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카이퍼의 정치 강령
아브라함 카이퍼 지음, 손기화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목회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그가 주축이 되어 시작했던 반혁명당이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는지를 정리 해 쓴 책이다.

     반혁명당이라는 이름 가운데 있는 혁명18세기 말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퍼가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절대왕정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책 전반에 걸쳐서 그는 입헌군주국인 네덜란드 왕국의 왕인 빌럼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각론에 있어서 카이퍼는 공정한 선거제도, 지방분권 같은 의제들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 혁명의 근본에 있었던 무질서와 인간 본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 나아가 무신론적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것들이 결국 국가적 독재, 혹은 전체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을 우려했고(실제로 프랑스에서는 그런 역사가 있었다), 이에 대항하는 카이퍼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국가를 비롯한 각 영역에 자체적인 권위를 부여하셨기에, 국가는 가정이나 학교, 사회의 각종 기구에 전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영역주권론이다. 그는 철저하게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분권적, 연합적 국가관을 표방한다

 

     ​책의 중후반부에서는 세금, 사법 제도, 예산안과 교육 등 국가 운영의 각 영역에 있어서 반혁명당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2. 감상평 。。。。。。。

     10년도 훨씬 전에 읽어봤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원전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손에 들었다. (사실 이 책은 주제보다는 저자의 이름이 선택의 이유였다) 그가 보여주었던 개혁주의 정치학을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역시 편집본이나 발췌보다는 원적을 직접 읽는 맛이 있겠다 싶은 기대도 있었고.

     미주나 참고문헌 같은 페이지도 거의 없는 600페이지가 넘는 두께도 만만치 않았지만, 번역이 참 답답한 수준. 물론 대체적으로는 읽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어느 정도의 선 이해를 갖고 때로 적당히 넘겨짚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편집자 서문의 한 문장(11)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 시대와 동등한 증언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의 도전을 제시한다.” 이게 우리나라 말이긴 한가? 본문의 각주 중 하나는 뭔가 중요한 조사가 빠져 있다.(“카이퍼는 기억으로부터 인용하는 있다.” 401)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세속정치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그 때까지 기독교인들은 현실정치에 휩쓸려 어느 한 정파를 지지하거나, 영적 조언자로서의 영향력을 주는 정도였지만, 카이퍼는 아예 기독교적 관점에서 정치를 재구성하려 했다. 물론 그의 이론에는 현실을 수용하는 면적 적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체계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다만 그의 정치이론은 기독교인이 70%를 상회했던 네덜란드의 인적 구성을 배경으로 하고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부가 일요일에 영화상영이나 여행, , 카지노 같은 업장들의 운영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독교적 전통이 없는 세속국가나 지역에서는 쉽게 관철시키기 어려운 주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카이퍼는 자신의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을 반대한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국민들에게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한다.(“자유롭게 하라. 일단 정부가 잡초를 뽑기 시작하면 밀을 가라지로 오인하기 쉽기 때문이다.” 136) 카이퍼가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가 가진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정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권한이 전능한 데까지 이르는 것으로 여기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데 있다.

     지방 분권의 필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는 이 즈음, 카이퍼의 이론은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예컨대 선거제도에 있어서 카이퍼는 다수가 소수를 두 번 이상 이기도록 허용하는 제도를 반대한다. A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1만 명이고, B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9천 명이라고 해 보자. 선거구는 3,500명의 A정당 지지지와 3,000명의 B정당 지지자가 있고, 선거구에는 4,000명의 A정당 지지자와 2,500명의 B정당 지지자가, 선거구엔 2,500명의 A정당 지지자와 3,500명의 B정당 지지자가 있다면, 선거 결과는 2:1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각 정당의 지지자 비율인 10:9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실제 의회의 의사결정에는 사실상 2:0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카이퍼는 이런 상황이 정치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분열을 증폭시킨다고 본다. 시민들의 직접참여로 이루어지는 선거제도 자체가 반드시 정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 혁명의 열정 안에서 때로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서도 다수의 억압, 나아가 전체주의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 이런 태도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꽤나 사려 깊은 통찰이다.

 

     다양한 면에서 기독교적 정치세력이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참고해 볼 수 있는 작품. 이 정도의 보편적 정서를 갖추어야 집권까지 할 수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한심한 자칭기독교 정당들의 꼴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