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보다 더 큰 비판은, 애초에 이 재판 자체에 대한 정당성 문제였다. 아이히만을 납치해서 재판에 출석시킨 것부터가 절차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아이히만이 행위를 했을 당시에는 없었던 법을 근거로 그의 행위를 단죄할 수 있느냐 하는 형식론적 반론에 저자는 강하게 동조한다. 또, (비록 이스라엘 자신이 전승국은 아니었지만) 전승국에 의한 재판이라는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사건을 국제재판소에서 다루는 것이 옳았다는 내용도 보이고.
물론 형식적으로는 충분히 지적할 만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나치가 저질렀던 그 만행을 제한하는 법이 없었던 것은, 하나의 국가나 정부가 그 정도로 엄청난 범죄행위를 저지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 했기 때문이거나, 당연히 그와 같은 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에 굳이 따로 법제화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 행위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았을까?
예컨대 우리는 얼마 전 소위 부패방지기구라는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대통령의 부인이 고가의 사치품을 뇌물로 받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기에, 실제로 발생한 ‘그 사건’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코미디를 목격했다. 전형적인 형식논리에 치우친 궤변인데, 물론 절차와 형식은 중요하다. 그런 것이 없다면 사법체계 자체가 무너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형식론에만 매몰되면 우리는 거악을 스스로 놓아주는 멍청한 짓을 하게 되고, 이는 두고두고 그 사회의 질서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최근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20년 전 밀양 사건처럼.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가 나치의 패망 이후였기에, 이스라엘의 법률에 근거해 나치 전범들과 그 부역자들을 재판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모두 소급적용이다. 그러나 이 소급적용이 부당한 일이라고 비판하는 건 “정당”할까? 그것은 “책임” 있는 비판일까? 어쩌면 스스로 유대인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던 한나 아렌트의 교묘한 논점 흐리기는 아니었을까? 또 그녀가 불륜관계를 맺었던 하이데거가 나치 찬양자였다는 점도 예사롭게 넘어가지지는 않는 부분이고. 실제로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나치부역 혐의를 벗는 데 중요한 법정(허위?)증언을 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