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마시고 자라
김인숙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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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체중계에 올라가는 일. 어제보다 숫자가 늘면 우울하고 줄어들면 기쁘다. 숫자 몇 개로 기분이 좌우되다니.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방심하고 있다가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찍었던 때가 엊그제이므로. 몸무게를 잰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지만 더이상 찌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생긴다. 다이어트를 하기 전에는 운동이 힘들게 느껴진다. 막상 하고 보면 운동보다 식이 조절하는 게 가장 힘들다. 아는 맛이 맛있다. 오늘 먹을 치킨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이런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힝.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지를 못한다. 아니 안 먹는 걸로 할란다. 그래서 지금 몸무게는?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다. 타고난 체질을 바꿀 수는 없다. 식탐 많고 소화를 못해도 꾸역꾸역 먹는 타입이라 텔레비전에 나오는 마른 몸매는 절대 가질 수 없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다. 김인숙의 소설 『먹고 마시고 자라』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이숙이 썸남 성재와 밥을 먹으러 간다. 월급 보다 많은 카드값으로 사들인 옷을 입고 나간다. 그녀는 88사이즈로 누가 봐도 뚱뚱해 보인다.

허벅지 살과 살이 부딪혀 새로 산 바지가 쓸려 있는 걸 발견하고 소고기 집 화장실에서 엉엉 운다. 나 역시 청바지를 사면 허벅지 안쪽이 닳아서 오래 못 입었다. 좋은 바지면 세탁소 가서 안감으로 덧대달라고 했다. 지금도 그 바지는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 『먹고 마시고 자라』는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은 소설이다. 요즘의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어서. 설렁탕을 사 왔는데 먹지를 못하는 김첨지의 부인의 상황도 아닌데. 나는 먹지를 못하고 아니 안 먹고 있다. 달다구리 음료를 마시고 싶은데(간간이 사 먹기는 합니다. 아예 안 먹는 건 아니에요) 좀 참는다.

소설은 세 친구의 우정과 연애, 오늘을 다룬다. 이숙, 보민, 강옥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다. 이름하여 비만 메이트. 사이즈도 제각각. 77, 88, 99. 그녀들은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종류의 방법으로 살을 빼려고 했지만 요요라는 벽에 가로막힌다. <식탐 미인>이라는 케이블 방송 음식 코너의 작가이기도 한 이숙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자신의 몸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일에서만큼은 프로의 모습을 보인다. 보민은 취업 준비생으로 자존감이 약한 상태다. 강옥은 빅 블랙이라는 큰 옷을 전문으로 하는 쇼핑몰의 사장이다.

외면보다 내면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은 사라져야 한다. 사람을 겉만 보고 어떻게 알아라고 하지만 우선 보이는 모습이 겉이다. 『먹고 마시고 자라』는 이와 같은 뻔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마음이 예뻐야 한다. 다이어트보다는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되지도 않는 소리 말이다. 타인의 눈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나를 들여다볼 것을 이야기한다. 세 친구의 기상천외한 연애와 인생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 인생의 걱정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먹으면 마셔야 하고 그러면 잠이 올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자야 한다. 단순한 몸의 명령이다.

드라마틱 한 몸무게의 변화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초미녀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살 뿐이다. 텔레비전 속 미녀들이 되기에는 이번 생은 망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아무리 살을 빼도 몸이 가지고 있는 기본 형태는 변하지 않았다. 허벅지는 굵고 배는…. 눈물이 나와서 더는 못 쓰겠다. 『먹고 마시고 자라』는 나다움을 잃지 말자고 말한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나를 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이다. 냉장고에 고이 모셔져 있는 초코 케이크를 먹을지 말지가 오늘의 최대 고민인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잊지 말자. 이번 생은…거시기 하니 몸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만 돼서 잘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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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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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대화를 나누다가 질문을 받았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오라고 말했다. 대학교 혹은 고등학교 때로 그러니까 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돌아가겠냐고 지니가 물어와도 자꾸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해도 저리 가버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여드름투성이에 단짝 친구 하나 없이 수업이 끝나는 시간만 기다리던 시절. 잘 하는 것도 없이 잘 하기만을 바랐던 시간들.

김세희의 장편 소설 『항구의 사랑』을 읽으며 그 시절의 짧았던 인연과 헤어짐, 머뭇거림의 감정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편지를 쓰거나 시와 소설을 옮겨 적었다. 공책 한 권을 다 쓰고 나면 뿌듯함보다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내가 하지 못한 말이 이렇게나 많구나. 소설을 읽는 일은 즐겁기도 슬프기도 하다. 내가 겪었던 시간을 설명해주어서 기쁘고 잊고 있던 감정을 들춰내서 먹먹하다. 『항구의 사랑』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내가 한 번씩 만났던 이들이다. 잘 지내고 있나. 약속이나 다짐을 나누기도 했는데 전부 잊었겠지.

목포라는 항구 도시에서 청소년기를 겪은 화자인 준희를 둘러싼 비밀스러운 풍경을 담은 『항구의 사랑』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소설은 나를 기어이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로 데리고 갔다. 여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그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늘 의아해하던 시간으로 말이다. 있었지. 짧은 머리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중성적인 목소리의 여학생이. 그 애들은 학생회 간부이거나 공부를 잘해서 인기가 있었다. 매해 반장과 회장을 도맡아 하며 선생님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그 애들이 이반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런 용어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항구의 사랑』의 준희는 초등학교 때 가깝게 지낸 인희의 정체성을 고등학교에 가서야 안다. 공부를 잘해 좋은 고등학교에 간 것이 자부심이 된 시절에 인희와의 만남은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 애가 하고 다니는 모습과 행동이 관계를 멀게 만들었다. 준희는 규인이를 만나며 친구라는 안온한 세계로 들어간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연극부 동아리에서 만난 민선 선배는 준희의 영혼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는 학교에서 준희는 민선 선배를 향한 마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배웠다. 『항구의 사랑』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기억과 예의를 말하는 소설이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음을 준희는 나중에서야 겨우 깨닫는다. 자신이 좋아하던 민선 선배를 향한 마음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이해하기 위해 힘들게 그 시간을 불러낸다. 꼭 한 번 그런 기억을 가진 우리들을 다독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항구의 사랑』에는 목포에 유년을 두고 온 소설가 김세희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그건 김세희만의 것이 아니다. 익숙한 지명과 고유 명사를 읽으며 우리는 함께 살고 같은 것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하며 고민에 빠졌었지를 추억하는 것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나다운 것으로 바라봐 주는 하나의 존재에 손을 뻗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었다. 김세희와 준희 그리고 나는 사랑을 했다. 『항구의 사랑』은 사랑이 사랑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인 소설이다. 소설가 김세희에게 『항구의 사랑』은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부디 지금 살아 있음에 안도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 우리는 살아냈고 살아가고 있다. 광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던 시기를 지나왔고 열기가 아닌 온기로 남아 추억에 질문을 해 보는 것이다. 너는 나를 사랑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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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민수 문지 푸른 문학
김혜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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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름이 같은 두 남자가 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 피터 김, 한국 이름은 김민수. 중학교 2학년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 민수. 묘한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이 우정을 쌓아가는 『오늘의 민수』는 내일이 아닌 오늘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피터 김의 애니메이션을 불법인지 모르고 다운로드해서 고소 위기에 처한 중학생 민수는 피터 김을 찾아간다. 자신의 사정을 담은 편지를 내밀고 고소 취하 부탁을 한다. 자신의 영화평이 진솔하게 담긴 글을 읽은 피터 김은 부탁을 들어준다.

민수의 방학 기간 동안 피터의 집에 와서 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말이다. 민수의 아버지는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병을 얻어 돌아가셨고 지금은 분양 사무소에서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산다. 그렇기 때문에 합의금 150만 원을 마련하기 힘들다. 민수는 기꺼이 일을 하러 간다. 피터 김의 커피를 타는 것과 소소한 심부름을 한다. 에어컨이 없는 자신의 집보다는 훨씬 시원해서 피터 김이 따로 일을 시키지 않을 때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다. 사실 민수는 꿈이 있다. 엄마는 싫어하지만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

만화를 좋아해서 피터 김의 영화도 다운로드해 보려고 했다. 전에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 동안의 특별한 일. 이름이 같은 영화감독과 시간을 보내며 민수의 꿈은 무르익어간다. 할아버지라고 불리기 싫어하고 영화 인터뷰를 질색하는 피터 김, 민수는 열다섯의 민수에게 특별한 수업을 받는다. 평소 마음에 들어 한 카페 사장인 여진의 마음을 얻는 비법에 대해서. 나이를 초월한 그들의 우정은 여름이 지나도 지속될 수 있을까.

『오늘의 민수』는 꿈을 향한 내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가오지 않은 내일 따위 벗어던지고 오늘을 위하며 살라고 말한다. 민수들이 겪는 꿈의 좌절과 극복을 통해 오늘의 나에게 힘내라고 외쳐주는 소설이다. 만화가의 꿈을 가진 민수를 보며 열다섯의 나를 돌아본다. 그 시절 나는 꿈보다는 즐거운 오늘이 있기를 바랐다. 하고 싶고 즐기고 싶은 일이 있는 민수의 오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한 오늘이 있다면 내일은 걱정이 없는 시간이 될 테니까.

어린 나이에 슬픔을 알아버린 그래서 눈치가 빠르고 다른 이의 기분을 먼저 살피는 애틋한 민수. 괴팍한 성격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영화감독 민수. 두 사람의 오늘과 나의 오늘이 만난다. 명랑한 하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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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 독보적 유튜버 박막례와 천재 PD 손녀 김유라의 말도 안 되게 뒤집힌 신나는 인생!
박막례.김유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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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방송을 보면서 아침부터 낄낄대고 웃을 줄이야. 시장 봐온 장바구니 하울 영상을 정신을 잃고 볼 줄이야. 샌프란시스코에서 블루 보틀 커피 마시는 걸 보면서 감탄할 줄이야. 인생, 모른다. 아니 알 거 없다. 굳이 꿈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할머니가 치매 위험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손녀 김유라는 결심한다. 할머니와 여행을 가겠다는. 회사에 말했는데 휴가를 주지 않아서 퇴사를 해버린다. 일흔의 나이에 난생처음 외국 여행을 박막례 씨는 떠난다.

구독자 80만 명이 넘는 유명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의 이야기는 책으로 나왔다. 제목도 비장한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할머니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다룬다. 막내로 태어나서 막례라는 이름이 붙은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 어찌어찌 글은 읽을 줄 알게 되고 한복 학원에 다니면서 동네 어른들 밥을 해주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음식 솜씨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막례 씨는 파출부와 장사를 하며 애들 셋을 키운다. 친구 애순 때문에 알게 된 남자와 결혼을 하고 그 일을 평생 후회한다.

숫기가 없는 그녀는 장사에 재능이 없었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 장사꾼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아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어려운 시기를 겪다가 자매 식당을 열어 인생의 중반기를 맞이한다. 솜씨가 좋아 식당은 장사가 잘 된다. 자식에게는 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나고 짠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성격이 활달해 계모임에도 나가고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하는 드라마 덕후이기도 하다. 정해인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황홀해 하는 손녀에게 팩트 폭행을 날리기도 한다.

손녀 김유라는 할머니와 함께 한 호주 여행에서 찍은 동영상을 업로드한다. 처음에는 가족끼리 보려고 했는데 반응이 좋기도 하고 두고두고 보시라고(유튜브는 로그인 안 해도 영상을 볼 수 있으니까)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다. 올라온 영상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편집과 자막 넣는 센스가 대단하다. 할머니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고 웃음이 터지는 포인트를 잡아낸다. 계모임과 한국 드라마란 무엇인가를 강의하는 동영상도 재미있다. 편들아, 왔니라고 시작하는 영상들을 보다 보면 출근 시간을 놓칠 수도 있다.

솔직해서 팡팡 터지는 화법으로 일상의 재미를 더해주는 박막례 씨의 오늘을 응원한다. 화장이 잘 되고 안 되고는 너의 문제야, 문제. 하하하. 맞아, 맞아. 나의 문제다. 오늘도 거울을 보며 못생긴 내 모습을 보며 울적해 하지만 그건 누구의 문제도 아닌 내 문제인 것이다. 옷이 신발이 안경이 아닌 나의 문제.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인생 후반기를 신명 나게 살고 있는 한 사람의 희망이 담긴 책이다.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고 버렸다면 다시 주워 담으면 된다는 초긍정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크리에이터 박막례의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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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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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권여선, 『레몬』 中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그 해를 기억한다. 거리에는 붉은 악마가 쏟아지고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포옹을 하던 이상한 시간을. 누군가에는 신나고 즐거웠고 어떤 이에게는 슬프고 참혹했을 그때를. 애들은 학교에서 틀어주는 축구 경기를 봤고 나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골을 넣거나 말거나. 16강에 올라가거나 말거나. 응원하는 무리에 끼지 못하니 관심 없는 척했다. 뭐가 그리들 재미있을까. 경기에 이기면 편의점으로 취객이 몰려와 바쁘고 정신없었다. 월드컵, 얼른 끝나 버려라.

권여선의 소설 『레몬』은 2002년의 시간을 다룬다. 무해한 아름다움의 소유자 김해언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친다. 고3이었던 김해언은 6월 30일 월드컵 폐막식이 열린 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날 학교 인근 공원 화단에서 발견되었다. 둔기로 머리를 가격 당해 살해된 채로 말이다. 김해언을 마지막으로 본 자들의 심문이 이어지고 끝내 사건의 범인을 밝히지 못했다. 동생 김다언은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해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김해언의 주변 인물인 김다언, 윤태림, 상희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소설은 그날의 진실이 무엇인지 전부 알려주는 걸 마다한다.

전부 마다한다는 건 일정 부분 알려준다는 뜻도 된다. 추측하고 예상해야 하는 사건의 진실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동생 김다언은 언니를 죽인 사람을 알고 있으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복수를 가한다. 한 사람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남은 자들은 어떤 얼굴과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과연 애도라는 형태를 취할 수 있을까. 『레몬』은 애도에 대한 소설이다. 죽지 않고 살아가는 건 삶의 가혹함을 견뎌야 한다는 뜻도 된다. 김해언이 죽고 그녀를 기억하는 자들의 삶은 애도가 가능할까.

죽음과 삶의 사유를 아름답게 풀어 놓는 권여선의 문장을 오래 읽어 간다. 약삭빠른 인간은 죄를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았다. 현실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다. 죽음이 죽음으로 향하지 못할 때 삶은 삶일 수 없다. 『레몬』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남은 이들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상상하게 한다. 아프지 않은 척할 뿐이다. 그가 남기고 간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괜찮은 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쏟아지는 죽음의 사연을 보면서 오늘이 무사히 가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다.

『레몬』은 짧은 소설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애도하지 못한 많은 죽음의 이야기는 아프고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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