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여름 2021 소설 보다
서이제.이서수.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뭐 다들 그렇겠지만 나이 먹어서 백수로 살려니 고충이 있었다. 국비로 컴퓨터 학원에 다녔는데 몇몇을 빼고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 속에서 최대한 나라는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 숨기려고 했지만 숨겨지지 않았던 건 이해력 부족으로 기본적인 내용을 질문하고 그걸 또 이해 못 해서 다시 질문하고 그러다가 나이까지 공개적으로 밝히고야 말았다. 물어보는데 말 안 할 수가 있나.


뭐가 될지 모르겠다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중학교 때도 안 해본 진로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온몸이 아팠다. 자기 전 파스를 붙이고 잤다. 공부도 체력이 필요한 일이다. 뭐든 안 그렇겠냐만. 자격증 공부하면서도 텔레비전은 봤다. 드라마에 아주 푹 빠져서 밤을 새우곤 했다. 식상한 전개가 빈번하게 연출됐지만 현실의 나보다 참신했다. 백수 됐다고 슬퍼하는 꼬락서니라니.


그래도 책 사는 건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설 보다 : 봄 2021』을 사고 『소설 보다 : 여름 202』1을 사고. 의무적으로 사는 책이 있는데 '소설 보다' 시리즈가 그렇다. 나의 편협한 문학적 취향을 어찌 알고 서점사에서는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을 보내온다.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 커피 한 잔 값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책을 살 수 있다니. 감탄하면서 '소설 보다' 시리즈를 산다.


봄을 건너 뛰고 여름을 읽었다. 뭔가 문학적인데. 친구라도 많으면 추천하거나 사서 주고 싶을 정도로 이번 『소설 보다 : 여름 2021』은 최고다. 대개 한 편 정도는 나의 취향과 맞지 않는데 이번에 실린 세 편의 소설 모두 근사하고 멋졌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해주고 현재의 나를 격려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나를 응원해 주는 소설들이다.


서이제의 「#바보상자스타」는 솔직히 읽지 않고 건너뛰려고 했다. 난해한 소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었다. 읽다 보니 바보 같았던 어제의 우리를 농담을 섞어가며 위로한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친해지고 싶은 사업에 실패한 청년의 넋두리는 소행성이 충돌하기 전까지 지구에서 살아남고 싶게 만들 정도로 유쾌하다. 기후 변화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인류의 미래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당신과 나 우리 모두 알고 있기에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소설이 쓰이는 그날까지.


제발 올해가 가기 전 읽어보라고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를. 백수 됐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지 않길 잘했다. 문학이 무슨 소용이냐. 이러면서 때려치우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공무원 준비해볼까 하다가 포기하길 잘했다. 그랬으면 「미조의 시대」를 읽지 못했겠지. 손목에 파스를 붙여가며 책에 밑줄을 긋고 깜지를 쓰면서 성격 파탄자가 되어 있었겠지.


회사 사정으로 권고사직을 여러 번 당한 주인공 미조가 헬조선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웃프게 그려내는 소설. 이서수는 굉장한 작가가 될 것 같다. 발랄한 김금희 같으면서 상큼한 이문구, 김종광 같다. 이야기를 써 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잠이 오는데도 끝까지 읽게 만든다. 미조와 엄마와 수영 언니의 하루가 희망적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좋은 소설은 읽고 있으면 글을 쓰게 싶게 만드는 소설이다. 이거 내 이야기잖아. 나도 쓸 수 있다. 써 보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오르고 용기까지 내게 만드는 소설.


「미조의 시대」가 그렇다. 우린 전부 「미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꿈이 있어서 나에게 미안한 시대. 꿈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가슴속에 고이 접어 둔 시대를 버텨내고 있다. 미조의 엄마가 쓰는 시가 근사했다. 대체 어떤 하루를 살아가고 있길래 시의 표현이 그러했을까. 짐작이 가면서 마음이 아프다. 한정현의 「쿄코와 쿄지」는 놀라울 정도로 광주 5·18 민주화 항쟁을 지금의 시간과 긴밀하게 연결해낸다. 앞으로도 5·18 이야기가 많이 쓰였으면 좋겠다는 한정현의 인터뷰를 잊지 않아야겠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혹독한 시간을 한정현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들려준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았을 그 시절에 살아간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이름을 바꿔가며 자신의 삶에 징검다리를 놓아가는 여성들의 연대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그리하여 너의 삶은 너의 것이라는 전언을 「쿄코와 쿄지」는 남긴다.


주어진 삶이 고통이기보다는 가끔의 기쁨일 수도 있겠다는 위안을 『소설 보다 : 여름 2021』을 통해 얻었다. 가을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머물렀던 봄을 꺼내야겠다. 노란 빛깔의 봄은 책장에 꽂혀 있다.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봄은. 여름에는 힘들었고 가을에도 힘들 예정이지만 지나간 봄이 어떠했는지 기억하고 싶다. 그때도 어렵고 막막했겠지만 봄의 소설을 읽으면 기이한 희망이 부풀어 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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