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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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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읽고는 바로 책을 덮어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웬만하면 읽으려고 마음먹은 책은 끝까지 다 읽기에 재미가 없다 싶어도 그대로 읽는다. 책을 덮는 경우는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와. 미쳤다. 흥미진진을 넘어서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겠는데. 심장아, 나대지 마. 이러면서 덮는다. 저 혼자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아껴 뒀다가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책장을 연다.
박지리의 데뷔작 『합★체』가 그랬다. 그때도(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읽었다. 어쩌다가, 진짜. 우연히. 인생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내 인생 소설 1순위에 올라와 있다. 다른 어떤 소설에게도 1위 자리를 내어준 적 없다. 살아 있기 전까지 매해 한 권의 소설을 꾸준히 낸 소설가 박지리. 그의 첫 장편 소설 『합★체』의 시작은 이렇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 사람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옳게 보고 있었다. 난쟁이라는 것 외에, 사람들은 아버지에 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박지리, 『합★체』中에서)
당구장 표시까지 있는 부분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인용 부분이다. 감히 내 최애 작가의 소설을 인용해? 이런 마음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부류의(난쏘공을 읽고 난쏘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급기야 문학을 하고 자신의 문학에 난쏘공을 침투 시키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책을 덮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면 읽으려고. 격한 감동을 뒤로하고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로 시작하는 문단을 읽으면서 고이 모셔둔 난쏘공을 다시 꺼내야지 생각하면서.
오합. 오체. 『합★체』의 주인공 두 명의 이름이다. 고등학교 1학년인 두 쌍둥이의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난쟁이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후회하거나 자신의 선택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백설 공주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말해주는 어머니이다. 일곱 난쟁이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안위를 지켰으면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인 왕자와 결혼한 백설 공주의 선택이. 일곱 난쟁이와 살면서 그중에 한 명과는 호감을 키웠을 것인데. 어찌 그런 선택을 했을지 의문하는 어머니.
기발하고 독특한 사고관을 가진 어머니는 난쟁이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의사에게 가보았지만 키는 유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거라는 답을 듣는 게 다였다. 남들 평균 이상으로 키가 자랄 거라는 희망이 사라진 합과 체였다. 합은 공부를 잘했고 체는 그냥 뭐. 체는 공부에 뜻은 없고 오로지 키 생각만 했다. 좋아하는 여학생 윤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함께. 가장 싫은 건 4월에 하는 신체검사였다. 윤아를 비롯한 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키가 까발려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북쪽 약수터에서 계룡산 도사를 만나면서 체의 모험 가득한 여름이 시작된다. 뱀에 물린 노인을 구해 주었고 그가 체의 고민을 듣고 비기를 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사기꾼, 사이비라고 여겼을 텐데 우리 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키 생각뿐인 체는 계도사의 말을 듣자마자 엄마 몰래 형 합과 떠날 준비를 한다. 키가 클 수 있다면 체는 뭐든지 했을 거다. 계도사의 말은 자신이 수양한 계룡산에 가서 33일 동안 수련을 하라는 것이었다.
키가 크기 위한 특별 전지훈련을 떠난 오합과 오체의 앞날에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합★체』는 특별한 소설이다. 대범하게 난쏘공의 명문장을 인용했고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쓰이고 유효할 수 있단 말이야 감탄하게 만든다. 남들이 산다는 살고 있다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늘 주눅 들어 있었고 눈치 보고 싫어도 싫다는 말 대신 좋다고 말하며 살았다, 산다. 자존감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요즘이다.
일상을 사는 나는 자주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쓴다. 타인이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싫다는 감정을 숨긴다. 대놓고 싫고 나쁘고를 표현하다 보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다.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나쁜 마음을 책으로써 엷게 만든다. 나의 나쁨을 책은 괜찮다고 해준다. 『합★체』가 그러했다.
합과 체가 약점을 돌파해 가는 이야기를 통해 나의 약점 또한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조짐이 보였다. 혼자는 힘들지만 둘은 된다. 키가 작은 그들이 합체를 하면서 아버지가 쏘아 올린 공을 되받아 골대에 넣었듯이 상처를 가진 자들끼리 연대하면 된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은 땅에 떨어졌다. 공의 속성상 다시 튀어 오른다. 튀어 오르는 공을 재빨리 잡아채서 원하는 그곳을 향해 쏜다. 인생의 승리는 매 순간 이루어질 수 있음을 『합★체』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