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가을 2024 소설 보다
권희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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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가을』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다 읽고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청소를 하고 정리 정돈 같은 걸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마음의 힘도 물리적인 힘도 나지 않았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동은이 대사, '이 사람과 나는 우리는 왜 매일 힘을 내야 하는 걸까 힘내는 거 힘들어'하던 대사가 머릿속을 맴돈다. 


힘들다는 사람한테 힘을 내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해서 힘들다. 해결을 해줄 수 없어 무책임하게 힘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어서. 힘이 나지 않으니 힘이 돌아올 때까지 누워 있었다. 소설의 제목만 열거해 보자면 「걷기의 활용」(난 면허도 차가 없으니 걸어 다닐 수밖에 없으니 무조건 걸어야지.), 「옮겨붙은 소망」(소망보다는 돈이 옮겨붙었으면 좋겠다, 난.) 그리고 「슬픈 마음 있는 사람」(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다른 마음 없이 슬픈 마음만 있는 것 같아.)이다.


잠깐 힘이 날 것 같다가도 으이구 내 힘 어디 갔어 도로 누워 있을 제목들이다. 특히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우리를 파멸 시킨 사람 김병철에게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는 이야기의 소설.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들의 그런 이야기를 읽고 나니 천장의 무늬를 열심히 보게 되는 것이다. 「걷기의 활용」에서는 시절 인연을 그린다. 마른 노인이 될까 봐 무섭다는 태수형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이 후회로 남는다. 


「옮겨붙은 소망」은 특이한 지점의 소설이다. 소설 분석은 나의 역할이 아니고 오로지 F스러운 감성으로 떠들자면 주인공의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해서 내 맘대로 읽었다.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이 맞을까. 그런데도 결혼을 하는 미친 사람들이 계속 생겨난다지. 협박조의 말을 계속 듣다 보니 머리가 이상해져서 조금이라도 이해가 어려우면 내 맘대로 해석해 버린다. 


소비는 죄책감이 든다. 돈을 아껴 써야 하는데 뭔가는 계속 사고 싶고. 그럴 때 책을 사는 것으로 잠깐의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의 양식이라는 명목으로 죄책감을 덜어낸다. 그리하여 내 책상에는 신간 도서들이 한가득. 언제 다 읽을 거야. 책들이 아우성치지만 나는 바로 들어줄 마음이 없다. 천천히. 마른 노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렴. 


2025년 2월은 계획대로 살지 못했고 살지 못하는 중이고(언제는 계획대로 살았나. 아니 계획을 세우기나 했나.) 다가오는 3월도 그럴 것 같은데 망했다 같은 말로 나의 삶을 단순화하는 건 게을러 보여서 다른 말을 찾을 찾아볼 때까지 책이나 읽어야징. 지금은 예소연의 소설집 『사랑과 결함』을 읽는 중.(목차 보니 소설 보다 시리즈에 실린 작품들이 여럿 있네. 왜 근데요 님아 너는 기억을 못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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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24 소설 보다
성혜령.이주혜.이희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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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이런 단어를 쓰는 게 한때는 금물이었다. 일어난 사건에는 정확한 인과 관계가 존재해야 했다. 어떻게 우연히 사고를 당하고 죽고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미워하게 된단 말인가 하는 식으로. 우연히라는 글자만 쓰면 물어 뜯겼다. 그런데 살아보니 앞뒤가 맞게 되는 인과 관계란 없더라. 원인과 결과가 커플처럼 있어야 된다고 말했던 사람들. 막장 드라마를 욕했던 사람들. 전부. 멍청이) 『소설 보다: 겨울 2024』를 읽었다. 


아니다. 서점 앱의 알림에서 내가 언제 추천해달라고 한지도 모르겠지만 관심 있어 하는 책의 신간 『소설 보다: 겨울 2024』가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장바구니에 넣어 놓고 다른 책과 함께 결제했다. 늘 그렇듯 바로 읽지는 않고 꽂아 두기만 했다. 정신이 조금 괜찮아진 걸까. 다시 이상해진 걸까. 아직 읽지 않은 소설 보다 시리즈가 줄 서 있는데 『소설 보다: 겨울 2024』를 꺼내들었다. 이렇게 되면 역순으로 읽게 되는 건데. 


그러거나 말거나 책을 펼쳤을 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문장과 서사라면 읽어보자. 순서에 집착하는 강박증 환자 짓은 하지 말자. 『소설 보다: 겨울 2024』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읽고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각기 다른 소설을 하나의 주제로 뭉뚱그리는 건 게으른 행동일 텐데. 묘하게 세 편의 소설 성혜령의 「운석」, 이주혜의 「여름 손님입니까」, 이희주 「최애의 아이」는 죽음에 근접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자살로 어안이 벙벙한 채 살아가는 백주와 오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운석을 가지고 온 동생 설경의 묘한 하루를 그린 성혜령의 「운석」이었다. 백주는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분위기를 풍겼는데도 남편을 도와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있다. 설경은 늘 자기만 힘들다고 불행하다고 듣는 이를 기 빨리게 한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남나. 목소리가 남는 건가 두 사람은 의문한다. 


이주혜의 「여름 손님입니까」는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잠깐 손님으로 머물렀던 엄마의 조카는 뒤늦게 자신의 소식을 전한다. 지극히 돌봐준 엄마를 버리고 일본으로 간 엄마의 조카, 나에게는 언니. 날짜와 시각을 정확히 알고 언니를 찾아가는데도 언니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없는 건 언니와 나는 생에 어느 순간에 호랑이보다도 무섭다던 여름 손님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집이 너무 조용해 틀어놓은 가요대제전을 보다가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보는데 화면 속 가수들은 너무 빠르고 화려했다. 카메라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가수들 그러니까 아이돌들 역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나의 움직임과 그들의 움직임이 일치하지 않았다. 왜 어른들이 가만히 누워서 《가요무대》나 《한국기행》, 《인간극장》을 보는지 알겠더라. 그곳은 무위의 세상이다.


이희주의 「최애의 아이」는 아이돌 유리를 사랑해 그이 아이를 정자 공여를 통해 낳게 된 여성 우미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한 나머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설정은 언젠가 우리가 마주하게 될 미래의 일이다. 소설의 설정이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이 이해가 될 것도 되지 않을 것도 같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읽으며 이해의 폭을 넓혀 가는 거다. 


죽음이 너무 멀리 너무 가깝게 있지도 않다. 언제든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근처에 있어서 지금은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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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죽지 않는다 - 무엇을 생각하든, 생각과는 다른 당신의 이야기
홍영아 지음 / 어떤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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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주제를 다룬 책 『그렇게 죽지 않는다』를 읽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이 몰려왔다가 사라졌다. 다른 주제도 아닌 죽음을 이야기하니 내내 슬프면 어쩌지 걱정했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걸 깨달았다. 슬픔보다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기꺼운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20년 넘게 방송 작가로 일했던 저자의 경력답게 『그렇게 죽지 않는다』는 다채로운 입말로 가독성을 높인다. 


책의 주제 분류를 보니 인문학, 인문 에세이, 철학 일반, 교양 철학으로 되어 있다. 자의적으로 분류를 하나 더 넣자면 웃픈 에세이는 어떨지. 일하다가 탈출구로(진짜 탈출할 순 없으니. 딴짓으로라도 탈출을. 언젠가 탈출하기를 바란다, 제발) 서평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그렇게 죽지 않는다』였다. 그렇게 죽지 않으면 어떻게 죽을까. 흔히 알고 겪은 죽음의 순간은 그게 아니었던 걸까. 책을 읽어가다 보면 우리가 오해하고 있던 죽음의 장면들에 다가설 수 있다. 


한국인 10명 중 3명은 암으로 죽는다. 말기암 환자들 대부분이 죽기 직전에 자신이 평생 쓴 의료비보다 2배 많은 돈을 쓴다. 항암제 복용도 다른 나라보다 3배나 많다. 말기암을 '초기암은 아닌 상태'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말기암은 치료가 아닌 '임종기암'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단 1퍼센트의 소생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인 치료를 한다. 


그렇게 될 때 환자와 가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죽지 않는다』는 말기암 환자들의 사례와 요양병원 의사, 장례지도사, 암 전문의, 중환자실 간호사들의 면담을 통해 그렇게 죽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시종일관 유쾌하게 한다. 유쾌라니.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유쾌라니. 다소 불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죽음 역시 삶의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면 무섭거나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렵고 난해해서 중간에 책을 덮으면 어쩌지 했던 근심은 온데간데없다. 한 번 책을 잡으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깊은 밤이 될 때까지 책을 읽게 된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순간이다. 저자 홍경아는 유쾌한 어조로 가다가도 시크한 분위기로 우리는 그렇게 죽지 않는다고 오해를 바로잡는다. 


죽음에 빚지지 않은 자가 없다. 살아 있는 건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여기는 천국 아니면 지옥이고 드디어 죽게 되어 다음 세계로 간다면 그 세계에서 나는 처음 살게 되는 것이라고 황당한 소리를 해본다. 삶이 너무 슬프고 견디기 어려워 먼저 떠나간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이런 위로라도 해야 버텨진다. 방송에서 미화하는 죽음이 아닌 날것의 죽음이 『그렇게 죽지 않는다』에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만 집착했다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고찰해 볼 수 있다. 연명 치료는 하지 않고 연말이 끝나기 전에 죽어야 납골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납골당 안치를 거부하고 고독사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상조 보험은 들지 않는다. 이미 죽어버렸는데 죽은 후를 걱정하는 바보가 되지는 않겠다. 그렇게 말고 이렇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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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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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금희는 남극 탐험 에세이 『나의 폴라 일지』의 마지막에서 남극에 가고 싶어 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밝힌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 그토록 남극에 가고 싶어 했지만 번번이 좌절했고 한겨레 특별 취재기자 자격을 얻어 갈 수 있었던 세상의 끝에서 다른 이유는 없고 오직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한 순정한 마음 하나였던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인간이 갈 수 있는 최선의 미지의 땅 남극에서 김금희는 한 달을 살아낸다. 가는 여정도 복잡하고 오래 걸렸다. 열몇 시간의 비행이라니 그리고 대기 다시 열몇 시간. 대체 그곳이 어떻길래. 고달프고 어려운 여정을 감수하고서라도 가고 싶어 했던 것일까. 『나의 폴라 일지』를 받아 들고 그 안에 든 김금희 소설가가 직접 찍은 한 장의 사진엽서를 마주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귀여운 옆모습을 가진 펭귄들을 찍은 사진엽서. 그 뒤에 쓰인 펭귄의 얼굴만큼이나 귀여운 소설가의 글씨. 나는 그 엽서를 책상의 좋은 자리에 자석으로 붙여 두었다. 이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남극의 차가운 바람을 상상하고 싶어서. 떠나지 못하는 자는 떠날 수 있었던 자의 경험을 소중하게 받아들인다. 그걸로도 됐다는 생각이다. 남극은. 


남극을 가는 자로서 소설가는 어떤 책을 챙길까. 『나의 폴라 일지』의 처음 부분에서 그 답을 알 수 있다. 수화물의 무게 때문에 챙긴 책은 단 두 권. 아쉬울 수 있지만 남극의 세종과학 기지에는 도서관이 있단다. 그곳에 소설가는 자신의 쓴 책을 한 권 남기고 올 예정이다. 책을 읽을 수나 있을까. 극한의 추위와 블리자드가 있는 곳에서. 세종 기지 연구동 218호의 자신의 방에서 남극의 추위를 느끼 하늘을 보며 루쉰과 남극 일기를 읽는다. 


세상의 끝이어도 비록 사람이라고는 연구원들 밖에 없어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아니 펭귄들이 사는 세상에 사람들이 잠깐 머물고 있는 세상이다. 소설가는 한 달의 체류 기간 동안 다양한 펭귄과 남극 생물을 만난다. 호기심 많은 펭귄은 기지 안으로 들어와 소설가의 카메라에 포착된다. 물개, 해표, 스쿠아, 옆새우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래까지 엄혹한 추위와 함께 살아가는 비인간들. 


소설가의 부모님은 남극에 가는 딸을 이해하지 못하고(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에) 그는 하지 말아야 할 타인 비교를 해가며 남극에 온다. 체류 기간이 끝날 때쯤 딸은 아버지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는다. 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병원을 간다. 그곳에서 '한두 번쯤 울기야 했겠지만 아직 진짜로 울지는 않았을 사람들'을 만난다. 지구 마지막 희망, 자원의 보고 이런 수식어인 남극에서의 생활은 끝나고 다시 일상인으로서 돌아온다. 


남극에 가보고 싶어 했고 남극에 갔기 때문에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는 마음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슬픈 일들을 견딜 수 있다. 아버지의 병명이 나오고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리라는 낙관을 가질 수 있다. 주권도 화폐도 국경도 없는 곳에서 살다가 왔기에. 남극에서 보낸 시간은 자신 앞에 놓인 비관과 부정함을 다른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를 매일 고민해도 바뀌는 건 없다. 「너무 한낮의 연애」속 양희의 말 그저 나무 같은 거나 봐요 그리고 사랑하죠, 오늘도를 떠올려 본다. 어디로 가지도 않고 한자리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면 나의 고통은 대수롭지 않아질 수 있다지 하는 것이다. 때론 멍청이 같이 우직한 나무를 보고 있으면 세상의 고민은 우스워지는 것이다. 사랑하죠,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또 나무를 보면 괜찮아진다. 오늘도 나는 사랑하면서 나무를 본다. 


세계가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잠깐 가슴에 품고서 나의 일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안정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온다. 생존과 안전이라는 두 가지만을 내내 생각하며 지내다 보면 한국에서의 고민은 이겨낼 수 있다는 담담함을 장착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다들 병원 대기실 의자에 긴 시간 동안 앉아 있지 않기를 빈다. 그곳에 앉아 있다 보면 언제 울어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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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불꽃을 쫓다 설자은 시리즈 2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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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추리소설 시리즈 설자은 두 번째 이야기가 돌아왔다. 첫 번째 시리즈인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읽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라니는 아니고 엄청 기다렸단 말이지. 『설자은, 불꽃을 쫓다』의 제목대로 표지는 강렬한 붉은색이다. 망해가는 집안을 살리기 위해 여장 남자로 사는 자은의 본격적인 사건 추리가 펼쳐진다. 


왕의 부름을 받으며 매가 그려진 칼을 하사받은 자은. 집사부의 대사로서 금성에서 일어나는 해괴한 사건들의 진상에 다가가는 자은. 이미 망해버린 나라 백제 유민으로서 자은의 보호막을 자처하는 목인곤. 자은과 인곤은 서로를 의지하고 걱정하며 이상한 사건들을 해결한다. 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설자은, 불꽃을 쫓다』는 두 사람의 성장담 같은 소설이다. 


두 사람의 활약을 문장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마치 내 눈앞에서 활극을 벌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베어야 할 때가 있으면 베어야 한다는 왕의 명령으로 받은 칼로 자은은 금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한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자 한다. 식객 인곤과 말갈인 삼 형제와 함께 말이다. 영민한 동생 도은의 도움도 받으면서. 


『설자은, 불꽃을 쫓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성 캐릭터의 독보적인 활약상이다. 남자로 위장했지만 주인공 자은은 원래 여자 미은이었다. 두 형의 죽음으로 첫째가 된 호은은 집안을 일으키려는 능동성은 없이 여동생들에게 얹혀 가는 형국이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예측 불가하지만 호은은 『설자은, 불꽃을 쫓다』에서만큼은 형편없는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설자은, 불꽃을 쫓다』에서 남성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은폐하지 않는다. 인곤과 말갈인 삼 형제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사건의 중심에 자은과 도은, 산아라는 여성이 주축으로 움직이면서 남성 캐릭터들이 그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한다. 최근에 보기 시작한 《옥씨부인전》은 조선 시대의 외지부(변호사)라는 소재로 노비 구덕이 양반 옥태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렸다. 


여성 캐릭터들이 두둥 등장하고 서사 안에서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극을 이끌어 가고 있다. 주변인이 아닌 주인공으로. 불귀신 지귀가 나타나 더러운 금성을 정화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금성 곳곳에서 불이 나는 이야기 「화마의 고삐」를 시작으로 탑돌이를 하는 도은에게 비단으로 싸인 돌이 던져지는 「탑돌이의 밤」, 용의 가면을 쓴 자들이 여자들을 잡아가는 「용왕의 아들들」까지 금성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자은과 친구들은 풀어 나간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여운이 깊다. 아무것에도 욕심내지 않고 살기란 힘들다. 자은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칼에 피를 묻혀도 봤다. 그런 그가 아무것도 기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이야기는 계속된다. 통일신라라 칭했지만 실상 백성조차 융합하지 못하며 천년 왕국을 꿈꾸는 나라 안에서 피를 보지 않기란 어렵기에 설자은 시리즈는 다음권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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