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진
이동은.정이용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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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는 부모 없이 혼자 일을 하며 동생 학비를 번다. 낮에는 청소. 밤에는 대리운전. 동생만은 대학교에 보내고 싶다. 소식이 끊긴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사망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동생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사망 신고가 되어야지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갈 수 있단다. 사망 신고서를 받기 위해 병원에 찾아가지만 밀린 병원비를 갚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수진은 친언니와 식당을 운영한다. 남편 없이 아들을 혼자 키웠다. 단골손님으로 온 임소장과 관계를 가졌는데 임신을 하고 말았다.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상황. 난감한 수진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임소장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은 정관 수술을 했다는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공무원에 합격한 아들은 여섯 살 많은 여자와 사귀고 있다. 어느 날 아들이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이동은·정이은의 만화 『진, 진』에 나오는 인물들의 사정을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한숨이 나온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 세상을 경험해 본 사람이 분명하다. 가을장마에 축축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고 음악을 틀어 놓고 등이 아파서 누워 있었다. 업무에 관련된 책을 펼쳐만 놓은 채. 밑줄도 긋고 암기도 하면서 읽어야지 하는 마음뿐.


에라. 모르겠다. 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실제로 어떻게든 되는 걸 오늘에야 경험했다. 그러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라고 쓰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드러누워서 내일 일을 걱정하고 있다. 책을 읽자. 숫자 가득인 책이 아닌 어둡고 칙칙한 그림체와 짤막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진, 진』을 펼쳤다. 순식간에 읽을 줄 알았는데 세 시간 넘게 걸려서 읽었다.


진아와 수진은 딱 한 번 만난다. 진아가 대리운전을 하고 차가 없어 한밤중 길에 서 있는 걸 수진이 발견한다. 차에 탄 진아와 수진이 대화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걸로 끝이다. 이후 둘은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이름에 진이 들어가는 두 여자의 삶을 담담하게 『진, 진』은 펼쳐 놓는다. 두 여성 다 사는 게 녹록하지 않다. 전문적인 직업 없이 그날 벌어 그날을 사는 삶.


나 자신도 버거운데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삶. 그게 힘들고 어려울 걸 알기에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 돈이 좀 생기면 책을 사고 굿즈를 고르고(장바구니를 털어 장바구니를 얻었다. 무려 고흐의 그림이 프린트된 장바구니다!) 책을 받는다. 읽고 싶은 책이 한가득. 그거면 됐다. 상황 대처 능력이 떨어져 바보 같은 행동을 종종 한다. 자책을 하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


책을 읽으면 좀 낫다. 『진, 진』 같이 현실의 단면을 예리하게 잘라내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나 혹은 당신의 이야기를 읽으면. 나만 바보처럼 사는 건 아니었고 그건 틀리지 않고 다르다는 그럴 수 있다는 공감을 보내주는 책. 『진, 진』은 그런 책이다. 공무원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사망 신고를 마친 수진의 독백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그때는 안 됐지만 오늘은 된다.'


『진, 진』에 등장하는 여성의 삶은 서글픈데 꿋꿋하다. 타인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자격이 되지 않으니까. 당사자는 그걸 바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 오늘도 나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읽는다. 이야기가 내 안에서 시와 소설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면접을 볼 때 딱 두 가지를 말했다. 주말에는 쉬고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하는 삶.


고비가 나의 삶이라고 말하는 수진. 그때는 안 됐지만 오늘은 되는 걸 경험한 진아.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진, 진들이 살아가고 있다. 매일 하나씩 경험하는 무시와 홀대를 견딜 수 있는 건 집에 돌아와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진, 진』을 읽은 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현명하게 굴지 못 했던 것에 대한 무력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진, 진』이 곁에 있어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두 여성이 헤쳐 나가는 허구 속 삶이 진짜라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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