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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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의 책이다. 그다지 철학에 조예가 없는 나지만, 그래도 벌써 이 저자의 책을 몇 권쯤 읽어본 것 같다. 고전 철학자들처럼 뭔가 거대한 체계를 쌓거나 하지는 않지만, 현대인들이 익숙하게 마주하는 현상들을 철학적 언어로 설명하고 풀어내는 데 꽤 능력이 있는 저자다.


이번 책에서는 “디지털화”라는 주제를 다룬다. 기술발전이 계속되면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화되고 있다. 여기에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는 이런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제는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거의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런 기술과 시대상의 변화는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을까? 저자는 디지털화가 세계를 탈사물화하고 탈신체화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0과 1의 숫자로 변환 가능한 시대에 더 이상 사물은 애초에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본래적 ‘가치’보다는 디지털 세계에서의 ‘쓰임’이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면 이렇다. 사진이라는 게 있다. 그것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기계로 여겨질 정도로 신기한 물건이었다.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은 그것이 처음 인화되었을 때와는 다른 또 다른 감상과 정취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사물이기도 하다. 사진작가들은 단순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복사해 옮기는 것을 넘어서 그 안에 있는 무엇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진들, 주로 휴대폰으로 찍은 셀피들은 어떤가? 한 자리에서 수십, 수백 장씩 찍은 사진들은 단지 그 순간만을 위해 소비된다. 휴대폰 사진첩에 수천 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다고 해서, 어디 그걸 다시 되돌아보는 사람이 있던가? 그건 더 이상 사진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사물이 아니라 그저 정보의 덩어리에 불과하게 되어버린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현대인들은 사물을 오직 스마트폰을 통해서 경험한다. 스마트폰을 건드리고 쓰다듬는 동작은 거의 예배와 맞먹는 몸짓(35)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통해 경험된 세계는 실제 세계와는 다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건 실제의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라, 오직 내가 원하는 것으로서의 사물(즉 나의 기호, 나 자신)일 뿐이다. 저자는 그래서 스마트폰이 “자폐적 대상들”과 비슷하다고도 말한다(46).


오늘날 사람들은 관계 역시 디지털로 이어가지만, 이런 방식은 결국 관계를 저해한다고 저자는 경고한다(84). 우리는 서로 접속해 있을 뿐, 실제로 만남을 갖지는 못한다. 한 때 온라인 소개팅이 유행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런 관계는 관계라고 부를 수 없는 마주침에 불과하다. 디지털을 이용한 접속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강한 결속, 특히 서로를 향한 충성의 마음에 기반한 단단한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어쩌면 요새 일종의 밈처럼 떠도는 MZ세대의 극도의 이기주의적 성향은 이런 디지털 문화의 최종적 결말의 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상대방을 차단할 수 있는 디지털 세계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어폰을 끼고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내 스케쥴에 따라 관계를 오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답이지 않겠는가.


군데군데 눈에 와서 박히는 문장들이 제법 있다.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현실을 보며 불안을 느끼는 학자의 시선은 공감이 간다. 다만 이게 디지털화를 보는 유일한 시선은 아닐 수 있다는 건 기억해야 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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