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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8월
평점 :
솔직히 이 정도 책은 너댓 권 정도 읽을 걸로 쳐줘야 한다.(사실 원래도 세 권의 두툼한 책으로 나왔다가 한 권으로 합본한 책이기도 하다.) 후주를 빼고 본문만 1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도 그렇지만, 유대인의 4천 년 역사를 시대구분을 따라 일곱 개의 장으로 서술하는 책의 내용도 단숨에 읽기에는 만만치 않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정독하다보니 책 옆면이 온통 울긋불긋 물들었다. 그만큼 내용을 충실하고 독창적으로 풀어내서 대충 넘어갈 만한 부분이 없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팔레스타인(가나안) 땅과의 인연부터, 점차 발전해 나가는 유대교의 신학을 다루는 1장, 후기 왕정 시대부터 신구약 중간기를 지나며 분화되기 시작한 유대교 내 개혁파와 정통파를 묘사하는 2장,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반유대주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합리주의와 신비주의가 교차되었던 중세 초기(3장)를 넘어, 게토라고 불리는 분리거주구역의 설치와 함께 점점 반유대주의가 더 강해지는 중세 중후반(4장)까지 유대인들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유대인들은 드디어 자신들에 대한 장벽이 철폐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어떤 이들은(마르크스나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이들이 대표적)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유대인으로의 정체성을 부정함으로써 이 과업에 편승하고자 했지만,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이런 기대가 허황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유대인 국가의 재건을 위한 움직임, 즉 시온주의가 발흥한다(5장). 그리고 마침내 벌어진 인류 최악의 범죄인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6장에 이르면, 자칭 문명국이라 자부하던 이들이 보여준 악마적 근성에 구토가 치민다.
결국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7장에 이르면, 이 대장정을 함께 지켜봐 온 독자로서 일종의 안도감마저 든다. 수천 년 동안 민족적 무시와 차별을 당했던 사람들의 사고는 우리의 생각으로 가볍게 재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은 아랍 세계와의 갈등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고, 독립 전후의 처리 방식에서 범죄적 요소가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랍 세계의 대처도 별반 다를 바 없었고, 애초에 1948년 이전에 그 땅은 전후 해체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으니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역사를 다룰 때 많은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어떤 시기 어떤 민족이나 국가가 마치 하나의 단일체인 것처럼 판단하고 행동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그 구성원들의 사고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관점에서 유대인은 이런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대단히 큰 파괴력을 발휘하는 사건들은 일종의 경향성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서유럽 전반에 퍼진 반유대주의를 피해 많은 유대인들이 동부로 이주하면서 아슈케나지 사회가 크게 확장되었지만, 17세기 중반에 벌어진 대대적인 학살로 인해 다시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들은 독일을 거점으로 기존 사회에 녹아들어가기 위해 애쓰지만, 2백 년 후 벌어진 홀로코스트로라는 대참사를 겪게 된다.
그런데 그런 큰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일치단결해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시온주의 세속국가의 건설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반대했으니까. 개혁파와 정통파,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의 교체는 유대인 역사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런 현실에 기초한 실용주의와 이상에 기초한 정통주의를 이해하지 않은 채, ‘유대인이 어쩌구’하는 식의 얄팍한 훈수를 남발하는 건 분명 어리석은 일이다.
유대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협상’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빠뜨릴 수 없다. 수없이 핍박받고 쫓겨나고, 또는 갇히면서 그들은 실권을 지닌 이들과의 협상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것들(대개는 재물이었다)을 어느 정도 내어주는 대신 공동체의 생존을 얻어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얼토당토않은 불합리한 조건들도 그들은 감내해 내면서 조금씩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협상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역사적 표본이라고 할 정도.
자신들이 원하는 문구가 빠졌다는 이유로, 혹은 자신이 제안한 것들을 상대가 백 퍼센트 용납하지 않았다면서 협상 자체를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협상이라는 게 애초에 양편 모두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라는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승패를 가르는 싸움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다. 필부필부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야 그냥 자기 하나 손해 보면 그만이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지는 지도자들이 이런 식의 생각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애초에 협상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배제한 채 유대인 몰살을 계획했던 히틀러 같은 괴물을 앞에 두고도 협상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현실을 견디기만 했던 자세도 한 몫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협상이라는 것도 상대가 대화가 가능한 ‘사람’일 때 가능한 것이다.
4천 년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풍성한 정보와 인상적인 통찰들이 잔뜩 담긴, 좋은 학술서이면서 역사서인 책이다. 볼륨이 좀 있어서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한 번 제대로 읽어 보면 또 다시 읽고 싶어질 때가 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