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갑니다, 편의점 - 어쩌다 편의점 인간이 된 남자의 생활 밀착 에세이
봉달호 지음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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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는 편의점이 두 군데나 있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각각 버스 정류장 앞에 하나씩 있는데 입지 선정이 탁월하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한참이나 남은 시간 때문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편의점으로 발을 디디고 만다. 그걸 노린 듯 편의점은 오늘도 호황 중이다. 저러다 하나는 문을 닫지 않을까 걱정 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아무리 가까워도 길을 건너려고 하지 않는다. 귀찮다. 그러는 게. 차가 오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고 길을 건너는 그런 일이. 다행이다. 그런 귀차니즘으로 편의점이 운영되고 있다니.

고등학교 때 용돈을 줄 사람이 없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데 헌책만 사는 게 싫고 도서관은 너무 멀었다. 산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맞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6개월 정도. 그때는 시간당 임금이 1700원이었다. 학교 끝나고 꼬박 여섯 시간을 해야 3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 한 일은 물건의 위치를 알아야 해서 매대에 있는 물건을 닦았다. 핸드폰 충전하는 법도 배우고 여름에는 팥빙수도 만들었다. 조안나 아이스크림이여. 왜 그리 그대는 그렇게 딱딱해서 나의 팔을 아프게 했던가.

봉달호의 『매일 갑니다, 편의점』을 읽으며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렸다. 이 책은 직접 편의점을 운영하는 점주의 입장에서 쓰였다. 편의점의 양대 산맥이라고 하는 두 군데 중 하나인 그곳에서 일요일 빼고 일한다.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사무실이 입점해 있는 매점 형태의 편의점이라서 문을 닫을 수 있고 휴일에는 쉴 수도 있다. 원래는 토요일도 쉴 수 있는데 자신의 편의점을 잊지 말아 달라는 마케팅 전략으로 토요일 알바생을 구해서 문을 연다. 회사가 쉬면 매출이 떨어지지만 이틀을 쉬어 버리면 손님들은 다른 곳으로 가는데 그게 싫어서란다. 부지런한 사람이다.

냉장고에 음료를 채우면서 카운터에 서서 물건을 진열하면서 폐기된 도시락을 먹으면서 글을 썼단다. 상자, 영수증, 공책 등 쓸 수 있는 종이가 있다면 닥치는 대로. 한창 글발이 올라올 때 손님이 오면 약간의 실망도 있었다고 밝힌다.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이 편의점의 매출이 오르는지 행사 제품의 기준이 무엇이고 본사와 가맹점의 지분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점주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알려준다. 글을 써본 사람답게 문장은 매끄럽고 재치가 넘친다.

실제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기에 글은 더욱 실감 난다. 『매일 갑니다, 편의점』을 읽고 나면 편의점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 수칙이 생길 것이다. 하루 일이 끝나고 당 충전을 하기 위해 혹은 그냥, 편의점이 거기 있으니까 뭐에 홀린 듯이 편의점 문을 연다. 행사 제품을 둘러보고 그 편의점만 파는 디저트를 훑어본다. 그러곤 혼잣말로 한다. 혼잣말인데 다 들리는 게 문제지만. 비싸다. 이제 이 말은 하지 말아야지. 각 제품의 마진 비율을 본사와 맺는 수익 비율 구조를 알고 나니 비싸다는 말을 하면 안 되겠구나 깨닫는다.

편의점에서 겪는 다양한 일상의 풍경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이 담담하게 담겨있다. 비 오는 날과 여름을 사랑하는 봉달호 아저씨. 집에서까지 편의점에서 하는 것처럼 물건을 정리하는 편의점 인간이 된 아저씨. 돈이 되지 않지만 서비스 항목을 늘려가면서 자신만의 신념대로 편의점을 꾸려간다. 개인 편의점과 프랜차이즈 편의점의 차이를 소상히 들려주고 무턱대고 '편의점이나'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어두운 귀갓길을 밝혀주는 편의점. 그곳에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어쩌다 실수를 저지르면 침울해하는 그러다 다시 힘을 내는 봉달호들이 있다. 삶은 사는 것 자체가 정답이 될 수 있음을 편의점에서 깨달은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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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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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달이 뜨는 곳보다 높은 곳에 살게 되었다. 때론 별도 낮게 떠있다. 진짜 그렇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산과 인접해 있는 높은 곳이라 달과 별의 위치가 그렇게 보일 뿐이다. 착각이어도 이런 생각을 하면 좋다. 나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산다. 달도 별도 모두 내 아래에 있다는, 바보 같은 생각. 얼마 전에는 엄마의 기일이었다. 무얼 해보지도 못한 죽음이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반짝이는 별을 보며 물었다. 엄마, 잘 있지?

끝이 아닌 시작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며 우리의 죽음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보았다. 살아있다는 착각으로 살아가다가 죽을 때가 되면 겨우 깨닫는다. 이 삶은 내 것이 아니었어. 다시 깊은 망각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죽음. 나는 엄마가 죽기 전까지 진지하고도 깊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저 먼 곳의 슬픔. 허구의 서사 안에서 극적인 장치. 그 정도로 죽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닥치지 않으면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부정하고 외면한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게 만은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무모하게 여기고 있었다. 「스펙트럼」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를 만나고픈 열망을 그린 소설이다. 우리는 정말 이 거대한 은하계 안에 혼자인지를 물으며 떠나는 탐사선. 기체 결함으로 혼자 다른 행성에 고립된 할머니 희진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지구인 외에도 다른 존재는 있었다. 희진은 탐사선의 신호를 찾으며 무리인들과 지낸다. 죽으면 영혼이 전달되는 방식으로 다시 사는 루이들에게서 보호를 받으며 말이다. 죽음이 다른 죽음에게 전생의 삶을 넘겨 주는 방식으로 무리인들은 살아간다.

「관내분실」은 사람의 영혼을 데이터로 만들어 도서관에 보관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발상으로 쓰인 작품이다. 미래가 도래한다면 애도의 형식도 세련되게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전에 그 사람의 기억과 마음을 인덱스화해서 보관해 놓는 기술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도서관에 와서 죽은 이와 만날 수 있다. 소설은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을 담는다. 처음부터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그걸 모른 체 엄마의 역할과 의무를 강요해왔다. 무조건적인 모성애란 허위임을 「관내분실」은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그려낸다. 지민은 엄마에게 꼭 해야 할 말을 위해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를 찾아 나선다.

두 소설에서 그려내는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욕심과 미련을 두고 살지 않으려고 내내 죽으면 끝이라고 자위해왔다. 먹고 싶은 치킨을 먹고 사고 싶은 옷을 사자.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니 살아 있을 때 누려보자. 얄팍한 마음이 쌓여갔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죽은 다음에도 생은 이어질 것이라고. '영혼이 이전 개체에서 다음 개체로 이어진다고' 믿는 무리인들의 서사. 죽은 나를 찾아올 누군가를 위해 특정한 기억을 모을 수 있는 미래의 어느 시간. 김초엽은 죽음이 무섭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한 위로를 소설로 옮겨 놓았다.

꼭 지구여야만 해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해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미래 사회인 유토피아를 그린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낯설게도 사랑을 말하고 있는 소설이다. 개조인과 비개조인으로 나누어진 지구. 지구를 그렇게 만든 과학자는 정작 자신이 가진 유전적 결함을 고치지 못하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 그들만의 세상을 꾸려간다. 완벽해질 수 없는 인간들이 모인 행성에서는 성년이 되면 지구로 순례길을 떠난다. 그들 중에는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지구라는 별은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곳인가. 소피는 궁금하다. '그들은 왜 지구에 남을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 보호와 평화를 벗어나, 그렇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보고도 왜 여기가 아닌 그 세계를 선택할까?' 지구에서 돌아오지 못한 게 아닌 지구에 남아야 할 이유가 생겨 버린 진실을 목도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현재의 내가 꾸는 꿈이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격려를 받는다. 그저 개척자로 불리는 누군가가 닦아 놓은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로봇과 비슷한 신체가 되어 우주 바깥을 향해 가는 두 명의 여자 비행사를 통해 이 세계의 바깥이 아니어도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해준다. 좁아터진 지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행성과 미지의 생명체를 찾아 나서지만 지구라는 별에 무사히 안착해 살아가는 행복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듣는다. 자존감이 낮은 이유를 꼽아본다. 내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골몰했다. 여기가 아닌 거기에 주목했다. 그러니까 도착하지 않은 미래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수신하느라 현재가 주는 빛을 꺼버렸다. 지구에는 쑥스럽게도 사랑과 내내 반짝일 별이 있다. 잊어서는 안 된다.

빛의 속도가 아니어도 좋아

「공생가설」은 다른 별에서 온 존재가 지구인 아기들의 뇌 속으로 들어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다는 가설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별이 망하자 과거를 끌어안은 채 지구인들에게 이타심과 정의, 윤리적인 인간애를 가르친다. 우리 대부분은 일곱 살 이전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착상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가정이라는 기초적인 사회화 기관에서 밥 먹고 인사하고 대화하는, 타인과 교류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과거뿐인 기억을 안고 현재와 미래를 지구에서 보내기로 한 그들로 인해 지구인들은 문명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내내 종종 자주 빈번하게 계속 우울하다. 이렇게까지 부사를 남발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우울감은 깊어질 뿐이고 한 번 시작된 우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 나의 감정. 보이지도 않아 찾을 수도 없다. 형체가 있다면 쓰다듬어 주고 말려주고 아껴줄 텐데. 「감정의 물성」은 기발하다. 감정을 형상화한 제품에 대한 이야기. 공포, 우울, 설렘 등의 감정을 딴 물건을 만지면 그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물건을 보며 잡지사 에디터인 주인공은 한심해한다. 유사 과학을 이용한 사기가 아니겠느냐고. 주인공의 연인이 우울체를 사들이는 걸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감정임에도 형태를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음을 인정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그럼에도 가야 한다. 소설은 가족이 있는 행성 슬렌포니아로 가기 위해 100년 동안 동면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한 과학자의 오랜 기다림을 그리고 있다. 김초엽의 첫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 소설은 깊은 감동과 먹먹한 슬픔을 동시에 안겨준다. 자원이 풍부한 제3행성 슬렌포니아로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낸 안나는 딥프리징이라는 냉동 수면 기술을 연구했다. 지구에 남아 기술 개발에 매진하던 안나는 결국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을 타지 못했다. 그동안 연방은 먼 우주로 갈 수 있는 웜홀 항법을 찾아냈고 그렇게 되면서 슬렌포니아는 '아주 먼 우주'가 되어버렸다. 마지막 우주선을 타지 못하고 스스로 개발한 냉동 기술로 깊은 잠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긴 시간만이 남았다. 소설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다.

나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사라진다. 죽음을 유예하면서까지 사라진 이들을 만나러 가려고 하지만 기다림만이 곁에 남는다. 죽음을 향해 빛의 속도로 달려가려는 무모함으로 슬픔을 이겨낸다. 김초엽이 상상한 미래 세계에는 죽음과 아득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다. 별의 과거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미래라는 시간은 죽음이 전부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듯이. 죽음은 시간의 소멸이다. 기억의 삭제다.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미워하거나 사랑했던 시간과 기억을 가지고 떠나버린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내가 받아들인 사실에는 한 가지 희망이 존재한다. 죽음으로 시간과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다가올 미래에는 그리움이 찾아올 것이라는.

짧은 편지

엄마가 잘 지내고 있다고 믿기로 했어. 나의 남은 삶이란 엄마라는 사람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엄마가 쓰던 특유의 말투, 관용 표현, 심지어는 욕까지 그대로 따라 하고 있어. 나는 엄마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다짐까지 했는데. 지금까지 우리의 거리는 '먼 우주'였다고 한다면 이제는 아니야. 빛의 속도를 이겨내는 웜홀 항법이 도입될 거래. 여기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엄마가 있는 그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줄 거야. 깊은 잠을 잘 필요도 없어. 1147일 전으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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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보낸 시설 밖 400일의 일상
장혜영 지음 / 우드스톡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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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의 작가 장혜영은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다. 그 채널의 이름은 '생각많은 둘째언니'이다. 책을 읽어보니 알겠다. 이 언니 왜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는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그녀의 한 살 어린 동생은 중증 발달장애인이다. 어린 시절 힘들어하는 부모님을 대신에 혜영은 동생 혜정을 살뜰히 돌보왔다. 집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집에서 가만히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던 혜영이었지만 동생을 돌보는 데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주변에서는 장애가 있는 혜정을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혜정은 어쩔 수 없는 형편 때문에 열네 살이 되던 해 경기도에 있는 시설로 들어갔다. 18년 동안 혜정은 시설에서 살았다. 그동안 언니 혜영은 생각과 고민이 깊어갔다.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동생이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게 옳은 일인지 잘한 일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좋은 게 있어도 동생이 생각나 누리지 못했다. 혜정이 있던 시설에서 인권 침해가 일어나고 혜영은 탈시설을 결심한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하더니 장혜영은 글을 잘 쓴다.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긴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신이 하고 있는 많은 생각들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혜영의 생각은 내가 모르던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암묵적인 차별이 존재하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에서 혜영은 동생과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원한다.

세상이 변하길 원하며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어른이 되면』은 시설에서 동생을 데리고 나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6개월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건과 자격 앞에서 자매는 혜택을 받을 수조차 없었다. 언니 혜정이 받을 수 있는 도움이란 친구들의 지원밖에 없었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일상을 올리고 텀블벅 후원을 통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까지 국가의 도움은 없었다.

무너지지 않는다. 동생과 살아가야 하기에. 혜영은 일상을 다듬어 나간다.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받을 수 있는 도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서른이 된 혜정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어른이 되면'이었다. 혜정은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어른이 되면'이라는 말로 현재의 행복을 유예 당해야 했다. 시설에서 혜정은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보호라는 이름 아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방 두 개가 있는 집을 구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혜영과 혜정은 어른의 시간을 살아간다. 무사히 할머니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의 가사로 노래를 만들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한다. 혜영의 다정한 친구들은 기꺼이 도움을 주고 사랑을 나눈다. 혜영은 자신의 숨겨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뭉클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야기하기 바빠 남의 슬픔을 들으려 하지 않는 면이 있다.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모이면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면 세상은 바뀔 수 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편견이 사라지고 사회적 제약이 허물어지는 그날까지 언니 혜영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의 하루가 아침 햇살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기를 바란다. 단지 운이 좋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으로 누군가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 최악의 어른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한 여정이 『어른이 되면』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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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어나더커버 특별판)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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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는 시절이 있다. 그때의 기분, 바람, 생각, 냄새, 음악, 이야기가 잊히질 않아 내내 마음이 아픈 시절이.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모른척했던 어느 시간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는다. 미숙해서 미안함을 느끼고 돈이 없어서 불안으로 보냈던 그때를 용기 내어 꺼내 놓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쓰는 건 바보나 하는 일이니까. 허구라는 형식을 빌려서 쓴다.

임솔아의 『최선의 삶』은 꼭 써야만 하는 소설이었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그토록 폭력적이었고 암담했으므로. 임솔아는 그 시절을 악몽이라고 부른다. 대학 문학상을 받은 이 소설은 그토록 잊고 싶어 했던 10대의 불안과 고독의 내면을 촘촘한 언어로 다룬다. 소설을 읽기 전 당선 소감과 인터뷰를 먼저 읽었다. 소설로 들어가는 열쇠 하나를 챙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중학교 때는 가출 소녀였고, 고등학교는 중퇴했어요.' 임솔아는 자신의 10대 시절을 이렇게 요약한다.

가출을 했던 그때의 일이 『최선의 삶』의 바탕이 되었다. 위장 전입을 해서 전민동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는 주인공 '이강이'와 친구들의 이야기. 외부인과 내부인으로 나누면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려 드는 아이들 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강이의 이야기. 키우는 개와 물고기에게 자신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붙여주며 어쩔 수 없이 자라는 한 소녀의 이야기. 소설을 이루는 각각의 일화는 임솔아의 경험으로 빚어진다. 내내 잊히질 않는 악몽으로써 자리 잡는다.

성장 소설의 외피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는 무엇으로도 치장할 수 없는 불온함과 음습함이 있다. 밝고 명랑하고 모두가 꿈을 이루고 역경을 견디면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고 싶다면 『최선의 삶』은 최선이 될 수 없다. 친구들과 나누는 멋진 우정, 단란한 가족으로의 위로 또한 없다. 이토록 어둡고 암담한 성장 소설이라니. 그런데 『최선의 삶』은 끝내 말하지 못하고 거짓말로 돌려서 이야기한 성장의 진실이 담겨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임솔아, 『최선의 삶』中에서)

지나고 나면 추억과 그리움의 시간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긍정하고 인정하면서 살아갈 줄 알았다. 어쩔 수 없었음을 어쩌지 못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강이는 완벽한 울타리가 되리라고 믿었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밀려난다. 선택하지 않은 배척이었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과정의 반복 속에서 강이는 이제는 자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어른이 되어 어른으로 사는 삶이 최선이 될 수 있을까.

툭툭 끊어지고 감정을 생략한 문장은 뜨거웠다. 일부러 차갑고 건조하게 쓴 것 같은데도 『최선의 삶』은 몇 번이나 울음을 참게 만들었다. 내 마음과 의도를 왜곡하는 세상이 미워서. 어른 같지도 않은 게 어른이라면서 주접을 떨어서. 다만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용기를 가져야 하고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는 희망을 주지 않는다, 『최선의 삶』은. 진심은 파괴되기 싶고 꿈을 방패막이 삼아 살아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알려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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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년만 옷 안 사고 살아보기 -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던 그녀, 비우고 다시 채우는 1년 프로젝트에 도전하다
임다혜 지음 / 잇콘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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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과 새해에 가장 중점적으로 한 일은 집안 정리였다. 나는 세상만사 모든 일을 책으로 배웠어요 타입이기에 책을 먼저 읽었다. 오랜만에 정리와 비우기 책을 읽으니 마음이 개운해졌다. 지금 당장 정리를 하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으며 정리 의지를 다잡는다. 책을 다 읽고 정리를 시작하기 위해 머리를 묶었다. 수납함에 있는 고무줄로 질끈. 그런데 이게 웬일. 고무줄이 툭 끊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그렇다. 고무줄도 삭는 거였구나. 무려 세 개의 고무줄이 삭아서 쓰지 못하게 됐다.

아끼고 아껴두었던 분홍색 머리끈을 쓰기로 했다. 이건 다행히 쓸만했다. 역시 값이 좀 나가더라도 좋은 걸 사야 하는구나. 삭은 세 개의 고무줄은 싸서 통 째로 사 놓은 거였다. 머리를 묶고 옷 정리에 들어갔다. 버린다고 버렸는데도 나는 옷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니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뭐에 홀려 이렇게 옷을 많이 샀는지. 오래 입을 거라고 비싸고 주고 산 니트는 색이 바래있었다. 집에서 입을 실내복이 가득이어서 서랍이 안 닫힐 정도인데 지금까지 나는 상의 두 개를 번갈아가며 입고 있다.

『딱 1년만 옷 안 사고 살아보기』는 도서관에 가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정리에 관한 책을 검색해보다가 원하는 책이 도서관에 있어 빌리러 갔다. 미니멀리즘, 수납, 집안 살림 분야에 꽂혀 있었다. 제목만 놓고 보자면 무언갈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나도 1년 정도는 옷을 사지 않고 살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일을 하던 저자는 출산 후 전업주부가 되었다. 스트레스를 옷 쇼핑으로 풀던 때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들어 스스로 결심을 한다.

옷을 사지 않고 내가 가진 옷장에서 쇼핑을 한다. 일을 하던 시절에는 업무와 생활의 스트레스를 옷 쇼핑으로 풀었다. 주변 환경이 옷을 사기 좋은 환경으로 꾸며진 것도 한몫했다. 싸고 싸니까. 우리나라는 무려 사계절이나 되니까. 그만큼 옷도 많아야 하니까. 체형과 얼굴을 커버해줄 수 있는 건 옷이니까. 사야 할 이유는 많았다. 오히려 사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찾아온다. 불어나는 옷 무덤. 닫히지 않는 서랍. 옷의 무게에 쓰러지는 행거.

옷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나를 들여다봐야 한다. 내가 왜 이토록 옷에 집착하는지. 저자는 살림과 육아로 바쁜 와중에도 블로그를 시작해서 노쇼핑을 기록하고 퍼스널 컬러를 찾는 수업을 받는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가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옷은 미련이다. 옷은 과시이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궁리해서 대안으로 찾는 게 옷이라는 허울이다. 나도 그랬다. 수입에 맞지 않는 옷을 사 놓고 몇 번 입지도 않았다. 행거가 쓰러져서 얼마나 난감했던지.

종류별로 옷을 다 꺼내는 게 첫 번째. 그러다 놀라는 건 덤. 일단 놀라고 한숨. 분야별로 베스트를 뽑아서 남겨둔다. 『딱 1년만 옷 안 사고 살아보기』에서 알려주는 옷 정리 방법이다. 700벌이 넘는 옷을 골라서 173벌로 줄였다. '333 프로젝트'를 시작한 결과다. '333프로젝트란 3개월, 즉 한 계절 동안 33가지의 옷과 신발,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것이다.' 132벌이 되기까지 꾸준히 비우고 있는 중이란다. 누구라도 실행할 수 있는 옷 정리 방법이 담겨 있다. 집착과 욕심, 미련을 버리면 스르륵 열리는 서랍장을 가질 수 있다. 옷만 정리했을 뿐인데 집이 넓어지고 생활에는 불만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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