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4편의 개봉을 앞두고, 오랜만에 앞선 세 편을 복습해 보기로 했다. 아, 정확히 말하면 1편은 몇 번이나 다시 봤지만, 2, 3편은 본 적이 없었다. 1편 기준으로 나온 지 20년이 넘는 영화인데, 지금 보니 액션이라든지 영상미 쪽에서 약간 촌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야깃거리가 나오는 걸 보면 명작은 명작인 듯.
매트릭스와 기독교.
영화는 매우 의도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 주요 등장 인물 중 하나는 ‘삼위일체(트리니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자신들을 ‘시온’으로 이끌 수 있는 구원자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영화의 초반을 채우고, 이제 나타난 구원자가 인류를 구해내기 위한 싸움을 하는 이야기가 후반을 채운다.
이 과정에서 가룟 유다의 역할을 하는 사이퍼도 존재하고, 죽었던 네오가 살아나면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다는 이야기는 빼박이다. 그리고 네오를 중심으로 한 이 모험이 성공하기 위한 핵심적인 가치로 ‘믿음’이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측면도 있고.
물론 이런 면은 감독의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 관점을 말해주는 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C. S. 루이스가 말했던, 인류 문화 전변에 퍼져있는 보편적 구원 신화의 한 영향이라고 보는 게 맞을 터(마치 공산주의 신화가 기독교와 유사한 것처럼). 그리고 사실 잘 뜯어보면 기독교적 서술과는 다른 측면도 많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네오는 ‘구원자로 성장’해 간다. 이건 초기 기독교 이단 중 하나인 ‘양자설’과 비슷해 보인다. 또 그의 각성의 핵심 요소는 ‘깨달음’인데, 세상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은 또 다른 초기 기독교 이단이었던 ‘영지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매트릭스와 유심론.
현실은 가짜, 혹은 거짓이고, 진실과 진리의 세계는 저 밖에 있다는 관념론적 관점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플라톤이 그 선구자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니까. 이 작품의 핵심에도 바로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지금 우리가 진짜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은 사실 착각, 혹은 뇌 속에서 일어나는 환상일 뿐이라는.
언뜻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 부합되지 않는 말인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누군가 우리를 때리면 아프고,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고,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 행복해지는 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니까. 물론 그 모든 것이 뇌의 특정한 부분을 자극하기만 하면 실제로 일어나지 않더라도 얼마든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게 마음일 뿐이라는 생각은 비단 무슨 선불교 같은데서 던질만한 화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이런 생각에 가상현실이라는 소재가 더해지면서 꽤나 과학적으로 포장되고 있기도 하고, 흥미롭게도 마음의 존재를 부정하는 뇌과학 연구자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물론 이쪽의 경우 ‘마음’이란 용어보다는 ‘뇌 내 작용’이라는 단어를 좀 더 선호하겠지만.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런 지루해 보일 것만 같은 철학적 내용을 흥미롭게 영화로 담아내는 게 바로 ‘재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회피.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제안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이 세상이 가상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지금처럼 살 수 있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현실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 레오는 빨간 약을 먹고 모험에 뛰어들지만, 진실을 찾아가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쉬울 리만은 없다. 영화 속에서도 사이퍼 같은 인물은 차라리 진실에 눈을 감고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니까.
이상을 말하고, 진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던져지는 말이 있다. “어차피 세상은 안 바뀐다”는 것. 현실의 권력을 가진 이들은 너무나 강해 보이고, 이런 기득권에 도전을 하는 이들은 대개 핍박을 받거나 별 영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지는 게 사실이긴 하다.은 대개 핍박을 받거나 별 영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지는 게 사실이긴 하다.
그래도 영화 속 네오와 그의 동료들은 변화를 회피하지 않았고, 결국 작은 성과를 얻어낸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성공을 똑같이 경험하기는 힘들지 모르지만, 이런 도전이 우리 삶을 더 나은 이끌어 온 것도 사실이니까. 적어도 회피하지 않고 도전하는 일들을 향해 초를 치지는 말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