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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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상 대화를 나누다가 질문을 받았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오라고 말했다. 대학교 혹은 고등학교 때로 그러니까 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돌아가겠냐고 지니가 물어와도 자꾸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해도 저리 가버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여드름투성이에 단짝 친구 하나 없이 수업이 끝나는 시간만 기다리던 시절. 잘 하는 것도 없이 잘 하기만을 바랐던 시간들.

김세희의 장편 소설 『항구의 사랑』을 읽으며 그 시절의 짧았던 인연과 헤어짐, 머뭇거림의 감정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편지를 쓰거나 시와 소설을 옮겨 적었다. 공책 한 권을 다 쓰고 나면 뿌듯함보다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내가 하지 못한 말이 이렇게나 많구나. 소설을 읽는 일은 즐겁기도 슬프기도 하다. 내가 겪었던 시간을 설명해주어서 기쁘고 잊고 있던 감정을 들춰내서 먹먹하다. 『항구의 사랑』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내가 한 번씩 만났던 이들이다. 잘 지내고 있나. 약속이나 다짐을 나누기도 했는데 전부 잊었겠지.

목포라는 항구 도시에서 청소년기를 겪은 화자인 준희를 둘러싼 비밀스러운 풍경을 담은 『항구의 사랑』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소설은 나를 기어이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로 데리고 갔다. 여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그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늘 의아해하던 시간으로 말이다. 있었지. 짧은 머리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중성적인 목소리의 여학생이. 그 애들은 학생회 간부이거나 공부를 잘해서 인기가 있었다. 매해 반장과 회장을 도맡아 하며 선생님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그 애들이 이반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런 용어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항구의 사랑』의 준희는 초등학교 때 가깝게 지낸 인희의 정체성을 고등학교에 가서야 안다. 공부를 잘해 좋은 고등학교에 간 것이 자부심이 된 시절에 인희와의 만남은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 애가 하고 다니는 모습과 행동이 관계를 멀게 만들었다. 준희는 규인이를 만나며 친구라는 안온한 세계로 들어간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연극부 동아리에서 만난 민선 선배는 준희의 영혼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는 학교에서 준희는 민선 선배를 향한 마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배웠다. 『항구의 사랑』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기억과 예의를 말하는 소설이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음을 준희는 나중에서야 겨우 깨닫는다. 자신이 좋아하던 민선 선배를 향한 마음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이해하기 위해 힘들게 그 시간을 불러낸다. 꼭 한 번 그런 기억을 가진 우리들을 다독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항구의 사랑』에는 목포에 유년을 두고 온 소설가 김세희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그건 김세희만의 것이 아니다. 익숙한 지명과 고유 명사를 읽으며 우리는 함께 살고 같은 것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하며 고민에 빠졌었지를 추억하는 것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나다운 것으로 바라봐 주는 하나의 존재에 손을 뻗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었다. 김세희와 준희 그리고 나는 사랑을 했다. 『항구의 사랑』은 사랑이 사랑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인 소설이다. 소설가 김세희에게 『항구의 사랑』은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부디 지금 살아 있음에 안도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 우리는 살아냈고 살아가고 있다. 광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던 시기를 지나왔고 열기가 아닌 온기로 남아 추억에 질문을 해 보는 것이다. 너는 나를 사랑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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