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저자는 삶이 끝난 이후에도 삶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사후의 삶이라는 것이 모순적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죽음이란 삶이 끝난 상태인데, 어떻게 또 이 가능 하느냐는 논리다. 이어 몇 개의 장에 걸쳐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두 주장오직 육체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일원론과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원론에 관한 논의를 하는데, 여기에서 저자의 논지는 분명하다. 영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없으므로, (자신에게는) 일원론을 따르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생각된다는 것.

 

     인간의 본질에 관한 논의에 이어 본격적으로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해 살피는 장들로 넘어간다. 저자는 여기에서도 앞서와 같은 사고실험들을 끊임없이 계속하는데, 예컨대 죽음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놓고서는, 우리의 삶이 지속적으로 즐겁고 행복한 상태라면 그것이 중단된다는 의미에서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임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식의 결론을 제시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삶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그렇게 지속되는 기간 동안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아는 한 어떤 일도, 100, 1000년 계속되어도 즐거운 것은 상상할 수 없으므로 영원히 사는 것을 소망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저자가 말하는 삶의 가치는 행복’(혹은 쾌락)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전제는 자연스럽게 삶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을 누군가 허락할 것인가(다양한 유형의 자살에 관한 논의) 하는 질문에,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이 고통스럽고 괴롭기만 하다면, 그 생명을 어느 순간 중단시키는 것도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식으로까지 이어진다.

 

 

2. 감상평 。。。。。。。

 

     우선 책 뒷표지에 실린 홍보문구를 집고 넘어가자. “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학생이 끝까지 들으려던 강의인가?”라는 도발적인 문구인데, 사실 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래, 그 정도로 깊은 감동과 교훈, 가치를 지닌 강의란 말인가? 그런데 책 속에 간략히 소개된 이야기에 따르면, 그 학생이 정말로 꼭 이 강의를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 학생은 졸업 전에 학위를 취득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고, 그 과정에서 이 강좌를 수강했다는 것이 팩트.

 

     꼭 이 강의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책 속에는 딱히 설명되어 있지 않았고, 그렇다면 어쩌면 이 강의가 학점을 잘 줬거나, 과제가 적거나, 병원치료와 시간이 맞았거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좀 싱거운 사실.

 

     ​물론 이 강의의 내용이 그 학생에게 위로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은 그저 기계일 뿐이고, 영혼은 없으며(정확히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물리적인 증거가 없으며), 따라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즐거움이며, 즐거움이 다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용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강의를 듣고 그 학생이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삶을 정리하는 데 일정부분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고.

 

 

     사실 저자의 철학적 논리 전개 방식이 썩 인상적이거나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책 초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원론적 입장에 대한 공격에서 저자가 사용하는 것은 플라톤의 저작 속에 나오는 영혼의 불멸 사상인데, 사실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플라톤 식의 이유를 들어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런 전략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저자는 영혼의 존재에 관해서 아직까지 그걸 인정해야만 하는 증거가 없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물론 여기에서 증거는 물리적인 증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약 영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본 개념상 물리적인 육체와는 다른 질적 양상을 지닌 무엇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물리적이지 않은 무엇을 물리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해야만 한다는 요구가 과연 적절한 걸까?

 

     ​나아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저자의 또 다른 유력한 주장인, ‘영혼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인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논리 역시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저자 자신도 인정하는, ‘의식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기 때문. 이 부분은 얼마 전 읽었던 C. S. 루이스의 위험한 생각에서도 다루고 있는 문제와도 비슷하다. 어떻게 우연하고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게 된 인간의 육체가 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나아가 논리이성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아직은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67)고 말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입장(오직 육체만 존재한다)은 철회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언젠가 그 원리가 자연주의에 입각한 방식으로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

 

     ​영원히 살아가고픈 인생을 여러분은 과연 상상할 수 있겠는가?(339)라고 물으며 영생에 대한 소망을 비웃는 부분 역시 딱히 논리적으로 일관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몇 페이지 앞에서(271)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

 

 

     ​철저하게 논리를 기반으로 죽음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가 죽음에 관해 물리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할 수 있는 건 죽어 있는 육체일 뿐이니까. 매미의 사체를 해부한다고 해서 매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건 아니고, 꽃잎을 샅샅이 조각낸다고 해서 꽃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게 아니라는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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