제거하고 우성 인자를 키우려 했던 인간 개조 프로젝트.
이 파렴치하고도 비윤리적인 행위 끝에 태어난 독재자.
과연 '획득 형질 유전' 실험이 실패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이 이론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론이라면...?
이 질문들에 우리는 어떤 잣대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 성찰해 보아야 할 문제였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전 세계에 만연했던 '우생학'.
여전히 '인간의 우열'에 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는 현실 앞에 이 위험하고도 비윤리적인 사고를 경계해야 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