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원제.


영화가 시작될 즈음 원제로 보이는 어구가 크게 지나간다. "A Common Man", 직역하면 보통 사람 정도가 되겠다. 이 제목이 어째서 “라이브 테러”같은 직설적인 제목으로 바뀌었을까.


영화는 원제처럼 아주 평범해 보이는(하지만 머리털은 없어 조금은 수상해 보이는) 한 사내를 따라 진행된다.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의 길을 거니며 큰 가방을 메고 버스와 기차를 타고, 쇼핑몰을 들르고, 시장에 들려 아내가 말한 토마토와 채소를 구입한다. 그리고 경찰서까지 방문해 지갑 도난신고까지 하는 남자.


얼마 후 한 건물의 옥상에서 경찰서로 전화를 건다. 자신이 지금 네 개의 시한폭탄을 장치했으며, 그 중 하나가 경찰서에 있다는 것. 실제로 경찰서에서 시한폭탄을 발견한 경찰들은 그와 진지하게 협상을 시작하는데, 남자가 요구하는 건 감옥에 갇혀 있는 네 명의 범죄자들을 자신이 지시하는 곳까지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영화의 원제는 이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의 평범함을 부각시킨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한 사내가 잔인한 테러범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폭탄테러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런데 영화의 말미에 가면 여기에 반전이 더해진다. 남자가 범죄자들을 끌고 온 건, 그들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형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남자는 평범한 사람들을 수없이 희생시키는 테러범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못하는 무능해 빠진(그리고 무능하기까지 한) 정부와 사법기관들에 대한 평범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여준 것이었다.




무능한 심판.


영화는 테러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세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테러에 젖어 들어가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테러가 횡횡하는데도 그것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심지어 테러범을 잡은 후에도 그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은 무엇을 믿고 살 수 있을까.


다행이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폭탄 테러 같은 것들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번에 죽는 사고들은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만 시끄러울 뿐,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고 흐지부지 잊히곤 한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에서는 이태원 참사의 주무 장관의 탄핵안을 기각했고, 기각 판결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짓이 지들이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여당과 정부의 꼴사나운 행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이전에는 이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면 소위 정치적인 책임이라는 걸 지겠다면서 스스로 물러나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이젠 그런 최소한의 책임지기도 사라져버렸다. 백주대낮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아파트에 설계대로 철근이 들어가지도 않은 채 시공이 되고, 침수 위험을 경고했는데도 교통통제를 하지 않아 지하차로에서 사람이 죽어가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기껏해야 말단의 담당자에게 뒤집어씌우고 만다.


자, 이런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의 행동에 분명 불법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그가 경찰서 이외의 공간에 숨겨두었다는 폭탄은 처음부터 폭발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영화 말미 경찰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던 건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법이 심판하지 못한 범죄자를 누군가는 해결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정의에 대한 감각.




자력구제.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을 국민들에게 강제하고 있다. 쉽게 말해, 무슨 억울한 피해를 당하더라도 직접 갚아주지 말고, 법적 기관에 보복을 맡기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사적 보복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과잉을 막으려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려면 국가기관이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고 가해자에게 응분의 처벌을 가해야 한다.


문제는 이 기본적인 과정이 어그러질 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의에 대한 감각과 달리 한줌밖에 안 되는 일부 인사들이 법의 제정과 그 철학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친 결과, 우리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게 문제인 양, 또는 처벌의 본질이 그가 저지를 악행에 대한 보응이 아니라 그를 개선시키는 것인 양 착각하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범죄자들은 사법제도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보통의 시민들은 언제 범죄의 피해자가 될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최근 이런 사적 보복을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자주 제작되고 큰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는 국가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은 단지 이런 대중문화로의 반영으로만 끝나지 않고, 결국 불안한 사회를 만들 것이다.


영화 속 남자는 결국 의도했던 대로 네 명의 악질 테러범들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그 네 명 이외도 또 다른 테러범들은 출현할 것이고, 사법부는 여전히 무능할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계속해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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