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방 사계절 1318 문고 128
최양선 지음 / 사계절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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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선의 소설집 『달의 방』을 다 읽었고 리뷰를 쓰려고 책 사진을 찍었고 노트북을 켰다. 얼마 전에 새로 산 자이언트 춘식이 소파에 앉았다. 살고 있는 집에서 이사를 가야 하는 두 모녀의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 「달의 방」을 먼저 읽었다. 실린 순서대로 읽지는 않고 후루룩 넘기다가 맘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읽어가기 시작했다. 책을 받아 보면 알겠지만 얇고 가벼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렸고 맘만 먹는다면 앉은 혹은 누운 자리에서 금방 한 권을 읽을 수 있으리라.


일주일을 붙잡고 있었고 쓰려고 했다가 책에 대한 이야기는 놔두고 엉뚱하게 신세한탄을 썼다.(신세한탄의 이야기는 조만간 손을 봐서 올릴 예정이다.) 다시 책의 이야기로 간다. 한창 마트에서 일하던 엄마가 저녁에 들어왔다. 집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다고 한다. 전세 기간이 끝나서 빨리 집을 알아봐야 한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밤에 집을 보러 다닌다. 밤에.


환한 낮에도 보이지 않는 집의 결점은 밤에는 더더욱 드러나지 않는다. 엄마와 내가 집을 보러 가는 그 밤 개기 월식이 일어난다. 달이 보이지 않는 밤에 중개사와 집을 보러 다니지만 마땅한 집을 찾는 건 어렵다. 마지막 집에 도착했을 때 집에 혼자 있는 아이와 만난다. 친구가 없으리라는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어른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달의 방」은 끝난다.


정말 다행히도 더 이상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 아주 잠깐 놀러 온 지구별에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간의 힘듦은 잊어버려도 되겠다, 달랜다. 청소 노동자 할머니와 살고 있는 '나'의 일상을 담은 「붉은 조끼」에서 투쟁이란 살아가는 것이라고 배운다. 제도와 법을 바꾸려고 싸우는 게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고 살아남는 일이 위대한 투쟁이라는걸. 최양선의 소설이 좋은 이유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지키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는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 아이들의 이야기. 나는 아주 오랫동안 웃기고 이상한 아이들과 함께 할 줄 알았다. 힘든 시험 기간이지만 웃으면서 공부를 하러 오고 시험 기간인데도 시내에 놀러 다니는. 학원에 왜 안 왔냐고 전화를 걸면 분명 놀고 있음에도 지금 가고 있다고 뻥을 치는. 말도 안 되는 오답을 써 놓고도 그게 왜 오답인지 어리둥절해하는. 그런 아이들과 함께.


『달의 방』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실제로 만난다면 함께 떡볶이와 순대를 먹고 싶다. 문구점에 가서 학용품을 선물해 주고 힘이 들면 연락하라고 주저 없이 전화번호를 건네주고 싶다. 착하고 착해서 남에게 받은 상처마저도 자기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아이들. 소리 내어 마음껏 울지도 못하면서 누군가 울고 있으면 울음의 이유를 알아내어 해결해 주려고 하는 아이들이 『달의 방』에는 있다.


어떤 일이 생기든 너의 잘못이 아니다.


『달의 방』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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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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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즈키 유코의 『달콤한 숨결』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소설이다. 일요일 아침부터 읽으면서 일요일을 즐겼다. 오후만 남은 일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천장을 보면서 아, 오늘은 쉬는 날이었지. 그러곤 머리맡에 놓아둔 전자책 리더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한 여성이 병원에서 상담을 받는 장면으로 『달콤한 숨결』은 시작한다. 좋아. 시작해 보자.


꼬박 누워서 세 시간을 읽었다. 이야기는 두 개로 나뉜다. 어린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주부 다카무라 후미에의 이야기.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하타와 나쓰키의 이야기. 각각의 사건은 후반부에 가면서 하나로 모아진다. 후미에는 마트 전단지를 보면서 싼 물품을 찾는 게 하루 일과이다. 남편 혼자 돈을 벌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아서 옷 한 벌 사는 것도 고민이다. 결혼하기 전과 달라진 몸 역시.


빠듯한 생활비를 걱정하는 하루지만 후미에는 각종 이벤트에 응모하면서 기쁨을 찾는다. 어느 날 디너쇼에 당첨되면서 후미에의 인생이 달라진다. 디너쇼가 끝나고 동창인 가즈코를 만난다. 기억에는 없지만 동창이라고 반갑게 다가오는 가즈코와 이야기를 나눈다. 가즈코는 후미에를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후미에는 가즈코의 제안을 듣는다.


화장품 대표를 맡아 달라는 제안. 후미에는 놀란다. 자신은 살이 찌고 자신감도 약해진 상태다. 이런 몰골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다. 가즈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후미에는 예쁜 외모로 인기 쟁이었다. 다이어트를 하고 조금만 관리를 한다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부추긴다. 후미에는 급하게 살을 빼고 결혼하기 전의 시절로 돌아간다. 얼굴에 흉이 있는 가즈코 대신 후미에는 대표를 맡아 화장품 설명회 강연을 하면서 회원을 늘려 나간다.


가마쿠라 별장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남자가 흉기에 맞아 죽었다. 형사 하타는 현장으로 달려간다. 조사를 끝내고 수사팀을 꾸린다. 그의 파트너는 나쓰키라는 젊은 여자 형사였다. 하타는 예전에 여자 형사와 파트너를 이룬 적이 있었다. 수사 기법을 알려주는 과정에서 나무라는 말투가 될 때가 있었는데 파트너는 차 안에서 울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힘들게 됐다고 생각한다. 사건을 해결할수록 나쓰키의 총명함과 기민함이 돋보인다.


『달콤한 숨결』은 별장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한 축으로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간다. 이야기기 진행될수록 반전이 펼쳐진다. 제발 일요일이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예뻐지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 남의 이목을 끌고 싶다.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달콤한 숨결』에 들어 있다. 감정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소재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솜씨가 탁월하다. 개성 강한 성격의 인물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중에 나는 나쓰키가 매력적이었다.


자신의 소신대로 묵묵히 일을 하는 나쓰키. 예의를 갖추면서도 할 말은 한다. 눈치가 빨라 일처리가 능하다. 남성 세계인 경찰 안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 살인 사건의 범인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다. 이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이름을 되뇌는 장면. 이제부터 나는 나를 위하고 지키기 위해 앞으로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후회는 하지 말고. 그때의 결정을. 『달콤한 숨결』을 읽는 동안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느리지만 슬프지 않은 내일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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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건너는 소년 사계절 1318 문고 108
최양선 지음 / 사계절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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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너희들을 잊지 못하겠다. 얼마 전 새로 산 경추 베개는 만족스러워. 머리를 대면 바로 잠이 들어. 잠이 들고부터가 문제야.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한 현실의 일이 잠 속으로 달려 들어와. 잠깐씩 깨곤 해. 여기가 어디일까. 몇 시쯤 됐을까. 나는 일어나야 할까. 땀은 왜 이렇게 많이 나지. 이불 속이 따뜻해서라고 농담해도 할 말이 없네. 겨우내 자면서 식은땀을 흘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야.


철진, 재민, 박쥐, 시온. 너희들을 만나는 시간에는 어땠을까. 『밤을 건너는 소년』 속 너희들이 꾸는 꿈을 알고 싶어. 소설이 끝나면 나는 책을 덮고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소년, 너희들은 어쩐지 계속 그 골목에 서성이고 있을 것 같아. 춥고 냄새나는 골목에서 사나운 마음이 되어 있을 것 같아.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해. 어른이 되어서 일도 하고 은행 업무도 보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지. 나의 처지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하면서 건네는 농담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밤이야.


아까 하던 얘기마저 할게. 자기 전 책을 읽으려고 노력해. 단어와 문장이 춤을 출 때까지 읽어. 잠이 가득 몰려오기 전에 보이는 증세. 마술사 부자가 파라다이스 클럽에서 일을 하는 장면을 읽다가 잠이 들었지.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꾸고 일어나 맞은 아침. 그래 맞아. 아침이야. 커튼 사이로 얇게 비치는 햇살에 아침이라는 걸 깨닫고는 안도했을까 아니면 한숨을 쉬었을까.


파라다이스 클럽에서 일하는 박쥐는 아버지가 늘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돈을 가져가. 고시원에 숨겨둔 돈을 가져가고 미성년자를 일하게 했다며 사장을 협박해 석 달 치 월급도 가져가버려. 박쥐는 절망해. 철진이는 재민이에게 이상한 쇼를 보여주면서 돈을 얻어내지. 공부 스트레스로 힘든 재민이는 철진이의 쇼를 보면서 어두운 마음을 털어내려고 해.


너희들 앞에 마술을 하는 시온이가 나타나면서 일은 흘러가. 생기는 게 아니라 흘러가지. 『밤을 건너는 소년』을 다 읽었을 때 반전이 있어 놀랐어. 너희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겨내고 희망을 가지며 끝을 맺겠구나 하는 기대가 어긋나버리지. 알고 있어. 희망과 같은 단어는 너희들의 세계에서는 사멸된 언어라는 거. 희망 아닌 것들에 너희들의 세계가 물들어 있다는 것도.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는 있는지.


슬프니.


철진이가 박쥐에게 이상한 배신을 때리고. 박쥐는 저항 없이 순응하고. 삶은 자주 너희들의 기대와 희망을 배신할 거야. 야속하게 들리겠지만. 그렇더라고. 원하는 건 이루어지지 않고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서 너희들의 시간을 끌고 갈 거야. 끌려간다는 게 맞을 거야. 너무 애쓰지 마. 절망도 힘이 된다는 걸 알기 되기까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밤을 건너 아침이 되면 식은땀을 흘리고서도 살아 있으매 안도하는 어른의 시간. 절망을 절망으로 놔두지 않고 너희들은 걸어가야 해. 따뜻한 물을 끓여서 청귤 차를 타 마시고 시간 날 때마다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봐. 아무 책이나 읽어봐. 제목이 끌리는 책. 연예인이 읽고 있는 책. 자격증을 따기 위한 수험서도 좋지. 부드럽게 써지는 볼펜을 사서 책에 밑줄을 치면서 읽었으면 해. 소년들. 야망보다는 책을 가졌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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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마음산책 짧은 소설
조해진 지음, 곽지선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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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10년 단위로 바뀌는 걸까. 음악을 들으려고 스포티파이 앱을 열었을 때 놀랐다. 홈 화면에 추천 음악으로 90년대 베스트가 떡 하니 올라와 있었다. 가입할 때 생년월일을 적으니까 나이대를 아는 건 당연한데. 그래도 어떻게 내가 90년대에 테이프와 시디를 사서 열렬히 음악 들은 걸 알고 추천을 해준다는 건지. 유튜브 알고리즘 신기한 것도 알지만. 새삼 자주 놀랍다. 스포티파이 검색했는데 얘네들 카피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이네.


90년대 베스트를 듣는 지금은 2020년대. 가사 없이도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다니. 대체 얼마나 음악을 들었던 건지. 네이버 블로그 기능 중에 하나가 몇 년 전 오늘 내가 작성한 글을 보여주는 게 있다.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코로나 시대 전에 쓴 글이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돌아다닌 그때가 까마득하다. 전염병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좀비물을 좋아하기도 하고 재난에 닥쳤을 때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 보면 나의 어려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이 용감해지기를 바라며 과학 선생이 만든 바이러스가 학교 내에 퍼진다. 한 번 물리면 좀비로 변해 사람을 공격한다. 감염 속도가 빨라 대처할 수 없다. 아이들은 살기 위해 뭉치고 옥상으로 올라가 구조 헬기를 기다린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헬기. 프로펠러 소리. 아이들은 곧 어른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 믿는다. 그 믿음은 보기 좋게 깨지고 무증상 감염자일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 아이들은 헬기에 타지 못한다. 주인공 온조는 말한다. 어른들에게 협조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배에 탄 아이들 역시 하늘을 날고 있는 헬기를 보고 프로펠러 소리를 들으며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곧 우리 나간다. 엄마 아빠가 기다리는 집으로 갈 수 있다.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잠을 잘 것이다 하는.


조해진의 소설집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는 2020년 이후를 다룬다. 근미래.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올 것이라 믿는 미래. 어느 날 관측된 소행성은 지구와 가까워지며 충돌한단다. 지구는 사라지고 한마디로 멸망, 끝. 디데이를 설정해놓는다. 그럼에도 출근을 하고 보고서를 쓰고 새로 개업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곧 망한다는데 가게를 여는 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한 채.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서로를 물어뜯는 건 드라마와 영화로 학습해서 현실에서 그런다 해도 잘 피해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운전면허가 없어 버려진 차를 타고 도망가는 건 못 하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면 직업 정신이 투철한 버스 기사님의 버스를 탈 수는 있을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처음에는 뭔지 몰라 두려웠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할까.


불편하지만 마스크를 챙기고 마스크에 끼울 줄을 색깔별로 사는 걸로 코로나 시대는 일상화되었다.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인류가 갖은 고초에도 망하지 않고 버티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처음에는 이게 뭐지,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놀라면서도 검사받으러 가고 요일별로 마스크를 사라고 하니까 줄을 서서 산다.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는 망해가거나 망한 지구의 시간을 그린다.


지구가 끝장날 거라는 뉴스에도 출근을 하고 바이러스가 퍼져도 상사의 지시에 상자를 배달하러 길을 떠난다. 문명이 발달된 어느 미래에서는 사고로 뇌를 다쳐도 칩을 이식해 살아갈 수 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지구에 남아 있어도 미리 세팅해 놓은 프로그래밍으로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상상력으로 쓴 미래의 지구는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가 아닌 정말로 일어날 수 있어서 진짜 일어나고 있어서 소름이 돋는다. 좀비가 돌아다녀도 소행성이 충돌한다고 해도 방사능이 유출되었어도 수능을 걱정하고 출근 알람을 맞춰두는 일.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에 실린 소설은 묻는다. 오늘 당신은 행복할 수 있는가. 무엇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세상이 망하기 한 시간 전 소설 속 인물은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확인하며 기분 좋음을 느낀다. 현재가 있으면 좋고 미래는 알 수 없는 거고 확실한 건 우리의 과거뿐인 현실에서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오늘 말이다. 세상은 망한다. 속도의 문제일 뿐이다. 미래가 허락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다. 누가 허락을 해서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나만은 죽지 않을 것처럼 구는 인간들이 문제다. 우리에게 허락된 건 죽음이고 그걸 잊지 않는다면 평화롭게 오늘만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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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은 살지 - 교유서가 소설
김종광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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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의 소설집 『산 사람은 살지』의 주인공 기분이 쓰는 일기대로 쓰자면 어제는 이러했다.


2022.1.31


조남주의 소설집 『서영동 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썼다. 냉장고에 있던 오징어와 쥐포를 꺼내서 구워 먹었다. 입이 텁텁해 양치를 하고 있는데 거대 춘식이 인형을 들고 벗이 찾아왔다.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창피했단다. 자꾸 쳐다봐서. 택시를 탔단다. 요금은 만 원 조금 넘게 나왔다고. 차마 인형을 들고 버스를 탈 수는 없었단다. 잘했다고 말해줬다. 커피 한 잔 먹고 쇼핑몰에 갔다. 코로나가 심해져 안 가려고 했는데 잠깐만 갔다 오자 했다. 설이라고 벗이 20만 원을 줬다. 그 돈으로 염치없이 옷을 샀다. 이제 돈도 벌고 하니까 살 거 사면서 살라고 하네. 걸어서 식당에 갔다. 길을 잘못 골라 도로변 갓길을 걸었다. 차가 무서우니 한 줄로 걷자고 했다. 불고기 3인분과 후식 냉면, 음료수 두 병을 시켜서 먹었다. 빵과 아이스크림을 샀다. 돈 버는 건 어려운데 쓰는 건 쉽다. 쇼핑몰에서 그 많은 옷을 보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비싼 옷 사 놓고 입지도 않고 떠난 엄마. 어디에 도착해 있을까.


학교 다닐 때 김종광의 단편으로 수업했다. 내가 선정해서 복사를 해 갔나 교수가 추천해서 공부를 했나. 기억이 가물거린다. 읽기에 수월하고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능청스러운 충청도 사투리가 소설 곳곳에 있어서 킥킥거리면서 읽었다. 서점 굿즈 받으려고 금액 맞추려고 신간 목록을 훑던 도중 『산 사람은 살지』라는 제목으로 김종광의 신간이 나온 걸 발견했다. 순전히 제목 때문에 샀다. 이 정도의 제목을 쓴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무엇이?


누가 읽어도 쉽고 납득이 되는 언어로 책의 제목을 짓는다는 건 내공이 쌓였다는 뜻이다. 일부러 있어 보이는 척 어색한 제목의 책들. 이제는 제목만 봐도 안다. 몇 십 년 책 읽다 보면 사이즈가 나온다. 이 인간이 어떤 상태로 글을 쓰고 있나. 김종광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읽기를 잘했다. 역시 제목을 보는 내 안목은 틀리지 않지. 『산 사람은 살지』는 그런 책이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뿌듯함을 안겨주는 책. 세상이 바이러스로 뒤덮이든 말든 산 사람은 살고 그렇게 하고 있다면 대단하고 멋지다고 말해준다.


스물두 살에 광산에서 일하는 남자에게 시집온 기분이 쓴 일기와 뒤섞여 소설은 흘러간다. 몸이 시원찮아서 병원 다니고 그 와중에도 자식 키우고 농사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기분이었다. 젊은 날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처녀 때 쓴 일기는 있었는데 남편이 볼까 봐 불태웠다. 글자라는 걸 쓰고 싶어도 쓸 새가 없었다. 딸애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좀 썼다. 힘들다 힘들다 하는 신세타령의 글이라서 아궁이 속에 던져 버렸다.


2010년에 실컷 쓰기 시작했다. 기분의 일기는 남편이 아파서 죽고 난 이후에도 계속 쓰인다. 자식들이 용돈 준 이야기, 병원 다니고 절에 가서 치성 드리는 이야기, 집이 오래돼 공사하면서 겪은 이야기, 친척과 조카들이 찾아온 이야기. 온갖 썰들이 『산 사람은 살지』에 펼쳐진다. 남편한테 생활비 타면서 겪은 서러움, 옷 한 번 마음대로 사서 입어보지 못한 슬픔, 하루에 얼마 썼는데 너무 많이 썼다는 후회. 죽은 자들이 꿈에 나와 기분에게 털어놓는 살아생전의 아픔.


김종광은 기분의 시간을 농사철로 나누어 농촌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농촌 소설의 대가답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는 농촌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농사짓는 이의 품과 고됨을 모른 채 마트에서 집어 든 채소를 보면서 비싸네 어쩌네 이러고 있다. 딱밤 맞기 좋게 말이다. 『산 사람은 살지』를 읽으면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못하겠다. 고추 농사짓는데 기분의 다리와 허리가 아작이 난다. 일하고 있는 자식들이 시간 내서 와주지 않으면 시도도 못한다. 남편은 광산에 다니면서도 농사일을 했다. 노인회 일도 마다하지 않고 했다.


항암 치료받던 남편을 두고 경로당 청소를 하러 간 기분이었다. 그 사이에 남편이 죽어버렸다. 임종도 지키지 못한 기분은 내내 마음이 아팠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픈 사람들 두고 청소하러 갔을까. 기분은 그런 마음도 일기에 쓴다. 젊은 시절에는 몸 아파 가족에게 폐만 끼치는 자신이 미워 자살 시도도 여러 번 했다. 그때 죽지 않아서 기분은 자식이 구해다 준 줄로 마스크를 겨우 쓰고 병원에 다니고 목욕도 다닌다. 기분의 일기에는 오늘 얼마를 썼고 자식에게 얼마를 보냈는지 소상하게 적혀 있다.


그걸 읽으면 참. 가슴이 뻐근하다. 비 오는 날 돈 아낀다고 버스도 안 타고 집까지 걸어온 누군가가 떠오른다. 자기 죽으면 자식에게 손 벌리지 말라고 알뜰하게 돈을 모아둔 남편. 농협을 믿지 못해 창고에 돈뭉치를 숨겨둔 남편. 기분은 아파도 살아 있으니 살아야지 어떡하겠어 한다. 예전에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책 내는 그런 꿈을 꿨다. 염세적으로 변한 게 아닌데 지금은 그 모든 게 부질없다는 걸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남한테 악한 소리 안 하고 안 듣고 돈이 생기면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먹으며 사는 게 만고 땡.


산 사람은 사는 데 어떻게 살지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는 게 『산 사람은 살지』의 주제다. 종결어미를 주제의식으로 쓰려다가 참는다. 주제나 주제의식이나 똑같은 말인데. 남의 잘난 척은 꼴도 보기 싫어하면서 꼭 있어 보이고 싶은 척에 어려운 말을 쓰려고 한다. 이 또한 『산 사람은 살지』를 읽고 고쳐야겠다고 다짐한 바다. 일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도 책을 읽어보겠다고 『산 사람은 살지』를 집어 들었다. 웬걸. 어지럽던 마음이 기분의 일기와 하루를 보면서 사라졌다.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는 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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