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19세기 미국. 노예를 허용하는 주(州)와 금지하는 주가 공존하고 있던 시대. 흑인이지만 자유인으로 태어나 제법 잘 나가는 바이올린 주자로 살아가던 솔로몬 노섭은 어느 날 좋은 보수를 약속하는 두 명의 젊은이를 만나 함께 워싱턴으로 가기로 하지만, 실은 납치를 당해 남부의 노예주로 팔려가게 된다.

 

     너그러운 주인 포드와 악랄한 주인 엡스에게로 넘겨지며 12년간의 노예생활을 하게 된 노섭. 구타와 폭언, 강간과 학대로 점철된 끔찍한 노예생활 끝에, 캐나다에서 온 한 백인의 도움으로 마침내 자유인임을 밝힐 증명서를 가져와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2. 감상평  

 

     처음부터 어느 땅에서는 노예가 허용되고, 또 다른 땅에서는 금지되는 것이 문제였다. 같은 흑인이라도 누구는 자유인이고 누구는 노예라는 식의 임의적인 구분 자체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전에 피부색에 따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어느 공간에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으니, 나는 괜찮은 쪽에 있다는 생각은 더 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전’마저도 언제라도 사라져버릴 수 있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지 않은가.

 

     이런 차원에서 노섭의 ‘해방’은 한 개인사(個人史)지, 노예제 자체에 대한 승리라고 보기엔 어렵다. 그 자신은 자유인 증서를 얻어 집으로 돌아가던 날, 함께 매를 맞고 학대당하던 팻시는 뒤에 남아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경험은 그저 한 개인의 불행이었을 뿐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섭이라는 인물이 비난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 개인적 경험을 책으로 쓰고 그것이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인 십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고, 그 본인도 노예해방운동에 뛰어들면서 사건의 의미는 보다 크게 확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 부분을 그리고 있지는 않고 있으니까.. 영화 자체만으로 보면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밖에..

 

 

 

 

     영화 속에서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노예를 부리는 쪽과 학대받는 쪽 모두가 같은 종교인 기독교를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노예를 조롱하는 관리자의 노래를 배경으로 성경을 낭독하는 주인의 모습을, 또 성경구절을 읽어주고는 노예를 학대해도 좋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주인을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힘든 일을 당하면서도 흑인영가를 부르며 언젠가 심판의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신앙으로 버텨가는 노예들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어떻게 한 종교가 두 계급에 동시에 유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만 한 부분이다. 종교란 잘못하면 숙명론으로 변질되거나 언제나 현실 그 자체를 정당화하거나 강화시키는 식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달까. 물론 정확히 말하면 노예들은 신앙으로 인해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았고, 오히려 극단적인 위기의 순간에 삶의 의미와 목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 주는 키(key)였다고 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노예제는 전쟁과 더불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악이다. 둘 다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극도의 교만함에서 비롯되는 범죄다. 소위 ‘문명화’라는 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하는 부분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거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금 고대의 ‘채무노예’와 비슷한 계급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은 분명 우려스러운 모습이다.

 

     다시는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끔찍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한 번쯤 볼만한 작품. 결코 편한 마음으로는 보기 어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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