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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평점 :
이 책은 (미국에 사는) 백인들의 인종주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모든 백인은 인종주의 안에서 태어나 자라오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형성했고, 따라서 누구도 인종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백인들은 자신의 인종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고(인종 스트레스로부터의 차단), 오히려 타고난 인종으로 인한 각종 이점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이 인종주의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여전히 백인들의 사고 속에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백인들은 자신들의 인종주의적 모습을 지적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리고 다양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데, 이게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이다. 책은 백인들은 자신들의 인종주의적 특성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살라는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의 영역으로 전이되었을 때 나타난 사고 중 하나가 ‘정체성 정치’이다. 인간을 그가 속한 특정한 정체성으로 정의하고 설명하려는 태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초반부터 자신이 이 ‘정체성 정치’에 근거해서 인종주의를 보고 있다고 단언한다. 피부색이 하얀 인간은 ‘백인’이자 ‘인종주의자’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저자의 맹신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체성 정치라는 관점의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사람을 그가 속한 범주로 온전히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착각에 있다. 하나의 인간은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당장 A라는 사람은 엄마이자 아내, 회사의 직원이자 특정한 나라의 시민이면서 어떤 정당의 지지자일 수도 있다. 이걸 ‘저 사람은 엄마이니까 이런 정당을 지지해야 해’ 라는 식으로 환언하는 순간 그의 현실 인식은 물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조차 흔들리게 된다.
물론 어느 정도 얼추 맞아떨어지는 부분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백인과 인종주의 사이의 상관관계는 어느 정도 강하게 연결되는 면이 있어 보인다. 대체로 인종주의적 문제는 백인이 유색인을 향한 공격성의 형태로 나타나니까. 하지만 모든 백인들에게서 이런 문제가 동일한 수준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자신이 인종주의적인 언행을 했다고 지적받은 사람(백인)은 당연히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려고 할 텐데, 그러면 당장에 ‘백인의 취약성’ 운운하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심각하지 모르는 바보 멍청이로 치부하며 가르치려 드는 저자의 태도는 오히려 일종의 콤플렉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여기엔 저자 자신이,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백인이기 때문에 갖는 연대적 죄책감이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백인들이 보이는 모든 반응은 다 그들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은 저자에 의해 반박되고 재해석되어버린다. 심지어 백인 여성은 인종주의적 차별을 보고 울어서도 안 된다. 그 역시 실제로 하는 건 전혀 없으면서 감정적인 표출을 통해 논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행위니까. 누군가 지적하면 무조건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만이 백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이다. 글쎄... 이건 대화를 하자는 스탠스는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는 아직 다인종 사회라고까지는 부를 수 없는 상황인지라, 일상적인 경험의 범주 안에서 인종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는 않다. 그래서 미국 사회의 유색인종들이 겪는 잘못된 대우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가 ‘화가 나 있는’ 이유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백인들이 자주 보여주는 인종주의적 사고와 행동들에 불쾌감을 느낀다. 특히나 최근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 같은, 미국 내 흑인들에 대한 과격하고 차별적 행태는 지옥에 떨어질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처럼 일단 그렇게 상대방을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규정해버리면, (이 책에서 저자가 그러는 것처럼) 상대의 모든 행동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말게 된다. 그러면 대화는 끊어지고 문제 해결은 더욱 요원해질 뿐이다.
저자는 백인들이 자신들의 인종주의적 요소를 무조건 인정하고 회개의 자리로 나오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런 요청은 온전히 백인들의 윤리적 양심에 대한 호소로 보이는데, 이는 마치 ‘모든 백인들은 윤리적 요청에 호응할 수 있는 존재’라는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백인들이 뼛속 깊이 인종주의에 젖어 있는 존재이지만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알게 되면 그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태도는, 인종주의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저자로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지 않나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지적하는 ‘취약성’이라는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부분에서 (인종주의만이 아니라 성별, 재산, 학력, 지역, 정치적 성향 등) 일종의 취약성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지적을 받을 때 그것을 피해가기 위한 여러 반응들을 보인다.(심리학에서는 이런 방어기제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연구해 왔다)
논점을 피해가고, 문제가 되는 상황 자체를 개선하기 위한 행동을 미루는 이런 ‘취약성’은 장기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훼손시킬 수밖에 없다. 그 해결책은 저자의 말처럼 그것을 인정하고 바꾸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는 데서 출발한다.(이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회개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과도 유사하다) 때문에 이 책의 논지는 인종주의만이 아니라 다양한 차별과 혐오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는 데도 약간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