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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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지,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 좋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은데 신경을 안 쓰고 있었던 거지. 딴 데 정신이 팔려서.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나의 근황을 들려줄 기회가 생겼다. 딱히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방언 터지듯 말이 나왔다. 요즘은. 그래. 그러니까. 계속 누워 있어. 누워서 고민만 하고 있지. 그러다가 책 읽고 그러다가 잠들고. 엄마도 그랬는데. 정작 실행은 하지 않고 누워서 걱정과 고민만 했었지.


상황을 타계하려면 일단 일어나서 행동해야 하는 데 그게 아닌 내내 누워서 말로만 걱정하고 불안해 하던, 엄마. 그걸 내가 하고 있지 뭐야. 하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엄마 생각이 나고 약간 서글퍼지고. 켄 리우의 소설집 『종이 동물원』을 읽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SF 소설 모음집이라서 사 놓고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이상하게 SF 소설에는 약간의 거부 반응이 내겐 있다. 이해력이 안 좋아서 그런 걸지도. 좀 어렵다, SF는.


그런 내가 전자책 기준으로 500페이지가 넘는 『종이 동물원』을 완독했다. 정말 좋아서 아껴 읽었다. 한 편 한 편이 소중하고 짜릿했다.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감동받았다. 특히 표제작 「종이 동물원」은 기가 막혔다. 주인공 '나'는 미국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카탈로그에서 고른 홍콩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나'가 울 때마다 어머니는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로 동물을 접어 주었다. 그 동물에게 어머니는 숨을 불어 넣어 주었다. 종이로 만든 동물은 생명을 얻어 돌아다녔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미국적인 아이가 되어간다. 어머니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에도 제대로 된 장난감이 없는 것에도 짜증을 낸다. 어머니는 '나'와 중국어로 대화를 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대화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는 청명절이 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말한다. 「종이 동물원」은 그렇고 그런 가족의 이야기를 놀라운 반전을 들이밀면서 특별한 이야기로 만들어 낸다. 소설의 마지막을 읽을 때면 내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 단 한 사람을 떠올리며 세상의 모든 슬픔이 밀려온다.


중국, 일본, 간간이 한국의 역사 이야기가 『종이 동물원』에 등장한다. SF 적인 옷을 입고서. 현실을 탈피하는 게 아닌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 켄 리우는 신화, 환상, 역사를 SF로 끌고 온다. 단 한 편도 거를 수 없다. 꼭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은 책이다.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려온 「레귤러」는 중간에 끊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인종 차별, 역사 왜곡, 인간의 이기주의 같은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 가독성까지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았던 이유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숙함 때문이었다.


망한 지구를 탈출해 우주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우주선을 고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 후대에게 역사를 알리기 위해 모진 고문을 당하는 사람. 『종이 동물원』에는 특별한데 자신들이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소설 속 그들이 했던 선택을 현실에서라면 주저 없이 할 수 있을까. 없다고 생각하기에 소설이 쓰인다. 이야기가 나온다. 꼭 그렇게 했으면 하는 바람에. 자신보다 남을 위한 선택을 우리가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채우고 싶어서.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리웠는데 『종이 동물원』은 그걸 충족해 준다. 고통스럽고 슬펐던 기억을 잊고자 했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살아서 살아 있는 동안은 기억하고 추억하자. 위대하고 훌륭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구에서의 역할은 다 한 것이니까. 우주선에 못 타도 좋아. 꼭 알아야 할 역사가 있다면 공부를 해서 기억하도록 하자.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매 순간 떠난 그들을 기억한다면 미처 하지 못한 말을 하려고 찾아올지 모르니까.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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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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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료의 신작 장편 소설 『지금부터의 내일』은 박력적인 소설이다. 거침없이 이야기를 끌고 가서 결말에 가면 사정없이 메다 꽂는다. 탐정 사와자키는 전 직장 동료의 이름을 딴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에서 의뢰인을 맞이한다. 누가 봐도 신사처럼 보이는 유명한 저축 은행 지점장인 남자는 대출이 예정된 요정의 여주인의 사생활 조사를 의뢰한다. '밀레니엄 파이낸스'에 다닌다는 모치즈키의 첫 등장이었다. 모치즈키는 탐정료를 선불로 지급하고 되도록이면 집에는 전화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사와자키는 의뢰를 승낙한다. 다음 주 토요일에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모치즈키는 떠난다. 그게 사와자키가 모치즈키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었다. 사생활 조사를 부탁받은 요정 여주인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낸 사와자키는 그와 연락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은행으로 찾아가 직접 얼굴을 보고 의뢰가 잘못되었음을 알리고 돈을 돌려주려고 한다. 은행에 도착에 지점장 모치즈키를 만나려고 하지만 이상한 강도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건에 휘말린다.


두 복면강도가 들어와 은행 금고를 열라고 사람들을 협박했다. 사와자키는 탐정의 감으로 평범한 사건이 아님을 직감한다. 은행 금고를 열기 위해서는 지점장 모치즈키가 있어야 하지만 그는 돌아와야 할 시간임에도 은행에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강도 사건과 모치즈키의 실종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모치즈키가 조사를 의뢰한 죽은 여인도 이 사건에 얽혀 있는 것일까. 사와자키는 외로운 수사를 시작한다. 은행 강도 사건 때 침착함을 잃지 않고 강도 중 한 명을 설득해 자수 시킨 청년 가이즈와 간간이 동행을 해가면서.


『지금부터의 내일』은 추리 소설답게 모든 인물에게 역할과 의미를 부여한다. 이 사람 수상한데 하는 순간 그는 사건의 핵심 인물이 된다. 누구도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된다. 지점장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며 그는 죽은 여인의 사생활을 왜 캐달라고 한 것일까. 사와자키는 특출난 감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고 들어간다. 곧바로 사건으로 들어가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지금부터의 내일』은 바로 그 소설이다. 중간에 쉴 틈 없이 사건 현장으로 끌고 들어가는데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나이가 든 탐정은 휴대 전화도 없어 전화 서비스를 이용해 연락을 주고받는다.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지도 않고 뛰어난 말빨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혼자 묵묵히 돌아다니며 사건의 실체를 꿰뚫어 볼 뿐이다. 경찰과는 적대적이고 사교성이 있지도 않다. 걷고 전화를 걸고 탐문하면서 실종과 강도 사건의 연관성을 찾아간다. 사건의 연결 고리가 하나씩 맞아 들어가는 쾌감을 선사하기 위해. 소설이 빨리 끝나버릴 것 같은 아쉬움에 애써 천천히 읽었는데도 금방 끝이 나고야 말았다. 이렇게 빨리 끝나기야. 너무나 아쉽. 다음 시리즈를 기다린다. 14년 만에 나온 『지금부터의 내일』인데. 솔직히 14년은 너무 했습니다요. 좀 더 빨리 내주세요, 다음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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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 - 강지혜 에세이 매일과 영원 2
강지혜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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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없어서 여름휴가 이야기를 꺼냈다. 짧은 휴가를 앞두고 있었을 때였다. 다들 어디 놀러 가시나, 궁금한 것도 있고. 사회성 있는 인간으로 보이고 싶어서. 제주도 이야기가 나왔다. 그 순간 제주도에 꼭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신청해 제주도 관광 지도도 받아 보았다. 게으름뱅이가 그 정도 했으면 큰일 한 거다. 지도를 받아 든 것만으로도 제주도에 가 있는 기분.


딱 거기까지였다. 항공편을 알아보고 숙박 시설을 검색하는데 지쳤다. 하필이면 그때가 성수기였던 것도 있고. 핑계인 거 다 안다. 가고 싶은 마음이었으면 어떻게든 갔을 텐데. 온갖 가기 싫은 이유를 끌어대면서 결국에는 가지 않았다. 아, 제주도. 내게는 너무 먼 곳. 책으로만 만날래. 그래서 강지혜의 에세이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를 집어 들었다.


요즘 시인의 시집은 안 읽고 시인이 쓴 에세이만 읽고 있다. 아무래도 마음이 복잡해서인지 시보다는 생활의 감각이 묻어나는 에세이가 더 와닿는다. 버거운 출퇴근을 하던 시인 강지혜는 어느 날 이렇게는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대출을 받아 집을 샀지만 그래서 영혼이 바닥난 기분이 든다. 이렇게는 살기 힘들겠다는 남편은 여행을 떠나고 기브 앤 테이크로 시인도 전국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가을의 제주를 만난다.


별명이 강추진만. 한 번 추진하려는 일에는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는 시인의 별명. 강추진만은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계획을 짠다. 함께 여행을 떠났고 제주도 촌집을 사서 꾸민다. 남편과 동생이 함께 이주를 했다.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촌집은 촌집이었다. 촌집은 리모델링보다는 허물고 새로 건축을 하는 게 이득이란다.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은 나도 한 번 제주도에 살아볼까 하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당신들이 생각한 것만큼 낭만적인 제주도 살이가 아니라는 것을 웃프게 들려준다. 가족과 함께였지만 가족이어서 서운하고 힘들었던 점 또한 솔직하게 말한다. 어렵게 리모델링을 하고 가게를 열었다. 만만치 않은 자영업자의 삶. 그럼에도 행복이 찾아온다. 강아지 신지와 귀여운 아이 다하. 시인과 엄마, 숙박 업체의 사장으로서 강지혜의 삶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에세이 끝에는 시가 한 편씩 실려 있다. 시인으로서의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여 뭉클했다. 시 밑에 쓰인 이야기 역시 읽고 나면 마음이 짠해진다. 어떤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눌러썼을지가 상상이 되어서.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내가 제주도에 갈 일이 있을까. 이런 식으로 가다간 제주도를 책으로 배웠어요가 될 것 같다. 누군가의 제주도 살이를 보며 그이가 들려주는 일상의 슬픔과 기쁨을 상상하며 가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인다. 책은 그러라고 읽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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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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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의 소설집 『환한 숨』에서 내가 취할 수 있었던 정서는 사랑을 향한 머뭇거림이었다. 아홉 편의 이야기가 전부 사랑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애써 사랑의 감정을 찾고자 했다. 어떤 이야기는 마음이 시렸고 어떤 이야기는 마음이 아팠다. 조해진이 그려내는 인물에게 자주 감정이 이입되었는데 그건 그들이 너무나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특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보통과 특별의 경계를 조해진은 능숙하게 넘나들었다.


대부분의 인물이 혼자 살거나 가족이 있어도 따로 산다. 부모는 부재하고 형제는 소원한 상태로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인 것처럼 살아가는 그들은 생의 한순간 사랑이라고 부르는 풍경에 다가갔다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멀어진다. 섬과 섬이 만나 육지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단단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밀어낸다. 어쩌다 사랑할 수도 있었지만 그다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멀어진다. 사랑하며 사는 것보다 사랑을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는 게 익숙한 사람들, 『환한 숨』에는 그런 이들만 등장한다.


무리 없이 비유를 쓸 줄 아는 조해진의 문장은 『환한 숨』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회적인 문제도 주저 없이 소설로 끌어온다. 요양보호사, 기간제 교사, 도서관 사서, 시인, 학원 강사, 경력단절 여성 등 『환한 숨』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소설의 주제를 풍성하게 만든다. 직업과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그들이 사랑을 느끼고 연애를 시작했으면 했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라는 듯 그들은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편지와 시를 쓴다. 생의 최초의 감각을 기억하며 소설을 쓴다. 모두 쓴다는 행위로 귀결되는 삶이다.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글을 쓰겠다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를 묻는 여정으로 『환한 숨』은 쓰였다. 살아가기는 쉽지만 버티기는 어려운 시대. 사랑하며 살기 보다 미움 없이 사는 걸 선택한 인물들의 오늘을 읽으면서 내내 서글픈 마음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밖에서 노크조차 하지 못하며 서 있는 나의 과거들.


포기하기가 어려워 구질구질하게 과거를 붙들고 살고 있다. 후회를 반복하고 잘못은 모른 체하는 나의 오늘. 환한 미래 따위는 없어도 좋으니 '환한 숨' 정도는 마음껏 쉬고 싶다. 밤중에 치킨 시켜 먹고 커피 한 잔 정도는 생각 없이 사 마시려고 돈 벌러 나간 건데. 죽음이 너무나 많다. 『환한 숨』에는 빈번한 죽음이 가족의 부재가 포기해버린 사랑이 많다. 최선을 다해 살지 않아도 된다고 누군가 일찍 말해주었으면 괜찮았을까. 『환한 숨』은 질문한다.


최선을 다할수록 최선으로 밀려나는 삶에서 사랑은 구원이 될 수 없었음을 『환한 숨』은 보여준다. 단지 사랑의 기억만을 가지고 남은 내일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한 순간을 복기하며 평생을 살아갈 허구의 인물들에게서 절망이 전이된다. 모두에게 안녕하냐고 쉽게 묻지 못하는 오늘날의 처연한 풍경이 소설에 담겨 있다. 슬프고 먹먹하다. 함부로 슬프다고 말하지도 못할 슬픔이 『환한 숨』에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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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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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제 나는 리뷰 외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문보영의 『일기시대』를 읽는 동안. 책에는 시인이 불면의 밤 동안 쓴 다양한 장르의 글이 들어 있다. 대부분 일기 형태이지만. 에세이와 소설의 중간을 넘나드는 글이 간간이 섞여 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흥분된 감정을 잘 추스른 리뷰도 있다. 제목만 『일기시대』일 뿐 재능과 노력이 응축된 다양한 종류의 글이 담겨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 역시 매일 일기를 쓴다. 쓰는 내용이래봐야 하루 일과를 의미 없이 나열해 놓은 형태에 불과하다. 첫 문장과 끝 문장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사건이 생기면 알리바이 증명용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일기를 쓴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누가 이걸 가지고 책으로 만들어 보자고 하면 당장 불태워야 하는 일기. 컴퓨터가 익숙하지 않았을 땐 손으로도 글을 잘 썼다. 자알 쓴 거다. 맘 가는 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한글 자판은 안 보고도 칠 수 있는 정도가 된 지금 컴퓨터를 책으로 배운 지금은 손가락이 키보드가 아니면 길을 잃고야 만다. 손으로 쓴 일기가 형편없는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그럼 컴퓨터로 쓰는 글은 괜찮은가. 그렇지도 않은 게 나중에 내가 쓴 글을 화장실에서 읽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냄새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걸 글이라고 잘도 써 놓고 전체 공개로 해 놓은 뻔뻔함 때문에.


재능은 없고 노력은 더더욱 하지 않는 잉여 인간은 출세욕이 하늘을 찌른다. 평소에는 잘 숨기고 있다가 누군가들의 성공기를 보다 보면 나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한다. 『일기시대』를 읽으면서 혹시 누군가 내 블로그에 쓰인 그간의 리뷰를 보고 출간 제의를 하지 않을까 일기도 책이 되는데 리뷰라고 안 될 게 있나 하는 기대 기대.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 일기나 에세이, 리뷰는 일반인이 출판하기에는 벽이 존재한다.


어떤 에세이 작가의 데뷔기는 흥미로웠다. 그가 블로그에 쓴 글을 신문사 부장이 우연히 읽고 칼럼 제의를 했다는 것이다. 잘 되는 사람은 어떻게도 기회가 있구나. 유명해질 기회 따위는 없으니 얼마 전 떨어진 시험을 다시 보려면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여 문제나 풀어야지. 공부하다가 남은 시간에 드라마 보다가 남은 시간에 책을 읽고 리뷰를 써야지. 노력으로 밀고 나가는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야 너도 할 수 있어 응원의 말을 굳이 찾아내서 힘을 내야겠다.


『일기시대』는 불면의 밤, 잠이 오는 한낮의 문보영 시인의 생존기를 담고 있다. 글 마지막에 최종 취침 시각이 쓰여 있는데 깜짝 놀랐다. 요즘 나의 취침 시각과 비슷한 게 아닌가. 사람 사는 거 똑같구나. 낮 열두시 정도에 일어난다는 것까지도. 다른 게 뭐냐면 시인은 도서관에 간다는 것. 나는 그대로 누워서 책을 읽는다는 것. 시인은 무엇이든 쓴다는 것. 나는 리뷰만 쓴다는 것.


「편지 광기」에서 소개하는 『아이 러브 딕』은 흥미로웠다. '딕에게'로 시작하는 문장이 아니면 글을 쓸 수 없는 인물의 이야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설픈 광기라도 필요하다. 이상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럼 바꿔볼까. 시를 리뷰처럼 써 보기. 소설을 리뷰처럼 써 보기. 희곡을 리뷰처럼 써 보기. 궤변을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뭐든 다 안되겠네요. 문보영 시인의 유튜브를 보면 어디에서든 큰 노트를 펼쳐놓고 글을 쓰는 그녀를 볼 수 있다.


대체 무얼 쓸까. 궁금했는데 그 순간, 그 공간에서 쓴 글이 『일기시대』가 된 듯하다. 일단 쓴다는 루틴을 가진 시인의 일기는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으름뱅이 독자에게 닿아 꾸준함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요즘은 성공보다 실패가 하고 싶지 않다는. 출세보다 외출이라도 하면 다행이라는. 내일 도서관 가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눈 뜨면 도서관에 간다니,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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