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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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제 나는 리뷰 외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문보영의 『일기시대』를 읽는 동안. 책에는 시인이 불면의 밤 동안 쓴 다양한 장르의 글이 들어 있다. 대부분 일기 형태이지만. 에세이와 소설의 중간을 넘나드는 글이 간간이 섞여 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흥분된 감정을 잘 추스른 리뷰도 있다. 제목만 『일기시대』일 뿐 재능과 노력이 응축된 다양한 종류의 글이 담겨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 역시 매일 일기를 쓴다. 쓰는 내용이래봐야 하루 일과를 의미 없이 나열해 놓은 형태에 불과하다. 첫 문장과 끝 문장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사건이 생기면 알리바이 증명용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일기를 쓴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누가 이걸 가지고 책으로 만들어 보자고 하면 당장 불태워야 하는 일기. 컴퓨터가 익숙하지 않았을 땐 손으로도 글을 잘 썼다. 자알 쓴 거다. 맘 가는 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한글 자판은 안 보고도 칠 수 있는 정도가 된 지금 컴퓨터를 책으로 배운 지금은 손가락이 키보드가 아니면 길을 잃고야 만다. 손으로 쓴 일기가 형편없는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그럼 컴퓨터로 쓰는 글은 괜찮은가. 그렇지도 않은 게 나중에 내가 쓴 글을 화장실에서 읽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냄새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걸 글이라고 잘도 써 놓고 전체 공개로 해 놓은 뻔뻔함 때문에.


재능은 없고 노력은 더더욱 하지 않는 잉여 인간은 출세욕이 하늘을 찌른다. 평소에는 잘 숨기고 있다가 누군가들의 성공기를 보다 보면 나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한다. 『일기시대』를 읽으면서 혹시 누군가 내 블로그에 쓰인 그간의 리뷰를 보고 출간 제의를 하지 않을까 일기도 책이 되는데 리뷰라고 안 될 게 있나 하는 기대 기대.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 일기나 에세이, 리뷰는 일반인이 출판하기에는 벽이 존재한다.


어떤 에세이 작가의 데뷔기는 흥미로웠다. 그가 블로그에 쓴 글을 신문사 부장이 우연히 읽고 칼럼 제의를 했다는 것이다. 잘 되는 사람은 어떻게도 기회가 있구나. 유명해질 기회 따위는 없으니 얼마 전 떨어진 시험을 다시 보려면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여 문제나 풀어야지. 공부하다가 남은 시간에 드라마 보다가 남은 시간에 책을 읽고 리뷰를 써야지. 노력으로 밀고 나가는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야 너도 할 수 있어 응원의 말을 굳이 찾아내서 힘을 내야겠다.


『일기시대』는 불면의 밤, 잠이 오는 한낮의 문보영 시인의 생존기를 담고 있다. 글 마지막에 최종 취침 시각이 쓰여 있는데 깜짝 놀랐다. 요즘 나의 취침 시각과 비슷한 게 아닌가. 사람 사는 거 똑같구나. 낮 열두시 정도에 일어난다는 것까지도. 다른 게 뭐냐면 시인은 도서관에 간다는 것. 나는 그대로 누워서 책을 읽는다는 것. 시인은 무엇이든 쓴다는 것. 나는 리뷰만 쓴다는 것.


「편지 광기」에서 소개하는 『아이 러브 딕』은 흥미로웠다. '딕에게'로 시작하는 문장이 아니면 글을 쓸 수 없는 인물의 이야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설픈 광기라도 필요하다. 이상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럼 바꿔볼까. 시를 리뷰처럼 써 보기. 소설을 리뷰처럼 써 보기. 희곡을 리뷰처럼 써 보기. 궤변을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뭐든 다 안되겠네요. 문보영 시인의 유튜브를 보면 어디에서든 큰 노트를 펼쳐놓고 글을 쓰는 그녀를 볼 수 있다.


대체 무얼 쓸까. 궁금했는데 그 순간, 그 공간에서 쓴 글이 『일기시대』가 된 듯하다. 일단 쓴다는 루틴을 가진 시인의 일기는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으름뱅이 독자에게 닿아 꾸준함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요즘은 성공보다 실패가 하고 싶지 않다는. 출세보다 외출이라도 하면 다행이라는. 내일 도서관 가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눈 뜨면 도서관에 간다니,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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