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릿속으로 하는 모든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게 된다면, 그것도 청각만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조금은 무섭고, 또 조금은 부끄러울 그런 세상이 이 영화의 무대다. 인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지구를 탈출해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지만, 그곳에서 후에 ‘노이즈’라고 부르게 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앞서 설명한 증상을 겪게 된다. 주인공 토드 휴잇(톰 홀랜드)은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청년이다.
언뜻 오래 전 일본에서 개봉했던 영화 ‘사토라레’가 떠오르는 설정이다. 다만 ‘사토라레’의 ‘능력’은 말 그대로 능력이었지만(그는 탁월한 외과의사였다) 이 영화의 ‘노이즈’는 그냥 ‘현상’이었고,(물론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환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기도 했다) 사토라레는 본인이 알지 못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모두가 그런 상황을 알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때문에 ‘사토라레 특별관리위원회’ 같은 억지 조직을 만들어야 했던 ‘사토라레’와는 달리, 이 영화는 모두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살 수 있을지 좀 더 현실감 있는 세계를 그려낸다.
흥미로운 건 영화 속 프렌티스 마을에 여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 당연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의 남자들이 전투를 위해 나가있는 동안 그 행성의 외계인이(외계인은 나중에 들어온 인간이 아닌가 싶지만) 여성들을 몰살시켰다는 이야기. 여기에 어느 날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나온 바이올라(데이지 리들리)가 등장하면서 소동이 일어난다. 영화 속 ‘노이즈’는 여성은 감염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가 생각이 드러나는 세계에서 그렇지 않은 존재는 오히려 이상한 경우가 되어버린다. 우선은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고, 내 생각은 상대에게 알려지지만 상대의 생각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나아가 분노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 후반에 밝혀지지만, 영화 속 프렌티스 마을에 여성들이 없었던 이유도 이것과 관계가 있었다.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 혐오는 비단 영화 속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도 수없이 현실 속에서 겪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니까. 특정한 종교, 인종, 직업, 부의 수준, 학력, 출신 지역 등등 하나씩 꼽자면 수도 없을 정도다. 영화는 이런 주제를 극적으로 그려내는 동시에 ‘비밀’과 ‘사생활’이라는 은밀한 영역도 살짝 건드린다(다만 충분히 깊이 있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여성에 대한 프렌티스 시장의 공격에는 두려움과 부끄러움 중 어느 쪽이 더 강하게 영향을 끼친 걸까.
예수님은 언젠가 감추고 숨겨둔 것이 모두 드러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말씀하신다(마 10:26).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이를 때 우리가 아무 것도 감출 수 없게 될 거라고 믿는다. 나를 완전히 드러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두려운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꾸밀 수 없으니 말이다(명품으로 몸을 감싸거나, 과시적인 근육단련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람을 볼 때 훨씬 더 흥미로운 부분이 먼저 보일 테니까).
하지만 C. S. 루이스는 바로 그런 생각(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조차 내려놓아야 그곳(천국)에서의 다음 발을 내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곳은 내가 가진 의로움을 의지하지 않는 존재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니까. 어쩌면 이 영화 속 프렌티스 시장은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은 당연히 천국일 리 없었고.
소재를 통해 흥미로운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었지만, 영화의 전체 전개는 좀 평범하다. 단순한 추격전이 영화 내내 이어지고,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증상들은 소소한 유머코드나 배경으로만 소비되는 듯하다. 조금은 아쉬웠던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