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떡볶이 - '이건 맛있는 떡볶이다'라는 확신이 왔다 아무튼 시리즈 25
요조 (Yozoh) 지음 / 위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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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떡볶이집은 시장 골목을 돌고 돌아야 나왔다. 돈이 많지 않은 우리는 일 인분을 시켜서 넷이 나눠 먹었다. 달고 짭조름한 맛이었다. 파와 어묵, 쌀떡이 들어 있었다.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갔다. 4인방이 고등학교를 따로 가면서 2인방이 되었고 어느덧 나 혼자 남았다. 혼자 시장 골목에 앉아 먹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나중에 가보았지만 그 집은 사라졌다. 아련한 추억과 애달픈 그리움만 남았다.

떡볶이로도 글을 써서 책을 낼 수 있구나. '아무튼 시리즈'는 아무튼 대단하다. 요조는 떡볶이를 좋아한단다. 아무튼 시리즈 제안을 받고서 장강명이 떡볶이에 대해 쓸 것을 추천한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요조는 떡볶이에 대한 기억을 그러모아 『아무튼, 떡볶이』를 써낸다. 대단하다. 무언갈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좋아하면 뭐가 돼도 되는구나. 끈기와 집념을 가진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에게 떡볶이는 음, 그러니까 꼭 그렇진 않지만 자제해야 한다. 아시다시피 떡볶이는 한 입 베어 물면 평화와 안정과 치유의 맛을 선사하는지라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안된다. 멈출 수가 없는 맛. 요조의 말처럼 떡이 불어도 맛있고 떡이 불지 않아도 더 맛있다. 요조가 펼쳐놓는 떡볶이 예찬을 담은 『아무튼, 떡볶이』는 아련한 그 시간과 장소를 불러온다.

누구에게나 분식집에서 먹던 떡볶이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구점 안에서도 떡볶이를 먹었다. 고추장과 케첩 맛이 나는 백 원에 몇 개씩 하던 떡볶이를 서서 열정적으로 흡입했던 기억. 지금은 배달 음식의 정상에서 치킨과 싸우고 있지만 떡볶이는 바람 불고 사람 많은 곳에서 먹어야 맛도 좋다. 『아무튼, 떡볶이』에 나오는 떡볶이집을 한 군데씩 정해 가보고 싶다. 떡볶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일보다 요조의 이야기대로 떡볶이를 먹어야 하는데 TMI를 남발하자면 지금의 나는 다이어터.

『아무튼, 떡볶이』에서 인상 깊었던 챕터는 「'난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목부터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아닌가. 편안하고 유머가 있는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재치와 유머는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타고나야 한다. 요조라는 사람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가 쓰는 글에서 유머를 탑재한 사람이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떡볶이의 떡볶이에 의한 떡볶이를 위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 요조. 『아무튼, 떡볶이』를 쓴 이유는 출판사 대표가 원고가 마무리되면 가자던 '코펜하겐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의미가 있어도 없어도 모든 존재는 가치가 있다. 코펜하겐이든 미미네든 떡정이든 영스넥이든 왜 그곳일까 하는 의미를 찾는 것보다 그곳에 떡볶이가 있었다가 한 시절을 살게 한다. 떡볶이가 있다. 떡볶이를 먹는다. 가게 이름도 없었던 그 시절의 시장 떡볶이집. 허기를 급하게 잠재워주고 집에 가기 싫어하는 나를 달래던 따뜻한 매운맛. 어설픈 요리 실력으로 가끔 떡볶이를 해 먹지만 그 맛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살아간다.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도록 노력하면서. 누군가는 떡볶이를 먹고 누군가는 떡볶이를 먹었던 기록을 읽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편의점에도 떡볶이를 판다. 뭐? 다 알고 있다고? 그렇구나. 나만 몰랐구나. 얼마 전에 편의점에서 파는 컵 떡볶이를 먹고 충격을 받았다. 너무 맛있어서. 강렬한 MSG의 맛. 역시 조미료는 옳다. 회환을 가지고 각자의 떡볶이를 먹으며 오늘을 살아가면 된다. 오래오래 우리 버텨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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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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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문학동네 3기를 신청했다. 1기와 2기도 함께 했으므로. 한 번 시작한 건 끝까지 가자는 주의이므로. 문 앞에 웰컴 키트가 배송 되었다는 문자를 보고 설렜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 보았다. 선택 도서 한 권을 포함해 총 세 권의 책을 받을 수 있다. 맨 먼저 열어본 건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었다. 다른 때보다 특별한 건 책 앞장에 수상을 한 일곱 명의 작가 사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일이 책에다 직접 한 건가. 아니면 프린트 한 건가. 이런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나. 얼른 책이나 읽으쇼.

한 집안에 한 명씩 있다는 악역의 역사를 훑어가는 강화길의 시선은 이채롭다. 「음복(飮福)」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명절이나 가족 행사 때 모인 그녀들의 악담의 기원은 어디서부터 인지를. 소설은 제삿날 모인 가족의 풍경을 묘사한다. 이제 막 결혼을 한 나의 입장에서 그녀들의 모습은 이상하게 보이다가 후반부에 가서야 전복된다. 나의 집안에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되고 억눌린 역사를 가진 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어이 떠올리고야 마는 것이다.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는 이상한 열망을 응시했다. 나보다 앞서가는 자에게 바라는 부디 지치지 않도록 염원하는 다급한 부탁. 글을 쓰는 자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오래 고민한 흔적이 소설에서 엿보인다. 여성 화자를 전면으로 내세워 그들이 불안해하는 현재를 통해 최은영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해 보고 있다. 독자가 쉽게 소설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드는 편안한 문체는 고독한 마음을 쓰다듬어 준다.

「그런 생활」에서 드디어 새로운 어머니를 만났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어머니상을 김봉곤은 날렵하게 던져 버린다. 아들이 게이임을 뒤늦게 알아챈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설득 시키는 게 아니라 어머니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방치하는 아들. 두 모자의 발랄한 일상기는 '그런 생활'이 남들이 말하는 '그런 생활'이 아닌 평범한 생활이 되도록 다 같이 노력하자고 독려하며 신이 나게 끝난다.

임신 중지라는 소재를 날렵하고 밀도 있게 담아낸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 화자가 지칭하는 '당신'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게 만든다. 여성의 선택권이 존중 받아야 한다는 투박한 발언 보다 소설로써 담아낸 목소리는 깊은 울림을 준다. 여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느냐보다는 여성이기에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김초엽의 「인지 공간」은 단체로 기억을 공유하고 보존하는 미래를 그린다. 집단의 기억만이 남아 살아가는 미래에서 개인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장류진의 소설을 읽으면 모든 일에 있어 근거 없는 긍정이 생겨난다. 무책임하고 대책 없는 자신감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맘 카페에서 알게 된 여성 운전 연수 강사님과의 시간을 그린 「연수」는 결말에 이르게 되면 '나 잘 할 수 있는 거지?'라는 터무니없는 활기에 휩싸인다. 운전 빼고 인생에 있어 단 한 번도 실패가 없던 '나'가 운전 연수를 통해 어쩌면 모르고 지나쳤을 혐오와 배제를 경험하면서 활달한 내일로 나아간다.

장희원의 「우리〔畜舍〕의 환대」는 국경을 넘어 이룩한 새로운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혈육으로 맺어진 고리타분한 가족주의가 아닌 국경, 인종, 성별, 나이를 초월해서 형성한 가족은 기존의 관념을 파괴한다. 우리 옆에 놓인 한자는 가축의 집인 축사를 의미하는데 이는 소설 속 부모인 재현과 아내의 시선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생각의 형태이다. 유학 간 아들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의 대학을 간다고 해서 부부는 아들을 만나러 간다. 아들이 사는 곳에서 이룩한 가정의 형태에 낯섦과 기이함을 느낀다.

일곱 편의 소설이 담긴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다 읽고 다시 한번 책의 앞 장을 보았다. 봄에 대한 찬사 혹은 바람. 봄은 그러니까 아주 희미한 빛이었다가 그런 생활로 이어지면서 다른 세계에서도 마주해야 할 우리의 환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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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초록 - 어쩌면 나의 40대에 대한 이야기
노석미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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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에 이사를 했다. 충동적으로 결정했으나 오랫동안 꿈꾸던 일이었다.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지 않는 곳에 정착해 살고 싶다는 바람. 집을 알아보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부동산 업자를 만난 일이 시작이었다. 나는 한 곳에 전화를 했는데 부동산 사무소 두 군데에서 나왔다. 공동 중개라는 걸 몰랐다. 하나의 매물을 가지고 두 명의 중개업자가 일을 주선하는 것이었다. 속전속결로 집을 보여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동에 나온 집을 모두 보았다. 마음에 드는 집이 있었는데 결국 계약은 하지 못했다.

노석미의 에세이 『매우 초록』에도 비슷한 경험이 나온다. 작업실 겸 주거 공간을 짓기 위해 땅을 보러 부동산 업자와 돌아다닌다. 다들 알겠지만 문제는 돈이다. 몇 년 전에 살던 곳에 가보았지만 그곳은 고속국도가 들어서면서 땅값이 천정부지로 높아져 있었다. 노석미는 포기하지 않고 경기도와 강원도 사이에 있는 양평 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곳에서 소설을 쓰다 나온 것 같은 모습의 부동산 업자를 만난다. 그이와 땅을 보러 다닌다. 사람이 땅을 선택하는 게 아닌 땅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운명론적 결론으로 땅을 구해 집을 짓는다.

당시 노석미의 나이 38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람이 땅을 산다고 해서 땅주인이 조금 놀라워했다. 부동산 업자는 생각보다 어리지 않다고 말하며 계약을 체결했다. 원래 그 땅은 다른 사람이 살 계획이었다. 그 사람이 오다가 사고가 나서 계약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그 중간에 노석미가 땅을 사겠다고 한 것이다. 땅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 안 믿을 사람은 안 믿고 믿을 사람을 믿는 그 말을 계시처럼 받아들며 새로운 삶의 시작을 연다.

시골에 살면 그것도 산과 가까운 곳에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매우 초록』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다양한 짐승들을 만날 수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꾸릴 수 있는 정원 텃밭에서 싱싱한 야채를 직접 재배해 먹을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노동의 양이 꽤 많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따로 난방 장치도 해야 한다. 기름을 무한정 뗄 수 없어 노석미는 중고로 장작 난로를 산다. 연료는 당연히 나무.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건 무리(주인이 있는 산이기 때문). 절단목을 사서 도끼로 쪼갬목을 만들어 쓴다.

혼자 사는 삶. 마을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이야기. 야생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고 집에 사는 고양이와 정을 나누는 하루.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담백한 글과 그림으로 표현된다, 『매우 초록』은. 전원생활의 낭만을 과장 되게 예찬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편안한 문체로 이야기한다. 버스 시간을 몰라 외국인 며느리에게 도움을 받고 작은 도서관에 가서 글을 쓰며 희망 도서를 신청한다.

이사를 온 뒤의 나의 삶과 비슷해서 깊은 공감을 했다. 여름에 문을 열어 놓으면 풀벌레 우는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오고 밤에는 인적이 드물다. 읍과 리로 표기된 주소를 가지게 되었고 걸어서 몇 분만 가면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번화가가 나온다. 어디에서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깊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기만 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가야겠다는 충만한 의지가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의지를 바탕으로 사는 곳을 바꿔보기로. 결과를 말하자면 사는 곳이 바뀌어도 나의 마음을 챙기고 다독이지 않으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소유하는 집이 아닌 사는 집으로써 『매우 초록』에 담긴 집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준다. 집의 형태가 어떻든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면서 사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는 삶. 혼자 있는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소중한 1인으로 대접받는 삶'을 이어 나가는 것. 익숙한 길은 무섭지 않음을 깨닫는 것.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면 환경을 바꿔 다른 삶을 꾸리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책을 찾아 읽었으면 한다. 『매우 초록』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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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눈부시게! - 김보통의 내 멋대로 고민 상담
김보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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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얗게 불태웠다. 이번 주는 내내 그랬다. 딱히 바쁜 일도 없으면서 바쁜 척하느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 몸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봐야 돌아오는 건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무거운 마음뿐. 잘 보이고 싶고 좋은 사람이고 싶어 더 긴장한다. 아닌 건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집에 와서 한숨만 쉬고 잠 못 이룬다. 이런 쪼다, 바보.

김보통의 『살아, 눈부시게』를 읽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내 곁엔 책이 있었다. 고독이와 미묘, 노골이가 한 마디씩 툭툭 건네며 나를 위로한다. '내 멋대로 고민 상담소'라는 타이틀이 붙은 『살아, 눈부시게』를 읽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분명 심각한 고민이다. 어렸을 때 받은 상처와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 현재의 고통을 말하면 고독이가 미묘가 노골이가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핵심을 찔러서 답을 해준다.

포기하고 싶다는 이야기에 포기해도 된다고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 쉬는 건 포기가 아니라고. 불안해서 잠으로 도피한다는 고민자에게는 불안할 때 잠을 자는 건 도피가 아닌 충전이라고. 무겁고 아픈 고민을 듣고는 어떤 답을 해줘야 할까 싶은데도 재치 넘치는 말로써 마음을 녹이는 웃음과 다정함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다. 도망쳐도 된다고. 아프면 꼭 병원에 가야 한다고도 말한다.

『살아, 눈부시게』에 담겨 있는 슬픔의 총량을 합치면 내가 겪는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위로를 받는 게 아니다. 감당하지 못할 슬픔임에도 살고 싶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선뜻 꺼내는 용기 때문에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털 나는데. 글이 많은 책도 아닌데 쉽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어떤 말에는 웃음을 어떤 말에는 눈물이 났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자. 주눅 들지 말자. 할 말은 꼭 하고 살자. 수없이 다짐해도 막상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든 채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시간들. 도저히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은 순간들. 그럴 때 김보통의 『살아, 눈부시게』를 곁에 두고 내내 읽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순서대로. 그다음부터는 손이 가는 페이지를 펼쳐서. 망가지지 않고 방치하지도 않은 미래에 나를 데려다 놓기 위해서라도.

꿈과 목표라는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요즘이다.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이에게 화를 내고 따지고 싶다. 넌 뭐 그렇게 잘났냐. 『살아, 눈부시게』의 리뷰인 척 구질구질하게 힘들고 슬퍼서 죽겠다는 이야기를 길게도 하고 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징징대고 있다. 고독이는 미묘는 노골이는 이런 나를 한심해 하지 않을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임을 아니까. 후회는 해도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아니까.

가끔 나에게 시련을 주는 이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느 하루가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인생의 의미를 따지기보다 그냥 살아가야 한다는 고독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일기를 쓰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수고했어, 오늘의 나 자신. 쓰담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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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0 소설 보다
김혜진.장류진.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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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봄 2020』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읽다가 가격을 확인했다. '값 3.500원.' 이거 이거 너무 싸잖아. 아직 커피 한 잔도 안 되는 돈으로 책 한 권을 사서 읽을 수 있다니. 감격. 부지런한 누군가는 각 계절에 나오는 계간지를 사서 읽겠지만 나는 한 계절이 끝나갈 때쯤 나오는 『소설 보다』 시리즈를 산다. '이 계절의 소설'을 대표하는 세 편을 읽는 것으로 한국 문학과 함께 한다는 기분을 느낀다.

김혜진의 「3구역, 1구역」은 현대문학 핀시리즈로 나온 『불과 나의 자서전』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다룬다. 재개발이 된다, 안 된다를 몇 번씩이나 반복 되어온 구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세입자로서 3구역에 들어온 '나'는 동네 길고양이 태비를 돌본다. 고양이 캔을 사다가 바닥에 두는 것이 전부이지만. 태비가 음식 먹는 것을 바라보다 '너'를 만난다. 부동산 중개 사무소에서 일하는 '너'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타자를 응시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관조임을 「3구역, 1구역」은 말한다. 가급적 판단을 하지 않을 것.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갖다 던져 버려. 장류진은 「펀펀 페스티벌」에서 쓸쓸한데 비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씁쓸해지는 뒷맛을 남기며 그렇게 말한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펼쳐지는 쇼가 가미된 합숙 면접의 풍경을 그리는 「펀펀 페스티벌」. 장류진은 인물을 그리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별난 인물이 아닌데 옆에 앞에 있어서 내 심기를 툭툭 건드리는 인간을 소설로 데리고 와 시원하게 위선을 까발린다. 대리 만족을 느낀다. 나는 못 까지만 장류진은 까주니 사이다 한 잔을 들이켠 듯한 기분으로 소설을 읽어 나간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 이런 사실 만으로도 행복해진다. 한정현의 「오늘의 일기예보」는 단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오늘과 내일을 꿈꾸는 소설이다. 젠더 문제, 고문 피해자, 비정규직, 비혼의 이야기를 모두 담지만 무겁거나 외면하게 만들지 않는 담백함을 가지고 있다. 어제의 고통을 묵과하지 않은 채 오늘의 소박한 행복을 바라는 「오늘의 일기예보」 속 인물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겨울은 외로웠고 봄은. 우리의 봄은 서로를 다독이고 안아 주어야 한다. 슬픔의 봄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우리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소설 보다 봄 2020』에서 만난 우리들. 인간은 다면적이다. 집을 사고팔아 차익을 남기면서 길고양이를 구하는 「3구역, 1구역」의 '너'와 스펙 쌓으려고 온갖 개고생을 하고서도 노래 부를 때 쪼를 극복하지 못해 좌절하는 「펀펀 페스티벌」의 '지원', 시를 강의하는 고모와 살면서 아름다움을 희망하는 '보나'까지. 소설은 인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며 봄의 문을 연다.

우리의 봄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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