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할 수 있는 힘.
영화는 어느 평범한 날 아침 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려는 한 은행원(성규, 조우진)에게 걸려온 전화로 시작된다. 전화 속 목소리는 지금 타고 있는 차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고, 자신의 말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터뜨리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다. 차에서 내리기만 해도 터진다는 위협에 두 아이의 목숨을 건 도박을 하기 어려웠던 성규는 결국 지시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는 대부분 성규의 자동차라는 좁은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콱 막힌 상황을 풀어주는 장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성규가 받고 있는 협박 전화였다. 협박범은 영화 상영시간 내내 끊임없이 성규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고, 이건 단순히 돈을 뺏어가겠다는 일반적인 범죄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협박범은 ‘대화’를 원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 방식은 부적절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말 따위는 들어주지 않을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사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건 ‘힘’이다. 그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묻혀버리기 일쑤.
그러다 보니 영화 속 협박범처럼 누군가(종종 이 ‘누군가’는 ‘자기 자신’이 되기도 한다)의 목숨을 거는 절박한 사람들도 나오곤 한다. 조금 더 일찍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까.

양복 입은 범죄자.
신약성경의 야고보서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곤 하지만, 정작 우리를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건 부자들이라는 말이다(약 2:6). 영화 속 성규의 직업은 은행원이었다. 바닷가가 보이는 호화로운 집에, 비싼 자동차를 몰고 다닐 정도로 그는 성공한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성공과 재산은 누군가의 눈물 위에 쌓은 것이었다. 강도나 도둑이 몇 사람에게서 빼앗은 수 백 만원의 불법적인 수입은, 양복 입은 사기꾼과 지능범죄자들이 수백, 수천 명에게서 뽑아낸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악한 재물에 비해 새발의 피 정도에 불과할 때가 많다.(하지만 대개 이쪽은 훨씬 낮은 수준의 처벌로 넘어가곤 한다. 그나마 사면으로 일찍 풀려나기 일쑤고)

작은 범죄에 엄격하고, 큰 범죄에 관대한, 정신 나간 법문화는 결국 사회를 말라죽게 만든다. 역사를 봐도 한 공동체나 국가가 망할 때는 항상 법집행의 문란함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는 모습이 등장하곤 한다. 결국 누구도 공동체를 위해 나서지 않게 되고, 그런 공동체는 작은 위협에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값비싼 양복이라는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는 정의로운 사법행정은 꿈만 같은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