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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의 망상 - 역사와 사본학으로 파헤치는 KJV의 실체
권동우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6년 2월
평점 :
학부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묘한 책을 빌려 읽은 적이 있었다.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책만이 제대로 된 성경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탄이 변조한’ 악한 책들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씀보존학회’라는 이단단체가 펴낸 책이었다(사실 책 앞쪽에 학교 도서관 측에서 찍어놓은, 책의 내용을 주의하라는 ‘경고 스탬프’가 있었다). 단체 이름에 무려 ‘학회’라는 고상한 명칭이 들어가 있지만, 전혀 학문적이지 못한 괴상한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 때는, 어린 나이에도 누가 이런 헛소리에 귀를 기울일까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의외로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허접한 주장에 깊이 경도되어서 자기 말만 반복하는 사람들이 출몰한다. 몇몇 책들에서 그런 생각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긴 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아예 책을 하나 새로 써버렸다(이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는 말이다).
아예 하나의 관점을 비판하기 위해 작정하고 쓴 책이다 보니, 관련된 내용들이 모두 한 데 모인 모양새가 되었다. 마치 마트에 갔을 때 온갖 재료들이 다 담기는 카트처럼. 이게 좀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 책 전체의 구성이 어떤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서 명확하게 제시된다기보다는 이것저것 떠오르는 것을 나열한 듯한 느낌.
예를 들면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의 문제점을 다루는 1장과 그 역사를 다루는 2장이 책 초반에 위치하는 건 좋다. 하지만 3장에선 갑자기 제임스 왕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번역자들에 관한 내용만 해도, 5장(번역자들의 이력)과 7장(번역자들의 신학)에 나뉘어서 배치되어 있고, 이 유일주의를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학문적(신학적) 근거 제시는 8장(서문과 난외주를 통한 반박)과 10장(TR의 약점)에 나온다.
하지만 이런 구성상의 아쉬움이 저자가 모아놓은 자료들의 가치가 낮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아주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내용들을 충실히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점에서 인정을 받을 만하다. 물론 일부 자료들은 좀 주변적인 느낌도 없진 않지만 말이다. 시간이 없다면, 1장과 8장, 10장과 11장 정도만 봐도 충분할 것 같다.
특정한 영어 번역이 ‘가장 원문에 가깝다’는 생각(개인의 판단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기까지는 ‘잠정적으로’라는 단서를 달아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을 넘어, 그 번역‘만’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번역된 유일한 책이다’라는 말은 단순하게 생각해도 헛소리다. 이건 번역이라는 작업이 뭔지도 모르고, 성경의 사본과 그 계통을 연구하는 사본학의 기초도 없는, 무식한 이들의 주장일 뿐이다.
무식한 것이 나쁜 건 아니다. 배움이 부족한 것도 대부분의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도 큰 문제를 주지 않는다. 문제는 무식함을 무기로 삼을 때다. 소위 음모론은 이런 무식함을 양분으로 삼아 자란다. 자신이 아는 것만이 존재하고 나머지를 부정하는 것,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 그렇게 결과적으로 어떤 사회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일조하는 것, 이게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결과다.
하나만 아는 사람은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다섯 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게 백 개가 넘는다는 걸 알기에 함부로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 세상이 하나만 아는 사람들의 말에 더 쉽게 귀를 기울이곤 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그들의 말이 언제나 더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킹 제임스 성경’ 운운하는 소리에 궁금증이 생긴다면, 그냥 이 책을 한 번 보면 될 듯하다. 핵심을 말하자면, 킹 제임스 성경은 이전에 번역된 여러 영어성경을 참조해서 번역한 성경으로,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었기에 어느 정도 공신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사실 꽤 잘 된 번역이긴 하지만),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 이후로도 수차례 오류를 수정하고 개정하는 작업이 이루어진 번역이다. 이 번역만이 영감되었다는 소리는 결코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도, 하나님의 일을 공경하는 일과도 상관이 없는, 헛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