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에서 다루는 문제는 관용이다. 많은 수의 학자들과 작가들이 기독교는 배타적이었지만, 고대 다신교는 관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문을 반복해서 외우고 있다. 그러나 고대 사회는 관용적이지 않았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은 개성을 발휘하기 보다는 공동체의 법과 관습을 준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시오노 나나미 같은 작가들이 주구장창 물고 빠는 로마의 관용은 실은 그저 ‘적당한 무관심에 입각한 통치’였을 뿐이다.(64)
후기 로마 제국 시기에도 이런 ‘적당한 무관심’이라는 통치 기조는 계속 이어졌다. 비록 여러 문헌들에 다른 종교와 신앙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어쩌면 그 빈도야 말로, 이런 탄압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일 지도 모른다.
저자는 여기에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행정력이 떨어졌던 당시 제국의 통치는 지역민들, 특히 지역의 상류층들의 광범위한 협조가 필요했는데, 그건 강압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79) 대다수 지역에서 제국의 행정은 세금을 거두는 데 집중되어 있었지, 종교문제를 강요하는데 쓸 여유가 없었다는 것.(82)
3장은 ‘성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에서 말하는 ‘성자’는 가톨릭을 비롯한 몇몇 기독교 교파에서 말하는 ‘성인’과는 다른 개념이다. 쉽게 말하면 지역의 유명한 그리스도인들, 대개는 수도사들이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경건한 농부가 그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다. 저자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지금 여기에 계시는 분으로 실감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한다.(109)
이런 인물들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여전히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일반인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그런 ‘성자들’의 신학적 견해는 전문가들(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134)는 걸 보면, 이들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