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사와 교사 되기 - 우리의 교사와 학생들이 세계의 BTS(The best teacher and student)가 되기를 꿈꾸며
이혁규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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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잇따라 교사들이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교직사회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언론에서 이러쿵저러쿵 기사를 쓰기는 하지만, 요새 언론들이야 클릭장사가 가장 중요한 사업인지라 선정적인 내용만 각색해 보도하는 게 일반적이다. 문제의 배후에 있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듣기에는 신문은 적절한 매체가 아니다.


그래서 손에 든 것이 이 책이다. 사실 근래의 문제는 학부모들의 교사에 대한 갑질, 괴롭힘이지만, 이 책은 그런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한국 교육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들, 한국 교사들을 얽어매고 있는 내적, 외적 요인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하지만 문제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저 깊숙한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곤 한다.




책에서 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건 교사 교육 과정의 부족함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교사를 지망하는 특이한 나라다. 하지만 정작 그런 학생들들 좋은 교사로 길러내기 위한 교육제도는 모자람이 많은 상황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교대의 수업 구성인데, 중등 교사를 길러내기 위한 사범대학의 경우 실제 교과가 아니라 일반적인 학문 구성에 따른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면 사회 교과 교사를 키우기 위한 강의가 아니라 그 안의 다양한 과목들, 즉 지리나 역사, 경제, 정치 같은 분야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사회과 교사이지만 정치를 잘 모르고, 역사를 어려워하는 교사가 탄생한다. 이런 엉뚱한 교육현실의 배경에는 기득권과 밥그릇이 연관되어 있고.


교사의 승진과 관련된 문제도 생각보다 심각하다. 현행 제도에서 교사들은 크게 세 가지 진로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교장이 되려고 애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에게 집중하는 길, 그리고 나머지는 이도 저도 관심 없고 혼자 유유자적하는 길. 세 부류 중 어느 쪽이 비중이 높은 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현행 제도에서 교장이 될 수 있는 교사의 수는 매우 적다는 걸 생각해 보면 세 번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짐작은 된다.


교사들 자신의 문제도 분명 존재한다.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기를 꺼리고, 다른 교사들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주체들과의 연계를 위한 노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건, 다른 방식을 선택할 유인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사명감으로 무슨 행동을 유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교원 양성 계획의 실패로 인한 임용대기자 문제다. 쉽게 말해 교육은 다 받았는데 정작 교사로 임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정부의 정책실패에 있는데, 여전히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예비 교사들의 희생만 늘어가고 있는 상황.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되면 결국 교사들은 의욕을 잃고, 보신주의에 빠져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집단이 된다. 어떻게든 문제가 되는 상황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승진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길만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이 학부모들에게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서 나오는 비극적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교권 보호를 위한 법을 하나 만든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없는 것 보다야 나을지 모르지만, 교사 개개인의 자기 효능감이 떨어져서 의욕을 상실한 상황에서 무슨 일이 제대로 될까?


책을 읽고 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교사의 정체성 부분이다. 우리는 교사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 걸까? 최근 우후죽순 출몰하는 갑질 부모들의 경우 내 자식을 떠받들어야 하는 시종쯤으로 여기는 것 같지만, 이건 애초에 논외로 해도 상관이 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러면 교사는 교육을 담당하는 공무원일까? 또는 (십수 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다는) 일종의 성직으로 봐야 하는 걸까? 양쪽 다 지나친 면이 있다.


저자는 교사를 교육 전문가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이건 교사를 바라보는 외부의 인식만이 아니라 교사들 스스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 그래야 교사 양성 과정에서 내실을 기할 수 있고, 교사들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도 자연스럽게 요구될 것이다. 당연히 다양한 제도들(예컨대 승진 제도)도 여기에 맞춰 재설정되어야 하고.




어느 영역이든 개혁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일은 여기저기서 조금씩 손을 대는 식으로는 오히려 덧나기 쉽다. 워낙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혁은 모두의 반발을 사곤 하니까. 특히 교육 영역은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교육과정을 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정확히 이런 방식의 개혁을 시도해 왔었다.


물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다간 더 큰 카타스트로프를 맞이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피해를 받을지 모른다. 우리는 과연 개혁을 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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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의 속편.


벌써 세 번째 시리즈다.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를 기억한다. 아마 왕십리 CGV에서 봤던 것 같은데, 심지어 그 때 소개팅을 하고 두 번째 만난 날이었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영화는 결코 소개팅에서 볼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폭력이 난무하고, 피가 철철 흐르는 선정적인 장면도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찝찝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왔지만, 이게 꽤나 흥행을 했다더라. 2편이 만들어지고, 이제 3편까지 나왔는데, 심지어 한국영화계 흥행성적이 굉장히 떨어진 요즘에서도 무려 천 만을 넘겼다. 물론 요새 관객 수 통계의 신빙성에 관해 말이 좀 있긴 하지만, 이건 꽤 많이 본 것 같기는 하다.


이 영화의 흥행 포인트는 역시 마동석류 영화 특유의 피지컬을 사용한 시원한 한 방일 것이다. 영화 속 어떤 빌런과 마주하는 장면에서도 오히려 빌런 쪽이 걱정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결같이 마동석과 1대 1로 붙으면 칼을 들고 있던 총을 들고 있던 마동석이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또 마동석이 그렇게 한 방에 날려버리는 것들은 어지간히 나쁜 놈들이니까. 마치 마블 히어로 영화를 보는 듯 신나게 상대를 때려눕히는 걸 즐길 수 있게 된다.




설정의 아쉬움.


워낙에 피지컬에 중심을 두고 우당탕탕 하는 영화인지라 이야기의 전체 짜임새 쪽은 확실히 아쉽다. 이 부분은 마동석류 영화 전반에 걸쳐서 두드러지는 포인트인데, 특별히 이 영화에서는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영화는 일본 야쿠자가 국내에 들여오는 마약을 중간에 빼돌린 경찰 일당이 빌런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에 또 뺏긴 마약을 되찾기 위해 일본에서 보내온 해결사까지 섞이면서 이야기가 좀 복잡하게 돌아간다.(그리고 빌런도 좀 약해 보인다)


시리즈 첫 편의 흥행은 마동석 뿐 아니라 윤계상의 악역도 큰 몫을 했다. 그가 연기했던 장첸이라는 인물은 악의로 똘똘 뭉친, 입체적인 캐릭터는 분명 아니었지만 이제까지 주로 선역을 연기해 왔던 윤계상이 이런 역도 할 수 있었구나 싶은 놀라움과, 그 캐릭터가 저지르는 악행의 수준이 상상을 초월했던 점이(이런 영화를 소개팅 상대와 봤으니..) 눈길을 끌었다.


사실 마동석류 영화는 범죄도시 시리즈만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 틀로 찍어 내듯 비슷비슷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 범죄도시만큼 흥행을 거둔 영화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배경이 가정사(성난 황소), 학교(동네사람들), 조폭(악인전) 등으로 다양했지만, 경찰도 어쩌지 못하는 문제를 오직 주먹 하나로 풀어낸다는 설정 자체가 뭔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족한 설정을 돌파하는 중요한 도구가 인상적인 악역이 아니었나 싶었는데, 이번 편에는 그 부분도 좀 부족했다. 뭐 그래도 천만을 넘겼으면 된 건가.




현실이 더 해.


나쁜 놈들을 주먹으로 펑펑 날려버리는 형사가 정말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마도 이 영화의 또 하나의 흥행 포인트일 것이다. 이건 최근 우후죽순으로 나오는 복수 콘셉트의 영화나 드라마가 유행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여기에는 온갖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일이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다는 현실이 배경일 것이다.


대법원장 후보자가 세금을 탈루하고, 검사들은 특활비를 빼먹고도 누구 하나 사과를 하지 않는 수준이니, 이런 상황이 단시간 내에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당연히 이런 종류의 영화도 앞으로 한 동안은 인기를 끌 것 같고. 온통 빌런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그 중 하나씩만 골라 시리즈를 만들어도 100편까지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ㅋ


물론 아직까지 이 시리즈에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권력의 상층부까지 올라가지는 않는다. 중국에서 온 깡패나 동남아시아에 활동하는 폭력배가 1, 2편이이었고, 이번엔 경찰까지는 올라갔다. 과연 더 올라갈까? 뭐 이 영화가 애초에 사회고발 영화가 아니었으니 그렇게까지 갈 지는 확실치 않지만, 결국 그렇게 가다보면 마석도도 급 낮은 나쁜 놈들만 때려잡는다는 한계가 두드러질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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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9-24 0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동석의 입지야 확실하고 1편 윤계상의 장첸을 능가하는 아니면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찾아내느냐가 향후 포인트일것 같아요

노란가방 2023-09-26 13:40   좋아요 0 | URL
네 완전 동감입니다.
 



축구 경기에서 실점의 95퍼센트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축구의 기본을

수비수들이 최소한 5차례 이상 지키지 않았을 때 발생합니다.

세계적 수준의 수비수가 되는 조건 중 하나는

축구의 기본, 그 기본을 철저히 지키는 평범함에 있습니다.

스포츠에도, 우리 삶에도 기본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 이영표, 『말하지 않아야 할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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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젊은 날의 방황과 아름다운 구원 청소년 철학창고 13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정은주 옮김 / 풀빛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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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고전 중 하나인 “고백록”의 요약본이다. 책의 기획에 따르면 청소년들을 위해 말을 쉽게 풀고, 내용을 축약해 놓은 듯하다. 시리즈의 제목은 “청소년 철학창고”인데, 기초적인 철학서 읽기를 위한 시리즈로 보인다.


청소년들에게 철학 공부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한다. 다만 그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라면 적절할까 싶은 생각이 살짝 들긴 한다. “고백록”이라는 책 자체가 꽤 깊은 수준의 기독교적 사유가 담겨 있는지라 그 내용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을까 싶은 우려에서다.


또 어디까지나 “철학 서적”으로 이 책을 편집하고 소개하려는 번역자와 기획자들의 생각은 오히려 이 책의 본질을 조금은 왜곡시키는 느낌도 주는 듯하다. 예컨대 이 책을 풀어쓴 정은주는 “고백록을 찬찬히 읽다 보면 종교는 여럿이어도 진리는 하나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를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안의 영원한 빛을 찾야아 한다”는 말을 내 안의 부처를 발견하라는 불교의 주장과 들어맞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적어도 철학에서는 종교의 색을 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고백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자신의 성장기를 회고하면서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앞부분과 기독교 신학자로서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를 설명하는 후반부가 그것.


전반부는 일반적인 간증의 느낌으로 읽어나가면 된다. 젊은 시절 특히 성적 유혹에 취약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연녀와 함께 동거생활을 시작하며 자식까지 낳았다. 물론 이런 행동은 이민족들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었던 서로마 말기 당대의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있는 관행이었지만, 되돌아보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 점이 늘 마음 한 쪽의 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는 방탕한 한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회심한 이야기가 아니다. 수사학 교사로 성공을 하고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단순한 말재주가 아니라 세상의 근원과 같은 철학적 진리를 탐구했고, 다양한 대안들을 검토한 끝에 결국 기독교에서 지적 해답을 얻었다.


책의 후반부는 확실히 조금 어렵다. 주로 창세기 1장에 해당하는 창조에 관한 논의들인데, 눈에 띄는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창조의 방식에 관한 특정한 견해를 절대적으로 옹호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창조주와 다른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인지능력이 가진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지 않았나 싶다. 그에 비해 오히려 어쭙잖게 아는 이들이야 말로 특정한 견해를 유일한 견해인 양 맹신하지 않나 싶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 읽어 볼만한 책이다. 다만 분명 현대의 글과는 다른 느낌인지라(고전이 다 그렇지 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살짝 지루하거나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이 글을 비종교(기독교)적 맥락에서 단순히 교양 수준으로 읽는 건 확실히 좀 아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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