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에 관한 세 번째 관찰은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익숙해짐이나 애착 못지 않게, 사람들의 사고를 강하게 지배하는 것이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두려움을 갖게된다.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 아기는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 안에는 어떤 위험요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양수라는 따뜻한 물에 잠겨 있으면서,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배고픔을 느끼면 탯줄을 통해서 어머니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면 되고,

피곤하면 그냥 그대로 자버리면 되는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즐겁게 놀기도(?)한다고 한다. ㅡㅡ;

뭐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곳이다.




더구나 자궁 안은 사시사철 일정한 온도로 맞춰져있다.

난방, 냉방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태아가 잠겨있는 양수는, 웬만한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 곳에는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혼란함도, 소음도, 매연도 없다.

태아에게 있어서 그 곳은 낙원인 것이다.

에덴동산이 그 곳과 비견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아닐까?





하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태아는 영원히 그 곳에서 살 수는 없다.

10개월의 기간이 지나면, 태아는 그 낙원에서 혼란한 세상으로 밀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아마 태아도 직감적으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한없이 편안하기만 했던 그 곳이,

이제는 자기의 자라버린 몸을 겨우 담고 있는 크기로 줄어든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낙원에서 세상으로 나와야 할 때,

아기는 엄청난 두려움에 접하게 된다.





아기가 처음 보고 느끼는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요즘에야 거의 대부분 산부인과를 찾아가서 출산을 하니,
(난 집에서 태어났다는... ㅡㅡㆀ)

대부분의 아기들은 병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대한 첫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한 번 아기의 입장이 되어보자.




'한 두달 전부터 내가 있는 곳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전에는 참 편했는데 말이다.

이제 여기 말고 좀 더 편한 곳으로 나가고 싶다.

지난 열 달간 계속 나랑 얘기하던 누군가한테 말해야겠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난 말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좋은 수가 생겼다.

바디 랭귀지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내가 답답하다는 것을 몸으로 알려주자.




아.. 뭔가 감이 온다.

헛..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이 더 답답해져온다.

이대로 있다가는 깔려 죽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아, 저기 통로가 있는것 같다.

좀 작아보이긴 하지만, 지금 난 살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다.

저 밖에 뭐가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도전해보자.





드디어!! 내 머리가 빠져 나왔다.

아.. 근데 여긴 너무 이상하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 저기 많은 존재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고,(아직 난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가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내 섬세한 피부도 갑작스런 자극에 놀라는 것 같다.

다시 들어가야겠다.

여기는 내가 살 곳이 못되는거 같아.

조금 불편하긴 해도 전에 그 곳이 더 나아.

헛.. 근데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가려고 몸부림을 칠 수록 자꾸자꾸 빠져나오기만 한다.





아.. 결국 완전히 빠져나오고 말았다.

이런 괴물들이 사는 곳에 나 혼자 떨어져 나오게 된 것이다.

아얏! 누가 날 때렸다.

슬프다. 이제 이렇게 난 맞아 죽는 것인가...'





약간의 과장과 상상이 들어갔지만,

태아는 분명 이 과정에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인간은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변화라는 것은 양면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반면,

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은 안정된 현재의 위치를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단 권력자들 뿐만 아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돈이나 물건 등 여러가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비이성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도록 만든다.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의처증이나 의붓증이 이런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미래에 어떤 것이 있을지 알 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두려움도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까이에서 찾아보자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자그만치 12년 동안의 공교육을 받은 결과를 측정하는 단 한 번의 시험.

물론 많은 준비를 해왔겠지만,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법.

안심하고 시험에 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같은 맥락에서 취업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성취하고 싶은 목적을 이룰지 못할까봐 갖는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의 눈을 좀 더 크게 떠 보자.

이 모든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없을까?

급격한 변화로 인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

이런 두려움들이 점점 확장되어서 가장 극치에 이를 때가 언제일까?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죽음보다 더 극적이고 큰 변화가 있을까.

인간이 상실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가장 큰 상태는?

죽음 이후의 상태일 것이다.






뭐.. 너무 작위적이지 않느냐고 반문을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죽음은 너무나고 급작스럽고 큰 변화이며,

인간이 잃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잃는 것이고,

죽음 이후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단 하나의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이 비록 급작스러운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보다 앞서서 그 변화를 경험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리라고 약속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라는 큰 자산을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앞서 말한 그 분이 그들에게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도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위에서 말한 그 분이 그들에게, 그들이 죽은 다음 있을 곳은 좋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보다 더 크고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자, 그러면 이제 시선을 다시 우리에게로 돌려보자.

우리는 이미 가장 큰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이다.

조금 전 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크게 느껴지는가?

그런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이미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인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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