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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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나올 수 있냐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나갈 수가 없다고. 다른 곳에서 연락이 왔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구직 활동을 하고 첫 합격 전화 비슷한 거였는데. 비슷한 거라고 쓴 이유는 누구누구 씨, 당신은 합격입니다도 아니고 대뜸 내일부터 나올 수 있냐는 질문으로 통보해온 거라 그렇게 썼다. 면접 볼 때도 느꼈지만 예의가 없었다. 그 예의 없음을 전화로도 뽐내고 있었다. 지금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다. 어디라도 불러주면 네, 네 가야 할 판이다.


일주일이 흐르고서도 내가 왜 그랬을까를 생각한다. 그동안 많은 곳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넣었는데 그때 그 전화 이후로 면접 보라고 연락조차 오지 않아 더 그렇다. 가야 했을까. 아니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나는 느꼈으니까. 상대를 향한 무시와 조롱, 떠 본다는 식의 질문을 듣는 내내 나는 '훼손' 되었다고 그래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유를 찾아가고 있다. 김금희의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를 읽어가며 내가 취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의 이유를 알았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에 담긴 일곱 편의 소설 중 어느 것 하나 아프지 않은 소설이 없었다. 현재의 '나'가 기억하는 과거 속 '나'의 병신 같음 때문에 그걸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모습 때문에. 소설을 읽는 현실의 나의 더 병신 같은 행동 때문에. 김금희의 인물들은 과거 안에서 살아간다. 과거 보다 아주 조금 괜찮은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딱히 행복하다고도 할 수 없는 지금에서 과거는 어떻게든 치유해 줘야 할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치유가 될까. 상황을 나아지게 할 여력조차 없는 과거 속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훼손' 당하는 것 밖에는 없었는데.


미숙한 시간 안에서 그보다 더한 미숙한 자신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김금희의 주인공들은 행복이라는 사치조차 부릴 수 없었다. 다만 고통스럽지 않기를 누군가에게 나의 상처를 떠넘기고 홀가분해 하는 자신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다. 삼수생과 적응 못하는 의대생의 한 시절을 담아낸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을 읽으며 내가 면접에서 느꼈던 기분은 수모와 모멸이라는 구체성이 확실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시간을 그 짧은 시간 동안 훼손 당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나는 그곳에 가지 못하겠다는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현실의 내가 당하고 느꼈던 수치와 모욕은 나라도 그걸 나 자신에게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김금희의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의 소설들이 말해준다. 앞으로 어떤 일이 찾아올지 알 수 없으며 바닥을 친 이상 조금씩 올라갈 일만 남은 것이라고 다독여 준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면접을 보는 동안 경험하지 않아도 좋을 일들을 겪으면서(실물과 사진이 다르다. 그 소리를 굳이 두 번, 세 번 해댔다. 마스크를 내려 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이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며. 다르긴 뭐가 다를까. 얼굴 보고 뽑는다는 걸까. 그래봐야 마스크를 내내 쓰고 있어야 하는데.) 좋아질 일이 남아 있을까 내내 의문했는데.


김금희는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생각해 봐. 너에게는 지금보다 더한 혹독한 과거가 있지 않느냐고. 그런 식이 폭력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너의 과거는. 미숙하고 실수가 많았지만 잘 이겨내고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았냐고 최대한의 부드러움으로 위무해 준다. 시련이 시련이지 않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별하고 상실하고 실수하는 내내 도망치지 않고 살아왔다는 일에 어깨를 다독여준다. 3개월 동안 고택에 틀어박혀 족보 정리를 한 과거를 회상하는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어찌할 수 없음의 연속을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발생했다고 믿었지만 그걸 또 부정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면접의 시간은 당신의 과거는 어디에서 왔습니까의 지루한 질문과 답을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 몇 줄로 요약된 과거는 현재의 나를 판단하는 근거로써 효력이 있을까. 지금까지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무얼 했냐는 질문에 무서워서라는 멍청한 답을 들려주는 식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당연히 모면은 안됐다. 「초아」에서 나는 단어 하나를 배웠다. 바로 '빠손'. 빠른 손절이라는 줄임말로 과거든 현재든 부정적인 상황과는 빠손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깨달음이 찾아오게 만든 말이었다.


빠손 하면서 살자.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그렇게 말하는 책이다. 다들 실수하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간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일이 더 꼬이지 않게 만들면서 그러려면 미안하다고 내가 이상한 식으로 너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사과는 꼭 하자라고 이야기한다. 오늘 아침에 본 《인간극장》 〈열두 살 건호, 손끝으로 세상을 보다〉 편에서 건호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질문 미래에 어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이유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에도 무섭지 않다고 했다. 현재는 무섭지 않고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다. 열두 살 건호는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슬픈 건 자꾸만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의 주인공들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낸다. 김금희는 그들에게 미래를 주지 않는다. 다만 현재 취해야 할 행동, 말 한마디를 남겨 놓고 끝을 맺는다. 그것만이 최선이라는 식이다.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새벽 두, 세시가 넘는 야근과 박봉, 업무 스트레스를 3년만 버티면 경력자가 되어 선택이 폭이 넓어지고 좋아진다고 했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할게요, 하겠습니다 같은 무책임한 말을 하며 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안다. 누군가들이 호언장담하는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공산이 크며 현재가 무너지면 미래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불확실한 낙관의 미래를 기대하기 보다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를 읽어가는 동안 훼손된 나 자신을 일부 복구할 수 있었다. 김금희는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의 훼손됨을 무방비하게 놔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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