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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2월
평점 :
아, 새해 첫 날 이런 책을 읽게 되다니, 올해 독서생활은 왠지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몇 권 읽어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제목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주제와 전개, 그리고 주제의식까지 잘 차려진 정찬을 먹는 느낌.
주인공 가즈마사와 가오루코는 이혼을 앞두고 있는 부부였다. 남편인 가즈마사의 혼외관계 때문이었는데, 딸인 미즈호를 명문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한 면접 예비연습 도중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미즈호가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에 빠졌다는 것. 얼마 후 담당 의사는 조심스럽게 뇌사의 가능성을 비추면서 장기기증 의사가 있는지를 묻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뇌사와 관련된 일본의 묘한 법률인데, 다른 나라의 경우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해 장기기증 의사가 없는 한 치료를 중단할 수 있지만, 일본은 장기기증을 승낙하지 않으면 심정지 상태가 되기 전에는 사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즉, 장기기증 의사를 밝힐 때에만 뇌사가 사망으로 인정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주인공 부부는 딸의 죽음(뇌사)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실제로는 죽은 상태인데, 부모가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소위 말하는 연명치료를 계속 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물론 실제로는 이 사이에서 수많은 타협적 선택들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 선택하게 되는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오로지 남은 가족에게 맡겨버리는 법률체계가 과연 합당한 건지 하는 의문도 들고.
두 사람이 뇌사를 받아들이려고(장기이식에 동의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찰라 딸의 손이 움찔하는 반응을 목격하고 급격히 흔들린다. 아내인 가오루코는 장기기증 의사를 철회하고 간병을 지속하기로 했고, 평소 바쁜 일로 가정에 충분히 신경 쓰지 못한 가즈마사는 가오루코의 의사를 따르기로 한다.
원래 간뇌나 연수 부분이 기능을 멈추면 호흡이나 체온유지 같은 기본적인 생체유지활동이 중단될 수밖에 없기에, 이를 위해 인공호흡기와 튜브를 통한 영양공급 등의 외부적 장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마침 가즈마사가 경영하고 있는 회사에서 하는 일이 그런 뇌기능에 문제가 생긴 환자들을 위한 의료보조기기를 만드는 것이었고, 회사의 기술력으로 이제 미즈호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잠든 것처럼 보이기에 이른다.
그러나 가오루코는 여기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남편의 회사에서 개발 중인 신기술로 미즈호의 신체를 움직여 보고자 했던 것. 우선은 계속 누워만 있기 보다는 적당히 움직이는 것이 근육의 유지나 생체기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명분은 있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다른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이미 뇌가 죽은 상황에서 혼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어린 아이...
작가는 여기서 딸을 향한 어머니의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그려내는 동시에, 삶과 죽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기계적 장치의 도움을 받아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심지어 움직이기도 하는) 그 아이는 살아있는 걸가? 기계적 장치가 문제라면, 심장박동기나 인공투석과 같은 장치들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결국 ‘뇌의 활성 여부’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건지, 그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삶과 죽음, 뇌사라는 소재에 첨단 기술을 더하면서 독특한 분위기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잘 만들어 냈다. 문득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네버 렛 미 고”가 떠올랐는데, 듣기에 그 영화의 원작 소설도 일본계 영국인 작가 썼다던가.(일본 소설가들이 자주 보여주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약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어 나가며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증이 커져갈 즈음, 작가는 나름 합리적인 결말을 만들어 냈다. 사실 이런 결말이 아니었다면 격이 확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관련된 주제를 직접 다루는 책도 좋지만, 이렇게 문학으로 풀어낸다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생각을 이끌어 내는 것 같다. 이런 게 문학의 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