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미니언 - 기독교는 어떻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톰 홀랜드 저자, 이종인 역자 / 책과함께 / 2020년 9월
평점 :
우리는 흔히 연대를 계산하기 위한 기준으로 BC와 AD라는 기준을 사용한다. 전자는 Before Christ, 즉 '그리스도 이전‘이란 뜻이고, 후자는 Anno Domini라는 문구의 줄임말인데, 라틴어로 ’우리 주님의 날들‘이라는 의미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기준으로 시간을 세고 있다는 말이다.
시대가 변해서 이런 게 '불편했던' 사람들이 몇 차례 새로운 연대법을 제안하긴 했지만,(예컨대 저기 북쪽의 ’주체 몇 년‘이나 이슬람력 같은 경우) 여전히 기존의 방식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고, 병기하는 수준이다. 일단 전 세계의 달력과 시간계산법을 다 바꾸는 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 때문인지 요새 어떤 사람들은 BCE(Before Common Era)라는 식으로 ’비기독교적 용어‘를 애써 만들려고도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확실히 시대는 변했다. 이 책에서 주로 탐험하고 있는 서유럽에 국한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한 때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이 수없이 일어서고 사라졌던 땅이었지만, 이제 이 지역의 기독교 인구는 20%도 안 되는 게 사실이다. 크리스마스를 홀리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는 생뚱맞음으로 상징되는, 전방위적인 무신론적 도전이 무척이나 강하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상당부분 남아 있다고 수차례에 걸쳐 단언한다. 심지어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니 그들의 주장 자체도 기원을 따져보면 기독교에서 연원한 것들이라는 말. 다만 여기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라는 말은 신앙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학적 차원에서 언급되는 표현이다. 우선 저자 자신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지난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었던 힘을 추적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 기원부터 매우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정복하고, 반대파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적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들을 신으로 섬기던 사회에서, 기독교는 예수의 희생과 죽음을 그 신성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내다 버리고, 버려진 여자 아이들이 유기되어 창녀로 전락하는 일이 흔히 벌어지던 고대 로마 사회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기독교가 제국의 담을 허문 다음부터 점차 당시 사회의 표준으로 자리 잡아 간다. 물론 세상의 진보는 일직선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변주와 변조가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구하고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그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컨대 저자는 로마 황제 중 하나인 율리아누스를 예로 든다. 흔히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불리는 인물인데,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거의 국교의 자리에 올려놓았을 즈음에 나타나 이교주의를 부활시키려 한 인물이다. 문제는 그가 부활시키려 한 이교주의와 혼란 시대에 필요한 도덕과 윤리가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일리아스’ 속 영웅들은 거만하고, 약탈에 열을 올렸고, 허약한 자들을 경멸했다. 율리아누스가 명예를 부여하려 했던 철학자들 역시 가난한 이들을 경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를 배척하면서 기독교가 도입한 새로운 윤리를 거부하는 일은 그 자체로 역설적인 시도였다. 저자는 율리아누스가 ‘망상’에 빠져 있었다고 평가한다(194).
근대 이래로 종교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세속주의자들이 꺼내 든 ‘성과 속의 분리’라는 개념도 흥미롭게도 기독교 전통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그 시작은 아우구스티누스였는데, 이후 몇몇 교황들이 중세 기간 동안 교회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위해 이 개념을 강조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졌다는 것. 물론 오늘날에는 그 반대의 의도를 가지고 이 개념을 끌어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이지만, 이 개념을 진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개념을 정립한 교회를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 또한 자기모순적 태도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은 ‘인권’이다. 인간이 보장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개념은 교회법학자들이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도 생활필수품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도, 노예 해방을 소리 높여 외친 것도 그 시작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었다. 마치 인권이 근대의 발명품인 양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천부인권’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 역시 그 정당성을 다른 데서 찾지 못한다. 또, 현대의 유물론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을 보면, 인권이라는 개념이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은 아니라는 게 확실해 보이긴 한다.
물론 이런 설명들이, 그러니 인권과 성속의 구분, 이성과 자선과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려면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뿌리도 모른 채 어떤 사상이나 개념을 취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얄팍한 교만함을 피해야 한다는 것과, 어떤 좋은 개념들이 역사상 반복적으로 특정한 집단에서 나왔다면, 그 집단을 보는 눈도 좀 최소한 균형 있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정도는 기억해 둘만 하지 않을까?
여기에 이 책이 지닌 또 다른 유익은, 유대교부터 기독교로 이어지는 역사를 너무 딱딱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충분히 연대기적 충실함을 담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각 장은 1~200년의 터울을 두고 그 시대의 중요한 장면들을 스케치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상당히 노련한 솜씨다.
당연히 기독교 역사를 학문적으로 자세히 살피고 연구하기에는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할 리는 없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갖는 데는 도움이 될 듯하다. 단순히 교리적 설명이나 일어났던 사건들을 순서대로 배열해 놓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내적 의미를 인문학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중요한 지점까지 짚어주니 친절한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을 듯.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