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농담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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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종종 술 마시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한다. 그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떨리는 손을 감추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더 마시려 애쓰고, 술 마시는 걸 자책하고 숨기려다 남몰래 마시며 불안한 안도감을 느끼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술 없이 부끄러움에 맞서기 싫을 때, 세계가 짐짝 같은 무게로 업혀올 때, 오래된 관계를 내가 다 망쳤다 싶을 때, 아무리 달리 보려고 해도 내 마음이 하찮을 때, 가까운 사람에 대한 연민과 실망으로 마음이 그을릴 때, 한마디로 제정신인 걸 참을 수 없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편혜영, 『술과 농담』, 「몰沒」中에서)



소설 가르치는 선생은 수업이 끝나면 일찍 가시는 분이었다. 사는 곳이 멀어서였다. 뒤풀이를 가질 새도 없었다. 소설 창작론 수업이 종강했을 때였다. 그때는 웬일인지 모여서 차를 마시자고 했다. 차를? 술도 아니고 차를? 이해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선생은 한동안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했다. 간간이 수업 시간에 술을 마셨을 때와 끊었을 때의 시절을 토막 내서 들려주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질문은 하지 않았다.


차를 마셨다. 선생은. 그러나 우리는 생맥주를 마셨다. 진정한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술을 마시는 자들 곁에서 참고 마시지 않는 거라고 들었다. 선생은 진정 중독에서 벗어난 듯 차만을 홀짝였다. 우리들 앞에 있는 술잔을 들여다보는 눈이 슬퍼 보이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술을 마시지 않는 것과 마시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실로 거대했다. 선생은 둘 다였다. 마시지 않으면서 마시지 못하는 것. 뭐가 더 안타까울까 저울질해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자업자득인 게 분명했으니까.


술에 관해 말해보라고 하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술잔을 바라보던 선생의 표정이 떠오를 뿐이다. 남들은 취미 부자라고 하면서 다종다양한 취미를 섭렵한다던데 나는 그 흔한 혼술의 취미도 없다. 마트에 가면 가지 않는 코너는 주류 코너. 언제부터인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사회생활 초기에는 뭘 몰라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마셨는데 곧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는 집에만 틀어박혔다. 초코 우유와 탄산음료를 즐겨 마시며 살이 피둥피둥 쪘다.


완전 최애 작가들의 글 모음집 『술과 농담』은 술에 관한 각자의 기억 혹은 약간의 허구를 가미한 서사가 들어 있다. 처음에는 에세이로 읽었다가 중간에는 소설로 읽고 나중에는 시로 읽어 버리는 『술과 농담』. 편혜영의 글에서 술과 불화한 듯한 낌새를 눈치채기도 하고 조해진은 다양한 술의 종류를 빌려와 술의 나날을 펼쳐 놓는다. 조해진의 산문을 읽어본 적 없어서 『술과 농담』 속 조해진의 글을 흡수하듯 읽어버렸다. 내내 술을 마시며 소설을 쓴다니.


김나영은 육아 퇴근 후 마시는 맥주를 끊었다고 한다. 배가 나와서. 이주란의 글을 읽을 때 나는 소설로 읽었다. 그러다 '주란'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진짜 이주란 이야기를 이주란이 쓴 건가 의심하다가 그런가 보다 하고 읽게 된다. 그런가 보다, 가 중요하다. 이주란의 글은. 어떤 일상은 마음이 아파서 사실로써 대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주란은 그런 순간을 쓴다. 그래서 진짜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소설로 읽는다.


한유주의 「단 한 번 본」을 읽고 이제는 한유주를 읽어도 괜찮겠다는 안심을 한다. 이장욱의 시 같은 글을 끝으로 『술과 농담』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술도 못 마시고 농담은커녕 농담 비슷한 걸 시도했다가 분위기만 싸하게 만드는 나란 인간은 술과 농담을 글로 배우고 있다. 술에 취한 기분이 싫고 술이 깬 다음날은 더더욱 기분이 더러워져 술을 마시지 않는다. 유쾌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 농담을 시도했다가 상대가 정색을 하는 바람에 울면서 집에 온 적도 있다. 술과 농담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하고 싶지 않다. 그리하여 그것에 관해서는 읽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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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4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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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일어나자마자 치킨집에 전화를 걸었다. 보통 배달 앱으로 주문하는데 생각해 보니 치킨집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배달비도 좀 아까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해놓고 가져가기로 했다. 메뉴를 집중해서 보면서(문제를 이렇게 집중해서 보란 말이다. 그랬으면 벌써 합격하고 남았겠다.) 배달비 아끼니까 사이드 메뉴 시켜도 되겠지,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뿌링클 한 마리랑 치즈볼 오천 원짜리로 포장해 주세요 말했다.


진짜 집이랑 가까운 곳에 치킨집이 있었다. 아직 오후인데도 매장에는 술 손님들이 있었다. 맞다.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지. 늦게까지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오후에 모이는 거구나.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네. 천국의 향기가 이런 걸까 하는 냄새를 풍기는 치킨을 소중히 받아들고 마트에도 갔다. 아무래도 콜라 한 캔으로는 탄산이 부족하니까. 탄산음료를 세 개 사고 바로 옆에 있는 커피집에 가서 커피도 샀다. 어른의 삶이란 이런 걸까. 하는 기분에 취해 집으로 올라와 치킨을 뜯었다.


망설이는 마음 없이 물건을 살 때만 느끼는 어른의 기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비애 같아서 서글프지만 그래도 좋고 행복하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지만 굳이 가지 않는 게으름뱅이의 하루는 이렇게 먹고 자고 읽으며 지나간다. 장류진의 장편 소설 『달까지 가자』를 읽으며 지금의 나의 삶도 나쁘지 않구나 용기를 얻는다.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 문화·트렌드에 약한 편이다. 유행하는 게 있어도 모르고 유행이 지나도 모르며 살아간다.


남들이 좋다고 재미있다고 여기는 걸 뒤늦게 알고 뒤늦게 즐긴다. 드라마, 영화, 투자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 편이다. 단 한 가지, 책은 제외한다. 신간이 나오면 바로 사서 읽는 걸 좋아한다. 예전에는 책 사면 주는 굿즈에 미쳐서 책을 사 나르는 바람에 책장이 포화 상태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요즘 유행에 대해 실감한다. 『달까지 가자』는 마론 제과에 다니는 여성 3인방이 등장한다. 공채가 아닌 루트로 들어온 '비공채 출신 3인방'의 가상화폐 투자기를 그리고 있다.


나이, 출신, 학력도 다른 그들이 그 어렵다는 회사 내에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서로가 서로를 보자마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교사, 공무원 출신이 집안에 없고 재산을 상속받아 임대 수익을 올리며 살아가리라는 기대가 없는 사람들. 다해, 은상, 지송은 단채 채팅방을 만들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점심시간에 콩나물국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하루하루 성실한 듯 살아간다. 어느 날 은상 언니의 표정이 이상하게 달뜨고 미친 걸까 싶게 기뻐 보였다.


이 언니가 세상에 '케이크를 인당 하나씩' 시키라는 거 아닌가. 처음엔 남자가 생겼나 했는데 은상 언니는 진지하게 가상 화폐 이야기를 한다. 블록체인 어쩌고 암호화폐 어쩌고 하면서 외계어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이 지금 '이더리움'을 발목에 사서 투자 중이라고. 이더리움 한 개 가격이 13,950인데 이게 100만 원, 200만 원까지 오를 수 있다고. 다해, 지송은 은상 언니의 말을 믿지 못한다. 가상화폐 그거 잘못해서 패가망신 한 사람의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들어 알고 있는데.


다해는 고민한다. 돈에 관해 밝은 은상 언니 아니던가. 회사에서 '강은상회'라는 잡화점을 열어 소소한 이윤을 올리던 은상 언니. 번 돈으로 아이패드 사고 학자금 대출 갚는 모습을 보니 다해는 적금을 부어 이더리움에 투자한다. 끝까지 버티던 지송 역시 코인 열차에 탑승한다. 『달까지 가자』는 대한민국의 현실, 세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흙수저 3인방이 펼치는 가상화폐 투자기를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슬픔을 약간의 유머와 한숨을 버무려 포착해낸다.


끝까지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얼마나 사치인 시대인지. 그런 고민은 회사에 들어가야 할 수 있는 고민인 것을. 회사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매일매일을 자존감 깎아 먹으며 버티는 청년들-나 포함해서-은 무엇에 기대야 할까. 『달까지 가자』의 3인방은 코인에 기대를 건다. 남들이 카카오 주식, 가상 화폐 이야기할 때는 나는 카카오 프렌즈 최고의 인기쟁이 캐릭터 라이언 굿즈 사 모으기 바빴고 채굴이란 게 진짜 어디 가서 캐야 하는 건가 의문했다.


다해가 끝까지 회사에 남기로 한 결말이 마음에 든다. 우스갯소리로 로또 1등 되면 어떻게 할까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도 나는 과거에 다니던 곳에 계속 다닌다고 했었다. 1등 수령금은 적금 통장에 넣어둔 채 이자 받아 가며 '먹고 싶은 케이크가 두 개일 때는 다 시켜서 먹는 삶' 정도로 만족하면서. 아직까지 로또 한 장 사 본 적 없는 주제에 그런 이야기를 잘도 했다. '돈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간다는 속성'을 은상은 깨닫는다. 과연 그럴까.


『달까지 가자』를 읽고 투자 쉽네. 나도 한 번 벌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소설은 소설일 뿐. 오해하지 말자. 투자 성공기를 그리는 소설이 아니다. 마론 제과 비공채 3인방이 코인 열차에 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비꼬고 나름 투자 수익을 올렸지만 회사의 거대 비밀인 제빙기가 8층에만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으로 기뻐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겠다고 다짐하는 인물의 현실성을 악착같이 그려낸 소설이다.


당신은 그 정도로 만족해라는 말을 들으면 심술을 부리는 은상. 0.5도 아니고 0.2 정도의 방 크기가 넓어진 것에 만족하는 다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무한 행복을 느끼는 지송. 이런 그들에게 좌절이 아닌 기쁨을 주는 소설가가 고마울 지경의 소설 『달까지 가자』. 나 소설 읽으면서 쫄렸다. 그들이 빚까지 내서 투자한 이더리움이 떡락할까봐. 이런 투자는 해롭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일해서 돈 버세요,라는 수기 체험기 마지막 단락 같은 교훈 주면 책 던져버리려고 했다.(말만 그래요, 도서관 책을 어떻게 던지겠습니까. 비유입니다.)


빚 안 지고 수익 내서 퇴사하고 사업하고 집 옮기는 결말이라서 그래도 회사는 다닌다는 현실적인 결말이라서 『달까지 가자』는 꼭 읽어봤으면 하는 소설이 됐다. 치킨 시킬 때 사이드 메뉴 추가할 수 있고 300원 비싼 커피 시키고 세일할 때 사는 거지만 작고 소중한 사이즈의 케이크를 세 개씩이나 살 수 있어서 통장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누군가들의 성공기를 읽는 시간이 있어서 나의 소소한 실패가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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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달콤한 직업 - 소설가의 모험, 돈키호테의 식탁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천운영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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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완선의 식탁을 보고 환호를 지른 적이 있다. 화려한 집 안의 분위기와는 다른 조촐한 식탁의 모습이었다. 3분 카레와 조미김, 쌀밥이 놓여 있었다. 요리를 즐겨 하지 않는다고 했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물이 좋지 않다고. 그렇게 먹으면서 맛있어 했다. 나 역시 김, 김치, 3분 카레만 있어도 맛있게 먹는다. 요즘 꽂힌 음식은 깍두기. 3kg을 주문해서 먹고 있는데 거의 다 먹었다. 충분히 노력을 하면 요리 실력이 늘 텐데. 할 수 있는 요리만 대충해서 먹는다.


가지고 있는 냄비는 두 개. 하나는 라면용이고 다른 하나는 찌개 용이다. 찌개용 냄비는 거대하다. 일부러 큰 걸 샀다. 찌개 하나를 많이 끓여서 오래 먹으려고. 오늘은 나흘 전에 끓인 김치찌개를 먹었다. 몇 개의 요리 돌려 막기로 근근이 살고 있다. 소설가 천운영의 산문집 『쓰고 달콤한 직업』에는 스페인 요리를 비롯해 다양한 음식이 등장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요알못이라서 천운영이 풍부한 어휘력으로 요리를 묘사하는데도 어쩐지 나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대신 어렸을 때 먹었다던 계란 프라이의 기억을 들려줄 때는 당장이라도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에 올릴 뻔했다. 『쓰고 달콤한 직업』은 소설가 천운영이 아닌 '업주, 사장, 대표, 주방장'으로 2년의 시간을 보낸 천운영의 시간이 담겨 있다. 소설을 쓰지 않는 동안 천운영은 식당의 대표로 살고 있었다. 엄마 명자 씨와 함께 말이다. 스페인 여행에서 짚으로 만든 당나귀 인형을 샀다. 그 아이를 마스코트로 '돈키호테의 식탁'이라는 상호로 가게 문을 열었다.


따뜻한 한 끼를 선사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식당 영업은 만만치 않았다. 쓰레기 무단 투기와의 사투, 신선한 음식 재료를 공수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을 보면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일의 고단함을 엿볼 수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동안 소설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대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썼다. 평소 존경하고 만나고 싶었던 이들을 불러 최선의 한 끼를 대접한다.


소설가의 직무에서 벗어나 살아간 요리사, 대표의 시간은 쓰고 달콤했다. 소설을 쓰지는 못했지만 '돈키호테의 식탁'에서 치열하게 살아냈다. 마음산책에서 나온 '직업 시리즈'는 계속 출간될 예정인가 보다. 내가 모르는 직업의 세계를 알 수 있음으로 독서의 시간은 유익하다. 직업을 책으로 알았어요, 정도. 한 가지의 음식을 위해 들이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을 보면서 경이를 표하기도 한다. 나를 위한 요리는 제대로 못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는 한 끼는 그럭저럭 해낼 수 있다고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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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다는 것 (양장)
김중미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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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미의 소설 『곁에 있다는 것』을 흡입하듯 읽었다. 보던 드라마도 팽개쳐둔 채 말이다. 시작부터 나를 압도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인용한 첫 부분을 보고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인생 책 불멸의 1위인 최애 책. 난쏘공의 배경인 은강이 『곁에 있다는 것』에 다시 등장한다. 작가의 말에는 김중미 작가가 조세희 작가를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허락을 받아 난쏘공의 은강을 소설로 가지고 왔단다.


소설은 은강에 사는 아이들의 시점에서 그린다. 고3 지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강이, 여울이, 우리의 이야기까지 소설은 먹먹한 감동을 준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시차를 두고 쓴 『곁에 있다는 것』은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1970년대에서 2021년까지 한국 사회는 정작 바뀌어야 할 것은 그대로인 채 숨 가쁘게 달려왔다. 겉모습만 풍요로워졌을 뿐 그 안은 텅 빈 채 말이다.


은강방직 해고 노동자 이모할머니를 만나러 간 지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은강에서 살아간 그들이 외치고 싶었던 진짜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알리고 싶다. 지우의 엄마는 돌봄 교사로 일하면서 보육 종료 아이들의 일상을 지켜봐 준다. 아빠는 은강 인터넷 신문의 객원 기자로 일하면서 은강에서 일어나는 일을 글로 쓴다. 지우는 부모님을 보면서 은강에서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은강을 사랑하고 아낀다.


모든 이가 지우처럼 은강을 애정 하지 않는다. 강이는 외할머니와 살면서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은강을 끔찍해하지는 않지만 은강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한다. 친구들이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한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알아보지만 학원비가 비싸 고민한다. 강이에게 국비 지원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현실의 내가.


여울이는 공부를 잘해서 교육 대학을 목표로 하는 아이다. 야무지고 똑똑하다. 지우와 강이와는 절친이지만 약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은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해 따로 산다. 엄마와 만나면 공부와 가치관 때문에 다투기도 하지만 엄마를 좋아한다. 은강에 빈민 체험관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소설 속 아이들의 고민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나의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부끄러웠다. 나의 문제만 문제로 여긴 지금의 시간 역시. 며칠 전에는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방이 추워서 이불 밖으로 얼굴만 내밀고 숨을 쉬면 입김이 생겼던 그때를. 그때 추위에 단련되어서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겨울을 지낼 수 있다고. 대학을 가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조언을 해주거나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저 내가 결심하고 결정했다.


다행히 문학을 알게 되어서. 책으로 도망칠 수 있어서. 나는 비뚤어지지 않았다. 어렵고 힘든데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학에 있었다. 가난한데 남을 미워하거나 자기 비하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때론 냉소와 적대감을 가진 인물들에게서는 세상을 마냥 착한 사람의 시선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위로가 되었다.


그때랑 다르지 않은 현재. 아이들은 더 힘들어졌다는 것을 『곁에 있다는 것』을 읽고 나서야 새삼 깨달았다. 어른인 나보다 더한 짐의 무게를 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망을 품고 있다. 은강을 개발하면서 원주민의 삶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어른들에 맞서 은강의 아이들은 연대한다. 손을 내밀고 힘을 모은다. 촛불 집회에 나가 하루 일당을 모금함에 넣고 당당하게 1인 시위를 한다.


『곁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꼭 읽어야 할 오늘의 소설이다. 최고의 문학이다. 찐문학이다.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과거의 내가 문학을 읽으며 꿈을 다졌던 것처럼 『곁에 있다는 것』을 읽으면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안다. 절망의 상황에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 한심하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어설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버티면서 스스로 쌓아야지 얻을 수 있는 삶의 내공 같은 것이다, 용기와 희망은. 문학은 절망을 가진 나를 토닥여주는 작은 손이다. 『곁에 있다는 것』은 그 몫을 톡톡히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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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건너뛰기 트리플 2
은모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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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워킹데드》에 미쳐 있을 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나머지 오프닝 건너뛰기를 과감하게 눌렀다. 안다. 오프닝 시퀀스 역시 그것까지 작품에 포함된다는 것을. 《워킹데드》의 오프닝은 훌륭했다. 등장인물들의 본명도 알려주고. 그러나 그걸 읽기에는 다음 편의 이야기가 궁금했기에 얼른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눌렀다. 20~30초의 짧은 시간을 할애하면 되는데 그걸 못 참았다.


지금은 웨이브로 넘어왔다. 한동안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데. 다들 나만 빼고 이 재밌는 걸 보고 있었단 말이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밌다, 드라마 보기. 은모든의 소설집 『오프닝 건너뛰기』의 작가 에세이에 나오는 것처럼 웨이브에는 오프닝 건너뛰기가 없다. 10초 뒤로 가기 기능은 있다. 세심하게 시간을 조절하지는 못해 그냥 타이틀을 본다. 새삼 놀란다. 이렇게나 드라마를 잘 만들다니. 추리, 범죄, 스릴러물에 심취해 있는 요즘이다.


은모든의 소설 『오프닝 건너뛰기』에는 세 편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다. 표제작 「오프닝 건너뛰기」는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의 코로나 일상을 그리고 있다. 2020년은 소설의 문장처럼 누구에게나 지워버리고 싶은 한 해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고 여행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미술 학원 강사인 남편은 월급이 밀려 있다. 아내는 원장에게 전화를 해서 받으라고 말하지만 남편은 주저한다. 나중에야 원장이 처자식이 있는 직원한테는 월급을 준 사실을 알게 되고 남편은 할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전화한다.


두 번째 소설 「쾌적한 한 잔」은 문학 교사로 일하는 은우의 어느 저녁을 그린다. 모처럼 나간 동창회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한 얄궂은 농담을 듣는다. 급기야 동창 하나는 고백 아닌 고백 같은 고백을 하고 은우는 부드럽게 거절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호기심으로 보는 저녁의 시간 은우는 단골 술집에서 위안을 찾는다. 은모든의 소설은 일상의 주변을 더듬는다. 주인공으로 내세운 화자는 주인공 같지 않은 위치에 선 채 주변인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일처럼 들려준다.


마지막 소설 「앙코르」의 주인공 세영 역시 가방을 잃어버린 가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대신 떠난 여행지에서 만난 한 사람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고자 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게 은모든 소설의 장점이다. 남에게 하지 못하는 슬퍼지는 나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세밀한 일상을 그리는데 탁월하다.


우리 삶을 한 편의 드라마도 본다면 무척이나 지루해서 오프닝이 뭐야 한 편 전체를 스킵 해 버릴지도 모른다. 드라마가 아니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니까. 어쩌면 그게 소중한 이유가 되니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 한 문장 한 문장 정성 들여서. 극적인 사건도 아름다운 결말도 없지만 누군가 들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기도 함을 알고 있기에. 쓴다. 은모든의 소설은 이상하게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물들이 나누는 주사 같은 이야기는 아침이 되면 전부 잊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간절히 듣고 싶은 나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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