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동 천년, 탄금 60년 -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황병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1936년 생 서울토박이로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으로 부산으로의 피난을 제외하곤 평생토록 서울에 터전을 묻고 사셨던 가야금 명인 황병기선생.
집 전화번호도 나라에서 행정상의 이유로 국번만 바뀐 것 외엔 전화번호 또한 바뀌지 않을 만큼 진득하니 오랫동안 사사로운 것들을 바꿀 줄 몰랐던 선생에게 1951년 부산 피난 중에 처음으로 가야금을 만난 것은 그에겐 그의 삶을 가야금과의 인연으로 58년간 이어지게 해온 선생의 삶으로선 역사적인 변화였다. 또한 다섯살 연상인 소설가 한말숙선생과도 국립국악원에서 같은 가야금 선생으로부터 배워 알게 되어 그 인연으로 결혼까지 이어져 슬하에 2남2녀의 자녀를 두고 백년해로를 하시니 말이다.
지금이야 국악이나 가야금을 하는 것이 한 예인으로서의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래전 1960년대만 해도 국악을 한다는 것은 천인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된 계급적 성격이 뚜렸해 국악인들이 마치 무속인인 것처럼 천시당했었던 시대였다. 그런데 경기고교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엘리트였던 황병기 선생이 국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당시로선 지식인들 사이엔 큰 이슈로 떠오를만큼 참 대단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황병기선생의 가야금에 대한 사랑은 '가야금이 오직 좋아서' 예술은 좋아서 해야지 밥먹기 위한 수단으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가야금 연주를, 작곡을 하신 가야금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가야금이 오직 좋아서' 하셨다.
가야금을 시작하게 된 작은 동기부여를 받게 된 계기는 학교에서 사극을 하게 되었다고 당시에 같이 살고 황병기선생의 공부를 도와주고 말벗도 되어주었던 외당숙에게 말하니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국도극장에 데려가 춘향가 창극을 보여주었다. 물론 황병기선생은 남녀간의 사랑도 몰랐었고 창극이 재미없고 지루했었으나 외당숙은 집에 와 창극을 따라하고 재연하며 “정말 좋은 구경을 했다. 네가 이 맛을 알려면 한참 있어야 할 거다.” 라며 재밌다고 하는 모습을 보며 뭐가 그리 재밌을까? 라고 신기해 하다가 국악에 대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그 외에도 나중에 황병기 선생이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판소리 명창 김소희씨와 박규희씨를 오랫동안 후원했을 만큼 흥을 즐길 줄 아는 핏줄을 타고 난 것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가야금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것은 1951년 부산에 피난가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부산 대신동에서 성화라는 친구와 함께 대구출신의 가야금 선생 김철옥 노인에게서였다.
전쟁 후 서울에 올라와서도 학교를 파한 후 국립국악원에 가서 매일 가야금을 연습하고 집에 가는 것이 매일 일과로 그러다보니 KBS 주최 전국 국악콩쿠르에서 1등도 하고 라디오도 상품으로 받는 등 음악계에서도 주목을 받는 사람으로 서게 되었다.
그리고 1958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는데 서울대 음대 학장 현제명 선생이 불러 1959년 서울대 음악대에 국악과가 생기는데 가야금 시간강사로 나와달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하지만 황병기선생으로선 가야금으로 밥벌이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법공부를 하는 사람이 음악대 강사를 어떻게 하겠냐며 권유를 거절했으나 현제명선생이 “미스터 황은 지금 법공부를 하고 있지만 법하는 사람은 길거리에 나가면 산더미같이 많다. 굳이 너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법공부보다 가야금하는 게 얼마나 보배로운 것인줄 아느냐. 네가 시간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 시간만 나와라. 음악대에 적만 두어도 내가 영광으로 알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강의 시간표를 받았는데 10시간이 넘는 강의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뻘 되는 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결국 4년간 음악대 강사를 맡기로 하고 1959년 한국의 국악과 첫번째 가야금 선생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가야금을 하지 왜 법공부를 했을까?
법대를 가게 된 이유는 중학교때부터 가야금을 시작했었는데 부모님이 가야금 배우는 것을 반대하진 않았지만 학생이 시간이 뭐가 있어서 가야금을 배우겠느냐?는 부모님의 만류에 아인슈타인이 세계적인 과학자이지만 그의 바이올린연주는 프로급 수준이었다고 말하며 가야금을 배우되 학교공부에는 지장을 주지않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황병기 선생은 가야금도 매일매일 학교 끝나면 꼭 국립국악원에 가서 연습하고 집에 가는 등 열심히 했지만 그는 공부 또한 잘 했었다. 다른 아이들이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듯이 황병기 선생은 아이들이 노는 시간에 남들이 잡기를 하는 시간에 가야금을 했었던 것이다. 가야금을 전공이라 생각하기 보다 오로지 좋아서 했던 것이다.
4년간 가야금을 학교에서 가르키고 난 후 학교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황병기 선생은 명동극장 지배인으로 들어간다.
당시의 극장은 예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 판단하고 명동극장을 선택한 것이다.
그 후에도 그가 했던 것은 참 많았다.
화학회사의 기획일도 했었고 영화수입, 영화제작(다큐멘터리), 출판사 등 많은 일을 한 후 그가 평생 가야금과 함께 할 역사적인 1974년을 맞았다. 그리고 그로선 1974년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
1962년 가야금 배운지 11년 만에 그는 전통음악이 좋다하더라도 예전의 음악만 고집하면 골동품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우리시대의 음악이 나와야 살아있는 전통음악이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시대의 음악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가야금 작곡을 하게 된다.
창작의 차원에서 가야금을 바라보게 되면서, 1962년 창작곡 '숲'을 가야금 작곡의 첫 작품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가을', '석류집' 등이 탄생되었고, 그리고 그 녹음된 것이 릴테이프로 만들어져 미국에 하와이 대학, 동서문화센터 등에 알려지게 된다.
당시 그곳엔 '금세기 음악예술제'가 매년 열렸는데 동양작곡가와 서양작곡가를 초청하여 두 작곡가의 음악을 중심으로 연주하며 청중들과 음악으로 대화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의 황병기 선생은 작곡가로서의 경력이 3년에 불과했고 국내에선 국악을 백안시했던 분위기였는데 작곡가로서의 자격으로 초청을 받아 미국에 가게 되어 그 어느 것보다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1965년 4월 호놀룰루에서 두 번 무대에 선 것이 첫 해의 연주였는데 연주를 마칠 무렵이 되니 동서문화센터의 출판국에서 음반을 내자고 제안을 했다. 앨범 타이틀은 '뮤직 프롬 코리아-더 가야금'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같이 음악을 연주할 사람이 없어 고심했지만 당시에 외국에선 작곡가가 이중주도 혼자 하는 것을 알게 되어 장고와 연주된다는 가정하에 이어폰 꽂고 가야금을 연주하고 장고를 혼자 연주하여 1965년 미국에서 첫 음반을 내게 된다.
가야금과 함께 뜨겁게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황병기 선생에게 고비가 있었다.
바로 1998년말 서울대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야금작곡에 대한 열정은 끊이지 않아 대장 25센티미터를 잘라내고 회복을 하기에도 힘들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원에서 링거병을 건 수레를 잡고 장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운동을 밤에 하다가 서울대 병원의 시계탑을 문득 바라보니 그 시계탑이 너무 멋있어 보여 작곡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때 만든 곡이 선율이 아름답던 시계탑이었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처지에서 한밤중 창문 밖으로 보였던 병원의 시계탑이 무척 아름답게 보여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을 떠올렸다.
음악의 맛을 알았던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오동 천년, 탄금 60년』은 1951년의 부산 피난 시절, 가야금 소리에 첫눈에 반해 연주를 시작한 이후 평생을 가야금을 동반자로 삼아 가야금 인생을 살아온 저자의 삶을 옴니버스식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되돌아본 책이다. 백남준과의 일화를 비롯, 존 케이지, 장한나, 홍신자 등 국내외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과의 교류와 한국 문화예술계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범상치 않은 고집과 흔들림 없는 자아, 전통의 계승과 파격을 넘나드는 사고의 확장 등을 지켜봄으로써 가야금 연주가에서 작곡가로, 연주에서 창작으로 범위를 넓혀가며 열정과 땀이 어린 황병기선생의 예술세계를 이 책을 통해 예술의 참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음악이라는 것, 그것은 기쁘기도 하면서 고통스럽기도 한 것 이었다"
"그리고 그 맛은 기가 막히다"
"서양음악이 벽돌이라면 동양음악은 소리 하나 하나를 정원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서양곡은 벽돌을 쌓아가듯이 작곡하지만, 동양곡은 정원에 돌을 배열하는 기분으로 만들지요. 돌 하나 하나의 모습, 즉 소리 하나 하나가 어떻게 오묘하게 변하는가에 귀가 열려야 우리음악의 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가야금연주가 황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