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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 디지팩 한정판 (2disc)
이시하라 타츠야 외 감독, 스기타 토모카즈 외 목소리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보기 시작했고, 이 영화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 영화는 단독으로 제작된 게 아니라 여러 편의 전작이 있었고, 또 그에 앞서 긴 만화 시리즈도 있었다. 영화 속에는 이런 시리즈의 설정이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해서, 나처럼 처음 보는 경우에는 살짝 혼란스러울 법도 하다.
간단히 이해한 바에 따르면, 영화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스즈미야 하루히’는 발랄을 넘어서는 성격의 소유자로, 이곳저곳 내키는 대로 달려들면서 소동을 일으키는 인물인데, 그 덕분에 주변에 있는 동료들이 수습을 하느라 고생고생 하게 만드는 캐릭터. 이번 편의 주인공인 쿈은 그런 하루히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또 같이 다니는 친구. 문제는 나머지 동료들의 캐릭터인데, 하나는 무슨 비밀 조직에서 파견나온 듯하고, 또 다른 한 명은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형 로봇이라는 설정인 듯... (이거 뭐니...)
어느 날 학교에 도착한 쿈은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같은 반이었던 하루히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고, 함께 결성한 ‘SOS단’이라는 동아리도 사라져버렸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모두 달라져버린 상황. 좌충우돌하며 원인을 찾아가던 그는 마침내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늘 조용하게 동아리방 한구석에 앉아서 책만 보고 있던 인공지능 로봇 유키(물론 겉모습은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이다)는 하루히가 일으킨 소동에 휘말리면서 조금씩 스트레스(혹은 버그)가 쌓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시간을 재구성해버렸다. 재구성된 세상에서 유키는 로봇이 아닌 정말로 평범한 여고생이 되었고, 조심스럽지만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간다.
만약 쿈이 시간을 원래대로 돌린다면 그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린다. 어쩌면 그것이 늘 말이 없이 앉아만 있던 유키가 원하는 세상이었을지도 모르는 데도. 게다가 원래 세상은 늘 하루히에게 끌려 다니며 뒤치다꺼리만 하던 쿈은 늘 불만 투성이었던 것 같으니 꼭 돌아가야 하는가 싶은 고민도 할 만하다. 그렇다고 이쪽이 아주 정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 소동 속에서도 새로운 관계들과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생겨났으니.
그렇게 평범한 타임슬립물인 줄 알았던 영화는, 나름 진지한 고민을 던져준다. 새롭게 형성된 시간 역시 또 누군가에게는 안정감과 행복을 주는 시간일 텐데, 그걸 바꿈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는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야 하니까. 실제로 영화 말미에 이런 고민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이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에겐 시간을 되돌려야 할지 같은 거대한 고민이 필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매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그 작은 일들이 모여서 언젠가 거대한 사건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늘 영화 속 유키처럼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 이들의 의견과 기분은 무시되곤 한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쿈처럼, 무슨 큰 일을 겪지 않더라도, 우리 곁의 그런 작은 이들의 목소리에 좀 더 일찍 귀를 기울여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싶은.
주인공의 결정이 나름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영화가 끝날 때 즈음 마음은 썩 시원하지는 않았다. 아마 영화 속 유키 쪽에 좀 더 마음이 쓰였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론 그쪽 캐릭터인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