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의 배신 - 길들이기, 정착생활, 국가의 기원에 관한 대항서사
제임스 C. 스콧 지음, 전경훈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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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경의 배신이라는 책 제목을 들으면 어떤 게 떠오를까? 당연히 농사나 농업과 관련된 비판적 고찰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이 책의 주요한 소재는 농업이다. 그러나 농사에 관한 책은 아니다. 저자는 정치학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학 연구자이고, 이 책은 굳이 따지면 농업에 대한 문명사적 고찰을 담고 있다.(말만 해도 어렵다.)

 

     하지만 이 어려운 분류를 넘어서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선명하다. 우리는 흔히 수렵과 채집을 하던 고대인들이 농업을 통해 엄청난 생산력의 향상을 이루어냈고, 이를 위해 대규모의 관개공사가 필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라는 기구가 만들어졌다는 서술을 믿고 있지만, 이런 표준적인 설명이 틀렸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농업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국가가 탄생하기까지 무려 4천 년 가까이 필요했으므로 둘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기에 투입된 노동력 대비 생산량이라는 효율성만 따지면, 초기 농업은 대단히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했고 생산물도 보잘 것 없었다. 반면 적은 노동력만 투입해도 다양한 산물을 얻을 수 있었던 수렵, 채집은 효율성 면에서도 훨씬 뛰어났다. 굳이 넘어갈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가를 형성하고 대규모 관개를 통한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데에는 오히려 불편한 점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전염병 문제다. 특히 최근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인수공통전염병은 초기 국가들을 완전히 파괴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또 곡물중심의 식생활을 통해 섭취할 수 있는 제한된 영양소도 사람들을 약하게 만드는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이런 상황에서 수렵과 채집, 그리고 유목을 주업으로 하는 이들은 국가로의 종속을 거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 중 하나였다. 국가에 속하게 된다는 것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강제력이 필요했다. 국가와 그 지배층은 세금을 거두기 쉽도록 사람들을 모아 정착시키고 농업에 종사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결국 수렵에서 농경문화로, 부족에서 국가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는 모델이 틀렸으며, 오히려 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부의 통제와 외부의 적들을 관리하기 위해) 국가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꽤나 충격적인 주장이지만,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수긍이 되는 면이 있다.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가 매끄럽게 진화의 과정을 걸어왔다는 신화를 별다른 근거 없이 신봉해왔다. 이 과정에서 C. S. 루이스가 연대기적 속물주의라고 불렀던, 뭐든지 최근의 것이 좀 더 낫다는 식의 건방진 태도로 일관해 왔었고.

 

     사실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이런 경향은 거의 일반화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무조건 시간이 지나면 매끄러워질 것이라는 추측을 기정사실화 해 왔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실제는 좀 더 복잡하다는 상식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사회계약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저자는 국가의 해체를 보는 관점도 좀 다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파괴가 수반되기도 하지만, 좀 더 큰 문명사적 관점으로 보면 그건 한계에 부딪힌 중앙집권적 국가가 상당히 느슨한 분권적 상황으로 변화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은 오히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조금 더 나은 영양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물론 새로운 억압자가 나타날 가능성도 적지 않았지만)

 

 

     발전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나오미 클라인이 쓴 쇼크 독트린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소개된다. 거대한 지진해일로 초토화가 된 동남아시아의 한 해안마을에서 원주민들은 일제히 내륙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그 자리에 현대식 리조트가 들어선 일이 있었다고 한다. 깨끗하고 현대적인 건물들을 보며 누군가는 지역이 발전했다고 좋아했지만, 조상 대대로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왔던 원주민들은 내륙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던 발전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런 식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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