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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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읽고는 바로 책을 덮어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웬만하면 읽으려고 마음먹은 책은 끝까지 다 읽기에 재미가 없다 싶어도 그대로 읽는다. 책을 덮는 경우는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와. 미쳤다. 흥미진진을 넘어서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겠는데. 심장아, 나대지 마. 이러면서 덮는다. 저 혼자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아껴 뒀다가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책장을 연다.


박지리의 데뷔작 『합★체』가 그랬다. 그때도(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읽었다. 어쩌다가, 진짜. 우연히. 인생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내 인생 소설 1순위에 올라와 있다. 다른 어떤 소설에게도 1위 자리를 내어준 적 없다. 살아 있기 전까지 매해 한 권의 소설을 꾸준히 낸 소설가 박지리. 그의 첫 장편 소설 『합★체』의 시작은 이렇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 사람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옳게 보고 있었다. 난쟁이라는 것 외에, 사람들은 아버지에 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박지리, 『합★체』中에서)


당구장 표시까지 있는 부분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인용 부분이다. 감히 내 최애 작가의 소설을 인용해? 이런 마음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부류의(난쏘공을 읽고 난쏘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급기야 문학을 하고 자신의 문학에 난쏘공을 침투 시키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책을 덮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면 읽으려고. 격한 감동을 뒤로하고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로 시작하는 문단을 읽으면서 고이 모셔둔 난쏘공을 다시 꺼내야지 생각하면서.


오합. 오체. 『합★체』의 주인공 두 명의 이름이다. 고등학교 1학년인 두 쌍둥이의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난쟁이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후회하거나 자신의 선택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백설 공주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말해주는 어머니이다. 일곱 난쟁이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안위를 지켰으면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인 왕자와 결혼한 백설 공주의 선택이. 일곱 난쟁이와 살면서 그중에 한 명과는 호감을 키웠을 것인데. 어찌 그런 선택을 했을지 의문하는 어머니.


기발하고 독특한 사고관을 가진 어머니는 난쟁이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의사에게 가보았지만 키는 유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거라는 답을 듣는 게 다였다. 남들 평균 이상으로 키가 자랄 거라는 희망이 사라진 합과 체였다. 합은 공부를 잘했고 체는 그냥 뭐. 체는 공부에 뜻은 없고 오로지 키 생각만 했다. 좋아하는 여학생 윤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함께. 가장 싫은 건 4월에 하는 신체검사였다. 윤아를 비롯한 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키가 까발려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북쪽 약수터에서 계룡산 도사를 만나면서 체의 모험 가득한 여름이 시작된다. 뱀에 물린 노인을 구해 주었고 그가 체의 고민을 듣고 비기를 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사기꾼, 사이비라고 여겼을 텐데 우리 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키 생각뿐인 체는 계도사의 말을 듣자마자 엄마 몰래 형 합과 떠날 준비를 한다. 키가 클 수 있다면 체는 뭐든지 했을 거다. 계도사의 말은 자신이 수양한 계룡산에 가서 33일 동안 수련을 하라는 것이었다.


키가 크기 위한 특별 전지훈련을 떠난 오합과 오체의 앞날에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합★체』는 특별한 소설이다. 대범하게 난쏘공의 명문장을 인용했고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쓰이고 유효할 수 있단 말이야 감탄하게 만든다. 남들이 산다는 살고 있다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늘 주눅 들어 있었고 눈치 보고 싫어도 싫다는 말 대신 좋다고 말하며 살았다, 산다. 자존감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요즘이다.


일상을 사는 나는 자주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쓴다. 타인이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싫다는 감정을 숨긴다. 대놓고 싫고 나쁘고를 표현하다 보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다.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나쁜 마음을 책으로써 엷게 만든다. 나의 나쁨을 책은 괜찮다고 해준다. 『합★체』가 그러했다.


합과 체가 약점을 돌파해 가는 이야기를 통해 나의 약점 또한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조짐이 보였다. 혼자는 힘들지만 둘은 된다. 키가 작은 그들이 합체를 하면서 아버지가 쏘아 올린 공을 되받아 골대에 넣었듯이 상처를 가진 자들끼리 연대하면 된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은 땅에 떨어졌다. 공의 속성상 다시 튀어 오른다. 튀어 오르는 공을 재빨리 잡아채서 원하는 그곳을 향해 쏜다. 인생의 승리는 매 순간 이루어질 수 있음을 『합★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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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1 소설 보다
서이제.이서수.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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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들 그렇겠지만 나이 먹어서 백수로 살려니 고충이 있었다. 국비로 컴퓨터 학원에 다녔는데 몇몇을 빼고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 속에서 최대한 나라는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 숨기려고 했지만 숨겨지지 않았던 건 이해력 부족으로 기본적인 내용을 질문하고 그걸 또 이해 못 해서 다시 질문하고 그러다가 나이까지 공개적으로 밝히고야 말았다. 물어보는데 말 안 할 수가 있나.


뭐가 될지 모르겠다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중학교 때도 안 해본 진로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온몸이 아팠다. 자기 전 파스를 붙이고 잤다. 공부도 체력이 필요한 일이다. 뭐든 안 그렇겠냐만. 자격증 공부하면서도 텔레비전은 봤다. 드라마에 아주 푹 빠져서 밤을 새우곤 했다. 식상한 전개가 빈번하게 연출됐지만 현실의 나보다 참신했다. 백수 됐다고 슬퍼하는 꼬락서니라니.


그래도 책 사는 건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설 보다 : 봄 2021』을 사고 『소설 보다 : 여름 202』1을 사고. 의무적으로 사는 책이 있는데 '소설 보다' 시리즈가 그렇다. 나의 편협한 문학적 취향을 어찌 알고 서점사에서는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을 보내온다.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 커피 한 잔 값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책을 살 수 있다니. 감탄하면서 '소설 보다' 시리즈를 산다.


봄을 건너 뛰고 여름을 읽었다. 뭔가 문학적인데. 친구라도 많으면 추천하거나 사서 주고 싶을 정도로 이번 『소설 보다 : 여름 2021』은 최고다. 대개 한 편 정도는 나의 취향과 맞지 않는데 이번에 실린 세 편의 소설 모두 근사하고 멋졌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해주고 현재의 나를 격려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나를 응원해 주는 소설들이다.


서이제의 「#바보상자스타」는 솔직히 읽지 않고 건너뛰려고 했다. 난해한 소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었다. 읽다 보니 바보 같았던 어제의 우리를 농담을 섞어가며 위로한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친해지고 싶은 사업에 실패한 청년의 넋두리는 소행성이 충돌하기 전까지 지구에서 살아남고 싶게 만들 정도로 유쾌하다. 기후 변화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인류의 미래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당신과 나 우리 모두 알고 있기에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소설이 쓰이는 그날까지.


제발 올해가 가기 전 읽어보라고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를. 백수 됐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지 않길 잘했다. 문학이 무슨 소용이냐. 이러면서 때려치우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공무원 준비해볼까 하다가 포기하길 잘했다. 그랬으면 「미조의 시대」를 읽지 못했겠지. 손목에 파스를 붙여가며 책에 밑줄을 긋고 깜지를 쓰면서 성격 파탄자가 되어 있었겠지.


회사 사정으로 권고사직을 여러 번 당한 주인공 미조가 헬조선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웃프게 그려내는 소설. 이서수는 굉장한 작가가 될 것 같다. 발랄한 김금희 같으면서 상큼한 이문구, 김종광 같다. 이야기를 써 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잠이 오는데도 끝까지 읽게 만든다. 미조와 엄마와 수영 언니의 하루가 희망적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좋은 소설은 읽고 있으면 글을 쓰게 싶게 만드는 소설이다. 이거 내 이야기잖아. 나도 쓸 수 있다. 써 보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오르고 용기까지 내게 만드는 소설.


「미조의 시대」가 그렇다. 우린 전부 「미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꿈이 있어서 나에게 미안한 시대. 꿈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가슴속에 고이 접어 둔 시대를 버텨내고 있다. 미조의 엄마가 쓰는 시가 근사했다. 대체 어떤 하루를 살아가고 있길래 시의 표현이 그러했을까. 짐작이 가면서 마음이 아프다. 한정현의 「쿄코와 쿄지」는 놀라울 정도로 광주 5·18 민주화 항쟁을 지금의 시간과 긴밀하게 연결해낸다. 앞으로도 5·18 이야기가 많이 쓰였으면 좋겠다는 한정현의 인터뷰를 잊지 않아야겠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혹독한 시간을 한정현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들려준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았을 그 시절에 살아간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이름을 바꿔가며 자신의 삶에 징검다리를 놓아가는 여성들의 연대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그리하여 너의 삶은 너의 것이라는 전언을 「쿄코와 쿄지」는 남긴다.


주어진 삶이 고통이기보다는 가끔의 기쁨일 수도 있겠다는 위안을 『소설 보다 : 여름 2021』을 통해 얻었다. 가을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머물렀던 봄을 꺼내야겠다. 노란 빛깔의 봄은 책장에 꽂혀 있다.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봄은. 여름에는 힘들었고 가을에도 힘들 예정이지만 지나간 봄이 어떠했는지 기억하고 싶다. 그때도 어렵고 막막했겠지만 봄의 소설을 읽으면 기이한 희망이 부풀어 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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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반양장) - 개정판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34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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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군대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었다. 우리는 소란하고 북적스러운 극장 안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그 시간에(한낮이었다. 그래 한낮이니까 그렇겠지.) 어디에서 아이들이 나타난 것일까. 아마도 유치원 단체 관람이지 않을까 싶다. 선생님과 부모들이 함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과자와 음료수를 든 아이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고 우리는 뒷자리에 구겨져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로알드 달과 조니 뎁을 알았다. 이후 애인이 없는 시간에 로알드 달을 읽고 조니 뎁의 출연 영화들을 하나씩 보았다. 그래도 시간이 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대체로 폭소했고 나 역시 어떤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윌리 웡카가 만들어낸 큼직한 초콜릿을 먹고 싶었다. 그 안에 황금 티켓이 있으면 더 좋고. 시간이 흘러도 보면 볼수록 좋은 영화가 있는데 그중에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포함된다. 화려한 색감과 흥미진진한 이야기. 교훈적인 결말이라서 세속의 때에 찌든 나의 영혼을 목욕 시켜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틸다』를 아직 안 읽었다니. 도대체 왜. 로알드 달의 대표작인데. 가끔 이렇다. 중요한 걸 놓치고서 중요한 일을 했다는 착각을 이어간다. 『마틸다』를 읽지 않고서 로알드 달을 읽었다고 잘난 척을 해댔다. 한국어판 『마틸다』 뒤표지에는 '독서 레벨 3 권장 연령 초등학교 5학년 이상'으로 쓰여 있다. 요즘 5학년은 생각의 깊이가 넓으니 『마틸다』를 충분히 읽을 수 있으리라. 2021년에 읽어도 문제작인 이 소설을.


설명해 무엇하랴. 마틸다는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다. 스스로 글을 깨치고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다만 부모만이 몰랐을 뿐이다. 사기로 중고차 사업을 하는 아버지. 종일 빙고 게임에 빠져 있는 어머니. 평범한 소년인 오빠 마이클. 마틸다는 아버지에게 책을 사달라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텔레비전이나 보라는 것이었다. 세 살이 된 마틸다는 집에 요리책밖에 없다는 걸 안타까워한다. 스스로 걸어가 공공 도서관에 간다. 그곳에서 펠프스 여사를 만나고 마틸다의 체계적인 독서가 시작된다.


얼마나 다행인지. 소설이지만 마틸다가 책을 읽지 못하는 이야기로 계속 가면 나 책 안 읽을 뻔했어. 다섯 살이 된 마틸다는 학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엄청난 모험을 한다. 첫눈에 마틸다가 천재임을 알아본 하니 선생님과 함께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 이상용이지만 『마틸다』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읽어야 할 소설이다. 천재 이야기꾼 로알드 달은 아동용이라고 해서 평범한 이야기를 써내지 않았다. 여성의 교육, 가혹한 학교 수업과 체벌, 방임을 일삼는 부모.


시공간을 초월해 읽는 『마틸다』에는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문제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하니 선생님의 놀라운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을 배우고 싶다. 문제가 있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한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전부를 바꿀 수 없다면 일부를 바꾸며 살아가는 것이 근사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천재 소년 마틸다와 세상을 다정하게 이해하려는 하니 선생님의 우정은 경이롭다. 요즘 뜨고 있는 대안 가족의 형태도 로알드 달은 무리 없이 그려낸다.


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세상을 힘들지 않고 살아가는 게 어렵다는 것을. 내가 그 경우다. 삶을 책으로 배웠어요의 표본이다, 내가. 빈 방에서 드러누워서 책만을 읽던 내가 뒤늦게 사람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다양한 성격과 행동의 사람들. 서툴러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책을 읽었는데. 역시 이론은 실전과 다르다. 마틸다처럼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다만 나는 하지 못하는 그 일들을 해내는 마틸다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


어린이는 어른이가 되었다. 나이를 먹고 몸집이 커졌을 뿐 세상을 대하는 건 여전히 힘들다. 어린이 적 읽은 환상과 모험이 가득한 세계가 펼쳐지는 책을 읽은 어른이는 좀 다를 수 있다. 유해보다는 무해의 방식으로 자신을 다독일 수 있다. 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할 순 없지만 죽지 않고 버티면 나아질 수 있음을 안다. 소설의 방식 대로. 이상 월요일이 두려운 일요일의 어른이가 쓴 마틸다 독후감이었습니다. 다들 마틸다 읽으셨죠. 또 나만 안 읽고 뒷북 날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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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진
이동은.정이용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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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는 부모 없이 혼자 일을 하며 동생 학비를 번다. 낮에는 청소. 밤에는 대리운전. 동생만은 대학교에 보내고 싶다. 소식이 끊긴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사망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동생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사망 신고가 되어야지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갈 수 있단다. 사망 신고서를 받기 위해 병원에 찾아가지만 밀린 병원비를 갚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수진은 친언니와 식당을 운영한다. 남편 없이 아들을 혼자 키웠다. 단골손님으로 온 임소장과 관계를 가졌는데 임신을 하고 말았다.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상황. 난감한 수진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임소장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은 정관 수술을 했다는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공무원에 합격한 아들은 여섯 살 많은 여자와 사귀고 있다. 어느 날 아들이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이동은·정이은의 만화 『진, 진』에 나오는 인물들의 사정을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한숨이 나온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 세상을 경험해 본 사람이 분명하다. 가을장마에 축축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고 음악을 틀어 놓고 등이 아파서 누워 있었다. 업무에 관련된 책을 펼쳐만 놓은 채. 밑줄도 긋고 암기도 하면서 읽어야지 하는 마음뿐.


에라. 모르겠다. 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실제로 어떻게든 되는 걸 오늘에야 경험했다. 그러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라고 쓰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드러누워서 내일 일을 걱정하고 있다. 책을 읽자. 숫자 가득인 책이 아닌 어둡고 칙칙한 그림체와 짤막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진, 진』을 펼쳤다. 순식간에 읽을 줄 알았는데 세 시간 넘게 걸려서 읽었다.


진아와 수진은 딱 한 번 만난다. 진아가 대리운전을 하고 차가 없어 한밤중 길에 서 있는 걸 수진이 발견한다. 차에 탄 진아와 수진이 대화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걸로 끝이다. 이후 둘은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이름에 진이 들어가는 두 여자의 삶을 담담하게 『진, 진』은 펼쳐 놓는다. 두 여성 다 사는 게 녹록하지 않다. 전문적인 직업 없이 그날 벌어 그날을 사는 삶.


나 자신도 버거운데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삶. 그게 힘들고 어려울 걸 알기에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 돈이 좀 생기면 책을 사고 굿즈를 고르고(장바구니를 털어 장바구니를 얻었다. 무려 고흐의 그림이 프린트된 장바구니다!) 책을 받는다. 읽고 싶은 책이 한가득. 그거면 됐다. 상황 대처 능력이 떨어져 바보 같은 행동을 종종 한다. 자책을 하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


책을 읽으면 좀 낫다. 『진, 진』 같이 현실의 단면을 예리하게 잘라내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나 혹은 당신의 이야기를 읽으면. 나만 바보처럼 사는 건 아니었고 그건 틀리지 않고 다르다는 그럴 수 있다는 공감을 보내주는 책. 『진, 진』은 그런 책이다. 공무원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사망 신고를 마친 수진의 독백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그때는 안 됐지만 오늘은 된다.'


『진, 진』에 등장하는 여성의 삶은 서글픈데 꿋꿋하다. 타인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자격이 되지 않으니까. 당사자는 그걸 바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 오늘도 나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읽는다. 이야기가 내 안에서 시와 소설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면접을 볼 때 딱 두 가지를 말했다. 주말에는 쉬고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하는 삶.


고비가 나의 삶이라고 말하는 수진. 그때는 안 됐지만 오늘은 되는 걸 경험한 진아.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진, 진들이 살아가고 있다. 매일 하나씩 경험하는 무시와 홀대를 견딜 수 있는 건 집에 돌아와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진, 진』을 읽은 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현명하게 굴지 못 했던 것에 대한 무력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진, 진』이 곁에 있어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두 여성이 헤쳐 나가는 허구 속 삶이 진짜라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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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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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어서 취준생으로 살기 쉽지 않더라. 사람은 자기 힘든 것 밖에 보지 못하니까. 나는 그 시절이 힘들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그래도 괜찮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걸 의식하기에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게 함정.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나만 나를 미치도록 신경 써서 괴롭게 한다. 쓸데없는 걱정을 만들어서 고달프게 만든다. 직업이 있든 없든. 놀고먹든. 매일 누워서 책만 읽고 그러다 잠이 들든 말든.


나는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데 나를 아는 극소수의 몇몇 사람은 젊다고 여긴다. 놀랍다. 나이 많다고 면접 볼 기회조차 쉽게 얻지 못했다. 겨우 본 면접에서는 나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운전면허증이 없다는 말에 그 나이 먹도록 뭐 했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빙자한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아, 애증의 운전면허증. 딸지 말지는 추후에 고민해 보는 걸로.


오늘 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또라는 부사를 쓴 까닭은 이상한 이야기를 자주 듣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라는 것이 있단다. 국적을 불문하고 한 번 죽었다 다시 깨어난 이들의 증언이 유사하다는 것. 고로 죽으면 끝이 아니라 죽으면 어딘가로 가게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말이지만 사후 세계가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일찍 죽은 소설가 박지리가 못다 쓴 소설을 쓰고 있으면 어떨까. 10년만 더 살고 싶다고 말하던 엄마도 그곳에서 아프지 않게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독특한 소설이다. 희곡과 소설의 갈래가 섞여 있다. 소설의 첫 부분은 희곡의 무대장치를 설명하는 해설로 시작한다. 마흔여덟 번째 면접을 보러 가는 M. 취준생으로 살기 전에는 이런 말은 전부 과장인 줄 알았다. 이력서를 100통 넣었다. 몇십 번째 면접을 보러 간다. 이런 이야기들. 내가 겪어보니 알겠다. 그건 과장이 아닌 축소일 수도 있겠다는.


M이 보러 가는 면접장의 풍경은 서글프다. 취준생은 누구나 겪었을 모습. 면접을 보러 가서 한없이 기다리다 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면접을 봤는데 알고 보니 사장이 아니었다는. 괴담이 아닐까 의심 되는 에피소드. 그 후에 M은 출제자의 의도가 궁금하고 나아가 출제자의 인성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을 받고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하고 합격한다. 그걸로 끝? 그러면 너무 재미없지. 이건 소설인데. M은 연수를 하기 위해 합숙소에 들어간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며 M은 변해간다.


전자책으로 읽어서인지 대화가 잘렸다. 어떻게든 종이책의 원문대로 보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M이 착각한 부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연수원에서 M은 평가표 하나를 본다. 13번에게 적힌 X를 보면서 자신이 13번이 아닐까 고민한다. 결국 M은 자신이 13번이라고 믿는다. 합격을 목표로 조장을 맡고 집 짓는 일에 공을 들인다. 아침밥까지 하면서. 사는 거. 참 어렵다. 취업이 되어도 문제인 게 업무 파악하고 인간관계 맺는 일이 만만치 않다.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은 박지리는 어떤 마음으로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를 썼을까이다. 생전에 인터뷰했던 기사를 찾아보니 대학에서 공부한 행정학이 어려워 소설을 썼다고 한다. 취업 공부하기 전에는 문학이 가장 어려웠다. 능력은 안 되는데 글은 잘 쓰고 싶었다. 열등감이 먼저 생겼다. 책을 읽기 전 작가의 나이를 먼저 봤다. 어리다. 나보다. 이제 이렇게 되는구나. 먹고살려고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아, 문학의 언어는 얼마나 다정했던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쉽게 쓰자는 마음.


변해가는 M의 모습은 소설 속 인물이라기보다 현실 세계 모두의 모습이다. 망상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나에게 단 한 명의 누구라도 위로와 용기의 말을 줄 수 있다면 망상의 지점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들어주는 누군가. 언젠가는 죽을 나. 살아있는 동안 책 많이 읽을 거다. 사후 세계에 가서 작가들과 신나게 떠들려고. 그곳에서 쓴 작품들도 읽어야지. 죽어서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그런 망상으로 버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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