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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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고 싶지 않겠지만 근황 하나 투척한다. 단기 알바 하나를 끝냈고 계속 서류를 내고 있다. 오늘은 처음으로 면접 연락을 받았다. 열람만 하고 연락이 오지 않아서 반쯤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였다. 오죽했으면 '오늘의 운세'를 매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아무 상황에나 대입할 수 있는 뻔한 말이지만 긍정적인 문장이면 그런대로 기분이 좋아진다. 가만있자. 오늘은 '허풍에 조심하세요'라네요.


자격증 공부할 때도 그랬지만 안달복달, 애면글면, 반드시라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되더라.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어보자. 가지겠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겠지만. 적어도 급한 마음으로 일을 망치려 들지 말자.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오늘의 운세에 심취한 사람의 문장력이다. 책 많이 읽고 꽂히는 음악이 있으면 그것만 듣는 시간이 언제 다시 올까. 시간을 가진 사람이 부자라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내가 직업이 없지 가오가 없냐. 있을 때 누리자. 시간.


이장욱의 장편 소설 『캐럴』을 읽는 동안 눈이 내리는 겨울이 그리웠다. 따뜻한 남쪽 지방에 살고 있는지라 겨울이 되어도 눈 구경 하기 힘들다. 간혹 폭설이 내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기대를 하는 시간이었다. 내일 버스가 끊겨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캐럴』을 읽고 줄거리 요약을 해보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줄거리를 아는 게 무의미한 소설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읽는다. 다 읽고 나서는 어떤 마음이 들지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것으로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캐럴』은.


1999년을 기억하는지. 기억한다면 당신은 나와 동시대를 산 사람. 세기말 감성에 젖어 모든 걸 비관적으로만 보던 청소년이었다. 나도 너도 세상도 다 싫은 겁은 많아서 비행청소년은 못 되고 말 안 듣는 아이 자칭 문학소녀였더랬다. 지금도 생각하면 식겁한다. 그때 문학을 알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풀렸을까. 풀리지도 못한 채 접혀서 찌그러져 있었겠지. 아니 더 괜찮은 쪽으로 풀렸을까.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자격증 서적 코너에서 잠시 후회를 하긴 했다. 인문계를 가지 말 걸. (구인 공고를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문송합니다.)


『캐럴』은 1999년을 사는 도현도와 2019년을 사는 윤호연이 시간 차이를 극복하고 만나면서 시작된다. 도현도는 람페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대학 수업 때 선우를 만나 호감을 가지지만 그녀와 헤어진다. 어느 날 아침 도현도는 채권 추심인의 방문을 받는다. 그도 모르는 빚이 있다는 거다. 최악의 아침인 게 람페가 죽었다. 끈질긴 채권 추심인의 방문과 전화를 받고 도현도는 지하 7층의 사무실로 불려간다. 그곳에서 2019년을 사는 윤호연과 연결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1999년의 시간이 무척이나 생각났고(그래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고민도 아닌 고민을 잔뜩 이고 학교에 다니는 그 시절의 나의 모습이 갑자기 소환돼서) 2019년이 그리워졌다. 마스크 없이도 자유롭게 돌아다녔던. 도현도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선우는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불면이 아닌 비면으로 살아간다. 소설은 친절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지 않는다. 그들의 미래는 알려주지 않은 채 과거와 현재를 이어간다.


한동안 낮과 밤이 바뀐 채 생활했다. 어떤 날은 밤에 깨어 있는 게 미치도록 좋았고 어떤 날은 나 자신이 싫어졌다. 이중적인 생각이 들게 만드는 밤의 시간. 내일이라는 미래는 창밖으로 다가와 있는데 현재에 갇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캐럴』은 후회와 회환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해 주는 일 정도. 그래도 죽음은 닥친다. 이틀 후 나는 면접에서 무슨 말을 하게 될까. 궁금한 건 그 정도. 과거와 현재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미래는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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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23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살리는 일 - 동물권 에세이
박소영 지음 / 무제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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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학과 영화를 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생득'을 벗어나기 어렵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 타고난 조건이 사고를 지배한다. 내 입장과 처지를 벗어나 다른 이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는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딛고 선 자리를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것. 불완전하게나마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책과 영화를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타인의 존재를 감각할 수 있다.

(『살리는 일』中에서, 박소영)


이왕 이렇게 된 거 책이나 읽어보자는 심사다. 뭐, 언제는 책 안 읽고 살았나. 그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읽어 보자는 거. 언제는 본격적으로 안 읽고 살았나.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유일한 취미이자 오락거리가 '독서'면서 왜 이런 말을 할까. 상황을 바꿔 보자는 뜻이다. 대학교에서 보낸 시간을 제외하곤 일하면서 일 때문에 걱정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더랬다. 지나고 나니 대학 시절은 좋았네. 마음대로 책을 읽고 책 많이 읽었다고 칭찬도 들었던 유일한 시기였다.


회피하고 싶어서 백수로 보내는 기간을 세어 보질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달력을 보니 7개월이 되어간다. 겁나 빠르다, 빨라. 첫 달에는 학원 다니고 자격증 따서 바로 취직해야지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우리네 인생. 너무 떨려서 시험 한 번 망하고 다시 본 시험에서 합격했다. 기쁠 줄 알았는데 막상 호들갑을 떨 만큼 기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메일함에 '담당자가 이메일 입사지원서를 열람했습니다.'라는 제목의 메일만 보기 때문일지도.


마음이란 게 무겁고 넓어서 다 비울 순 없어 조금씩 덜어내고 있다, 부정적인 마음의 일부를. 어떻게? 잘하는 거 하면서, 책 읽는 거. 일단 살고 봐야지. 박소영의 『살리는 일』은 제목이 주는 위안 때문에 읽었다. '동물권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다. 책에는 동물, 인간을 나누지 않고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따뜻함이 담겨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살리는 일이 된다. 집 앞에 생긴 편의점 한 쪽에는 고양이 사료와 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다. 편의점 주인이 놓아둔 듯했다.


그걸 보고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는 베란다에 마련된 캣타워에 앉아 있는 고양이 세 마리와 만난다. 이름을 몰라 '행고'라고 부른다. 행운의 고양이라는 뜻의 줄임말이다. 매일 두 번씩 만나니까 너희들을 보면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붙였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든다. 안녕, 행고. 이제 집으로 들어와 씻고 누워 있으면 화장실 환풍기를 통해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는다. 윗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소리다. 쟤는 꼭 화장실에서 운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 정도로 화장실에서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것이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의 고양이 이야기다. 하나 더 있다. 어렸을 때 문 열어 놓고 외출했는데 돌아오니 고양이들이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니 후다닥 달려 나갔다. 또 있는데 이제 그만. 『살리는 일』에 대해 써야지. 저자 박소영은 캣맘이다. 동생과 함께 고양이 급식소에 사료와 물을 놓아 준다. 아픈 애들이 있으면 구조 한다. 동물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전과 후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과거의 자신보다는 현재 자신이 갖게된 정체성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 나서는 한동안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 모든 육식을 끊을 자신은 없어 생각해낸 대안이었다. 일 년 정도를 계획했는데 실패. 지금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책을 읽는다. 귀가 얇고 줏대가 없어서 책을 읽고 감명받으면 저자의 방식을 따라 해본다. 그렇다고 습관을 바꿔 전혀 다른 나가 되지는 못한다. 조금씩 바꿨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 반복하고 있다. 『살리는 일』은 실천의 강요를 받기 보다는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은 책이었다.


너구리가 먹을 수 있는 사료도 있다. 사육 곰이라는 게 존재한다. 견주, 주인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말이다. 동물 병원에는 보호자의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꼭 보게 싶게 만드는 책과 영화의 소개. 나 하나도 책임지는 게 버거워서 살아 있는 존재 자체를 들일 생각을 안 한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은 그럴거면 동물을 키우지 말자고 했다. 그럴거면에 담겨 있는 우리의 잘못은 따로 안 써도 아시죠?


『살리는 일』은 동물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이의 치열한 기록이다. 글을 쓰는 시간 보다 길에서 떠도는 동물을 구조하는 시간을 더 애틋해 하는 사람이 쓴 책이다. 어렵게 쓰지 않고 효율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단정한 문체로 표현한다. 고양이를 한 번도 쓰다듬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살리는 일』을 읽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갈 순 없지만 자신의 바깥에 온 관심을 두며 살아가는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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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예언 사건 요다 픽션 Yoda Fiction 3
곽재식 지음 / 요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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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가장 무서운 이야기 사건』이었다. 찾아보니 2018년 6월에 읽었다. 그 후 꾸준히 곽재식의 소설을 찾아서 읽고 있다. 리뷰 쓴 걸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다. 『가장 무서운 이야기 사건』은. 재미있고 무섭다. 진짜. 겁이 많고 소심해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 사건』을 읽다가 무서워 불을 켰다. 이제 읽으려는 책은 몇 백 편의 단편을 쓴 작가의 창작기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와 『토끼의 아리아』이다. 읽으면서 기다리겠다. 한규동과 이인선 사장의 다음 이야기 사건을.' 이라고 마지막 문단에 썼다.


'가장 무서운'시리즈는 열 권으로 기획했다고 했다. 2년 만에 두 번째 시리즈인 『가장 무서운 예언 사건』이 나온 것이다. ‘차세대 인터넷 정보 융합 미디어 플랫폼 스타트업’이라는 온갖 화려한 용어를 갖다 붙인 회사의 사장 이인선과 유일한 직원 한규동이 다시 뭉쳤다. 거창한 회사 이름과는 다르게 돈이 되는 조사 의뢰가 들어오면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여전히 이인선 사장은 이상하다. 회사 책상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고 조사하다가 필받으면 혼자 탕수육을 먹으러 간다. 전작 『가장 무서운 이야기 사건』에서 이인선 사장은 한규동을 면접 볼 때 다 식어빠진 탕수육을 먹었더랬다.


면접을 보러 다니는 요즘 사장이 그러고 있으면 합격이라고 해도 안 가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이니니까) 가긴 갈 건데 찝찝하겠다. 한규동도 그러한 심정이었다. 사장 꼴이 이상하지만 취업 빙하기 아닌가. 일단 들어가 본다는 심정으로 입사했다. 이번에는 '예언 사건'이다. 누워 있는 이인선 사장은 한규동에게 정확한 예언을 하는 예언가가 등장했다고 알려준다. 선문답 같은 대화를 마치고서 예언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다. 『가장 무서운 예언 사건』의 장르는 추리 소설로 시작했다가 SF 소설로 바뀌고 메타 픽션으로 우회했다가 비리를 밝히는 방식으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인선 사장의 전 애인 신문사 기자인 오 차장이 받은 제보를 토대로 예언자의 실체를 찾아간다. 예언자의 예언은 이러했다. '오늘 자정이 되면 세계는 멸망한다.' 삼 인방은 그 말을 믿어야 말아야 할지를 논의한다. 사기꾼이 허무맹랑한 말을 떠든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예언자는 정확히 세 번, 스포츠 경기의 스코어를 맞혔다. 하는 행동은 이상하지만 날카로운 추리력을 가진 이인선 사장과 엉뚱한 호기심의 소유자 한규동, 이인선 사장에게 약간 미련을 갖고 있는 듯한 오 차장. 과연 그들은 예언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내일 지구가 망한다고 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심정으로 조사를 하는 건 아니고 예언자의 정체와 망한다면 대체 어떤 형태로 망하는지 궁금해서 바쁜 하루를 보낸다. 한 시간마다 장소가 바뀌면서 그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지구 멸망의 원인이 무엇일지 논의한다. 지구가 망하더라도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식의 건전한 결말 따윈 없다. 우리 사는 세계의 배후에는 조종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에서 이곳이 실재라고 믿었지만 게임 속 세상일 지도 모른다는 가설까지 삼 인방은 다양한 해석을 나눈다.


『가장 무서운 예언 사건』의 특별한 점은 '작가의 말'이 소설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이야기 사건』과 똑같은 구성인 '문제편, 풀이편, 해답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점은 '풀이편'과 '해답편' 사이에 '작가의 말'이 있다. 갑자기 훅 들어온 '작가의 말' 때문에 '풀이편'의 마지막 장을 다시 한번 읽어야 했다. 결말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진짜 예언가는 존재하는가. 진짜 세계는 망하는가. 소설 안에서 주인공 삼 인방이 자신들은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 아닐까 추리하는 부분은 흥미롭기까지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방식은 『가장 무서운 예언 사건』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는 힘이다. 2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가짜라면 누군가가 짜 놓은 프로그램 안에 들어와 있는 거라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프로그래머가 짜 놓은 퀘스트였다면. 현질할 돈이 없어 아이템을 못 사 이대로 게임을 끝내야 하는 것이라면. 단순하게 생각하자. 일단 전원을 끄고 본다. 재부팅. 저장 못 하고 다 날렸지만 아쉬워하지 말자. 다시 시작하는 거야. 스스로 리셋 버튼을 누른 거니까. 이건 생각 못 했겠지. 플레이어가 스스로 종료해버리는 건. 그러니까 규칙이 있다면 규칙을 깰 수도 있어야 한다.


자, 다음 이야기 내 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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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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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나올 수 있냐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나갈 수가 없다고. 다른 곳에서 연락이 왔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구직 활동을 하고 첫 합격 전화 비슷한 거였는데. 비슷한 거라고 쓴 이유는 누구누구 씨, 당신은 합격입니다도 아니고 대뜸 내일부터 나올 수 있냐는 질문으로 통보해온 거라 그렇게 썼다. 면접 볼 때도 느꼈지만 예의가 없었다. 그 예의 없음을 전화로도 뽐내고 있었다. 지금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다. 어디라도 불러주면 네, 네 가야 할 판이다.


일주일이 흐르고서도 내가 왜 그랬을까를 생각한다. 그동안 많은 곳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넣었는데 그때 그 전화 이후로 면접 보라고 연락조차 오지 않아 더 그렇다. 가야 했을까. 아니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나는 느꼈으니까. 상대를 향한 무시와 조롱, 떠 본다는 식의 질문을 듣는 내내 나는 '훼손' 되었다고 그래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유를 찾아가고 있다. 김금희의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를 읽어가며 내가 취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의 이유를 알았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에 담긴 일곱 편의 소설 중 어느 것 하나 아프지 않은 소설이 없었다. 현재의 '나'가 기억하는 과거 속 '나'의 병신 같음 때문에 그걸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모습 때문에. 소설을 읽는 현실의 나의 더 병신 같은 행동 때문에. 김금희의 인물들은 과거 안에서 살아간다. 과거 보다 아주 조금 괜찮은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딱히 행복하다고도 할 수 없는 지금에서 과거는 어떻게든 치유해 줘야 할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치유가 될까. 상황을 나아지게 할 여력조차 없는 과거 속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훼손' 당하는 것 밖에는 없었는데.


미숙한 시간 안에서 그보다 더한 미숙한 자신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김금희의 주인공들은 행복이라는 사치조차 부릴 수 없었다. 다만 고통스럽지 않기를 누군가에게 나의 상처를 떠넘기고 홀가분해 하는 자신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다. 삼수생과 적응 못하는 의대생의 한 시절을 담아낸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을 읽으며 내가 면접에서 느꼈던 기분은 수모와 모멸이라는 구체성이 확실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시간을 그 짧은 시간 동안 훼손 당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나는 그곳에 가지 못하겠다는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현실의 내가 당하고 느꼈던 수치와 모욕은 나라도 그걸 나 자신에게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김금희의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의 소설들이 말해준다. 앞으로 어떤 일이 찾아올지 알 수 없으며 바닥을 친 이상 조금씩 올라갈 일만 남은 것이라고 다독여 준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면접을 보는 동안 경험하지 않아도 좋을 일들을 겪으면서(실물과 사진이 다르다. 그 소리를 굳이 두 번, 세 번 해댔다. 마스크를 내려 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이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며. 다르긴 뭐가 다를까. 얼굴 보고 뽑는다는 걸까. 그래봐야 마스크를 내내 쓰고 있어야 하는데.) 좋아질 일이 남아 있을까 내내 의문했는데.


김금희는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생각해 봐. 너에게는 지금보다 더한 혹독한 과거가 있지 않느냐고. 그런 식이 폭력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너의 과거는. 미숙하고 실수가 많았지만 잘 이겨내고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았냐고 최대한의 부드러움으로 위무해 준다. 시련이 시련이지 않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별하고 상실하고 실수하는 내내 도망치지 않고 살아왔다는 일에 어깨를 다독여준다. 3개월 동안 고택에 틀어박혀 족보 정리를 한 과거를 회상하는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어찌할 수 없음의 연속을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발생했다고 믿었지만 그걸 또 부정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면접의 시간은 당신의 과거는 어디에서 왔습니까의 지루한 질문과 답을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 몇 줄로 요약된 과거는 현재의 나를 판단하는 근거로써 효력이 있을까. 지금까지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무얼 했냐는 질문에 무서워서라는 멍청한 답을 들려주는 식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당연히 모면은 안됐다. 「초아」에서 나는 단어 하나를 배웠다. 바로 '빠손'. 빠른 손절이라는 줄임말로 과거든 현재든 부정적인 상황과는 빠손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깨달음이 찾아오게 만든 말이었다.


빠손 하면서 살자.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그렇게 말하는 책이다. 다들 실수하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간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일이 더 꼬이지 않게 만들면서 그러려면 미안하다고 내가 이상한 식으로 너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사과는 꼭 하자라고 이야기한다. 오늘 아침에 본 《인간극장》 〈열두 살 건호, 손끝으로 세상을 보다〉 편에서 건호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질문 미래에 어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이유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에도 무섭지 않다고 했다. 현재는 무섭지 않고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다. 열두 살 건호는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슬픈 건 자꾸만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의 주인공들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낸다. 김금희는 그들에게 미래를 주지 않는다. 다만 현재 취해야 할 행동, 말 한마디를 남겨 놓고 끝을 맺는다. 그것만이 최선이라는 식이다.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새벽 두, 세시가 넘는 야근과 박봉, 업무 스트레스를 3년만 버티면 경력자가 되어 선택이 폭이 넓어지고 좋아진다고 했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할게요, 하겠습니다 같은 무책임한 말을 하며 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안다. 누군가들이 호언장담하는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공산이 크며 현재가 무너지면 미래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불확실한 낙관의 미래를 기대하기 보다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를 읽어가는 동안 훼손된 나 자신을 일부 복구할 수 있었다. 김금희는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의 훼손됨을 무방비하게 놔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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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안갑의 살인 시인장의 살인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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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와중에 정신없이 『마안갑의 살인』을 읽었다. 왜 정신이 없었는가 하면 이번 주 가장 더운 날 세 군데로 면접을 보러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몰랐지. 그동안 집순이 모드여서 이렇게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면접 보러 다닐 거라고 사둔 나름 정장스러운 검은 바지에 KF94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 나가자마자 큰일 났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다행히 가방에 부채 하나는 챙겼다. 서랍장에 고이 모셔둔 손풍기를 가져왔어야 하는데. 사 놓으면 뭐 하나. 제대로 쓰지를 못하고.


지금부터 면접 썰 풉니다. 혹시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마안갑의 살인』의 구성, 내용, 추리에 사용된 트릭을 알고 싶어 검색해 들어오신 분들이 있다면 건너뛰셔도 됩니다. 쓰긴 쓸 건데요. 언제 쓸진 몰라서요. 처음 찾아간 곳은 마음에 들었다. 급여만 빼고. 먼저 나를 보자마자 급여가 얼만지 알려주었다. 난 이게 제일 중요하다. 우리가 돈 벌자고 일하는 건데 사람 앞에 앉혀 놓고 훈계, 자랑, 조언을 하는 건 참 이상한 일 아닌가. 사실 이런 곳이 태반이다. 바로 업무 내용을 알려주는데 당황했다. 정중히 사양했다. 내가 생각하는 급여의 조건과 맞지 않는다고.


두 번째 간 곳은. 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겠지만 급여를 물었는데 네이버 계산기로 계산해 보라고 했다. 순간 당황.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정확한 급여를 알려줘야지. 안 그렇나요. 이런 게 보편적인 일인가요. 또 나만 모른 건가요. 세 번째 간 곳 역시 급여, 수당, 상여, 복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예의 차린 훈계와 질책을 들어야 했다. 이런 게 압박 면접인가. 나는 좀 멍청해서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시간이 지나고서야 현타가 세게 온다.


영혼과 육체가 탈탈 털리고 집으로 돌아와 『마안갑의 살인』을 읽었다. 네. 지금부터 본격 리뷰입니다. 오늘 하루 힘들었던 게 엷어질 만큼 내용은 흥미진진했다.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과도 이어지는 내용인 듯하다. 책을 사 놓고는 습관적으로 안 읽은 것 같은데. 『시인장의 살인』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때 겪었던 이야기가 초반에 나온다. 대학교 추리 동호회 회장 하무라와 회원 겐자키는 오컬트 잡지에 실린 예언 기사에 주목한다. 익명의 독자가 보낸 편지에는 정확한 시간에 사건을 예고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들은 예언가가 살고 있으리라고 추측하는 마을로 떠난다.


과거 M 기관이라는 곳에서 초능력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접한다. 전국에서 사람들을 모아 초능력 실험을 했다는 곳이다. 겐자키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곳은 마다라메 기관이라는 곳으로 실재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기관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마을로 떠난다. 소름 끼치도록 놀라운 예언을 하는 예언자의 존재 역시 알고 싶어서.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두 명의 고등학생을 만난다. 그들 역시 예언자가 살고 있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하무라와 겐자키, 두 명의 고등학생은 마을로 진입하고 곧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기괴하게도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명의 마을 주민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그들이 만날 수 있었던 건 성묘를 하러 온 여자, 고장 난 차를 고치기 위해 여자를 따라온 아버지와 아들, 오토바이에 기름이 떨어져 구하러 온 남자였다. 마을을 배회하던 중 다리 건너 상자 모양을 한 건물을 발견한다. 마안갑이라는 건물은 이름답게 상자처럼 생겼다. 그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그때부터 기괴한 일이 시작된다. 이틀 동안 네 명의 사람이 죽는다는 예언을 듣게 되는 것이다.


한 공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건을 던져 놓는다. 전통적인 추리 소설 방식이다. 누가 범인이어도 의심스럽지 않을 상황에서 추리 동호회 회장과 회원은 그들만의 추리를 펼쳐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다. 면접 보고 영혼 탈탈 털려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마안갑의 살인』이었다.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야 밝혀지는 반전 때문에 놀랍다. 전작 『시인장의 살인』도 재미있을 듯하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예언자가 존재해 우리의 운명을 알려준다면 과연 미래는 바뀔 수 있을 것인가.


면접을 보고 버스를 탔던 그 시각. 다른 도시에서는 버스 위로 건물이 붕괴되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도로에 차와 버스가 지나갔는데 1초 차이로 버스 하나는 사고를 피했다. 구조된 사람보다 사망자가 더 많았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지도 못할 만큼 안타깝고 슬펐다. 『마안갑의 살인』에는 두 명의 예언자가 나온다. 그들은 예언을 하지만 미래를 바꾸지는 못했다. 예언에 갇혀 살았다. 그럼에도 예언자가 소설 밖으로 나와 정차하지 말고 그냥 가라고 말해주었더라면 하는 논리가 결여된 상상을 했다. 『마안갑의 살인』을 읽는 며칠은 정신없었다. 소설의 내용 역시 정신없이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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