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강지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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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의 점심은 이랬다. 반찬집에서 사 온 3,000원짜리 반찬 서너 개. 월급 받거나 기분 좋은 날에는 5,000원짜리 반찬도 샀다. 집에서 왕창 해온 밥. 물 한 컵. 묵언수행하는 사람들처럼 밥을 먹었다. 신속하게 먹었다. 10분 이내로. 정말 정말 끔찍했다. 처음엔 무슨 말이라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마저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에너지를 여기에 쓰면 안 되겠구나, 깊은 현타가 찾아왔다.


물건을 챙겨 나오면서 잊지 않고 밥통도 챙겼다. 반찬은 놔두고 왔다. 알아서 하라지. 지금은 이야기를 나눈다. 반찬은 사지 않는다. 반찬을 사려면 그 동네로 가야 한다. 트라우마. 한동안 그쪽으로는 가지 못할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 오고 심장이 두근댄다. 대신 제일 잘하는 김치볶음밥을 싸 간다. 파리바게뜨에서 샐러드를 사가기도 한다. 같이 먹으려고 맥모닝을 사 오기도 해서 고맙다고 여러 번 말했다.


이야기를 한다. 점심을 먹으면서. 듣기와 말하기의 비율을 적당히 조절해가면서. 어디를 가도 똑같다고 말한 그 입을 때리고 싶을 정도로 여기는 괜찮다. 똑같지 않고 더 좋을 수 있다는 걸 지금 괴롭고 힘든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참지 말고 버티지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면서 나오기를. 처음이라 일을 많이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게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면 업무량은 많아지겠지만 일단 해보는 거다. 이야기가 있는 점심을 위해서.


산문집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은 작가들의 점심 단상을 모아놓았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먹는 점심. 회사 업무를 하다가 먹는 점심. 급하게 먹어야 하는 점심. 산책을 하기 위한 워밍업으로의 점심. 누군가들의 점심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한 시간의 점심시간. 급하게 밥을 먹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어깨가 무지 아팠다. 등도. 벌칙의 시간인 것처럼 느껴지던 점심시간이었다. 여유도 온기도 없는 점심시간을 가졌었다.


책에서는 다양한 점심시간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내식당을 사랑하고 집에서 정성 들여 먹기도 한다. 여러 형태의 점심시간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 시간에서 쓸쓸함을 느꼈다. 일을 하기 위해 먹는 밥인데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먹는 밥인데 점심시간은 노동 시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어떤 곳은 중식비가 나오지 않기도 한다. 분명 둘이 먹는 점심인데 내내 혼자 먹는 지독한 외로움의 시간이었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을 읽으며 힘이 나길 바랐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했다. 솔직함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 나는 산문집을 주로 읽는다.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솔직함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쉽게 드러낼 수 없었던 과거의 어떤 기억을 꺼내 놓는 걸 보면서 나의 과거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눈가가 촉촉해지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기대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비비고 전복죽을 용기 내어 끓였다. 다행히 상하지 않았다. 조금 짜서 밥을 더 부었다. 3분의 2는 먹고 나머지는 반찬통에 옮겨 담았다. 다음 주 어느 하루의 점심을 위해서.


밥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찾아온다면. 점심시간인데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시간을 겪고 있다면. 과감히도 아니고 그냥 담담한 마음이 되어 나왔으면 한다. 그곳이 최선이 아니라는 신호를 수신해야 한다. 힘이 나지 않을 땐 힘을 내려고 하지 말고. 영화 《벌새》의 영지쌤 말대로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보기를. 손에 잡히는 리모컨이나 휴대전화에 깔려 있는 배달 앱을 눌러 보기를. 이상하게도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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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인기가요 - 오늘 아침에는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울었다 아무튼 시리즈 39
서효인 지음 / 제철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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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 역시도 라디오에서 카세트테이프에서 시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그 시절을 살았다. 맘만 먹으면 불량소녀 정도는 될 수 있었는데. 아닌가. 불량소녀 맞나. 아침에 학교 가기 싫어서 그대로 버스에서 안 내리고 도서관으로 가고 야자 빠지고…. 그랬는데. 그 불량은 저 불량과는 달랐을 테지. 저 불량을 저지르기에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눈에 띄지 않는 정도로 일탈을 감행했다.


여름방학이었다. 보충 수업은 가지 않았고 문을 열어 놓고 음악을 들었다. 라디오를 틀어 놓으면 시간 가는 줄, 알게 된다. 음악이 끝나면 디제이의 멘트가 끝나면 시보가 나왔으니까. 시간 가는 줄 알면서 듣는 음악은 이러했다. 인기가요들. 산타나의 〈Smooth〉. 이승철의 〈오직 너뿐인 나를〉. 임재범의 〈너를 위해〉. 라디오 채널이 바뀌어도 이 세곡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중에 토이가 있었다. 감성 변태라고 불리던 유희열이 진행하는 《음악도시》. 느지막이 일어나서 《두시의 데이트》를 듣고 중간에 밥 먹고 잘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을 겨우 달래서 보다가 누워서 책을 읽다가 《음악도시》까지 달렸다. 펫 매스니, 카디건스,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브라이언 맥나잇. 한국의 지방 도시에서 문화적 혜택을 1도 누리지 못하던 불량소녀는 덕분에 문학소녀가 될 수 있었다. 뜻도 모르지만 분위기는 묘한 노래를 들으면서 일기장을 채울 수 있었다.


마이마이가 있었다. 충전은 잘되지 않아 건전지를 옆으로 달고서 음악을 들었다. 테이프를 A 면과 B 면으로 수동으로 바꿔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파나소닉으로 갈아탔다. 테이프를 한 번 넣으면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B 면으로 돌아갔다. 찰칵. 찰칵이 있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나면 음악이 바뀌면서 보고 있던 세상의 빛깔도 달라졌다.


그러니까 노래는 기억을 불러오는 주술과 다름없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은 대체로 용감하고 대책 없고 삐딱하고 뜨거워서 무슨 기억이든 아주 오래 머리와 몸에 남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열다섯 살에게는 실수하지 않는 게 좋다.

(서효인, 『아무튼, 인기가요』中에서)


『아무튼, 인기가요』는 어눌하고 소심하고 그러나 반항심에 찌든 그때의 나를 파나소닉의 카세트테이프 돌아가는 소리인 찰칵과 함께 재생 시켜 주었다. 인용한 부분의 말처럼 열다섯 살에게는 실수하면 안 된다. 모조리 다 기억한다.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이이므로. 학교 앞에는 레코드 점이 있었고 시내로 나가면 신나라 레코드가 있었다.


급하면 학교 앞으로 갔고(대개 신보가 막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침에 지나가다 매직으로 쓴 종이를 보았을 때 포스터 증정까지라는 문구가 있으면 빛에 이끌리는 좀비처럼 들어가서 빨간색 딸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 테이프를 샀다. 돈이 더 있는 걸 확인하면 시디도 샀다. 같은 가수의. 참으로 비효율적인 소비 패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유가 있으면 신나라 레코드로 갔다. 그곳은 뭐랄까. 입구부터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곳이었다. 시내 중심가라지만 걸어서 오분이면 이 끝과 저 끝을 왕복하는 시내에서 유일하게 도시적 세련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규모만 다를 뿐 음악이 넘쳐흐르는 곳에서 듣고 샀던 가수의 음반 리스트를 『아무튼, 인기가요』에서 조우했다. 아.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지역만 다를 뿐 비슷한 음악을 들으며 말도 안 되는 교육을 받으며 살았구나. 반가움도 있었다. 지금 듣는 음악 리스트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동년배. 오마이걸의 〈Dolphin〉을 들어보라고 하기에 들었다. 스포티파이를 구독하는데 한 번 오마이걸을 들으니 비슷한 음악으로 추천해 준다. 고오맙다. 취향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그걸 존중해야 하니까.


다시 원래 듣던 음악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지금은 무얼 듣냐면 백예린과 권진아와 볼빨간 사춘기와 위위와 롤러코스터와 S.E.S. 스포티파이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하니까 90년대 베스트 음악을 추천해 주었다. 아닌데. 나 2020년대를 사는 사람인데. 웬 90년대? 그래도 들어볼까 한 번 들어보지 뭐 하다가 중독되었다. 아주 미쳐버리겠다. 왜 나 가사 다 아는데? 영턱스클럽과 언타이틀과 듀스와 서태지와 아이들과 핑클과. 말을 말자. 모두 내가 산 음반의 가수들이다.


내가 돈이 없지 감수성이 없냐. 식으로 엄마 일하는 곳과 엄마 사는 곳에 가서 돈을 뜯어 음반을 샀다. 엄마 미안해. 엄마도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돈 줘서 고마워. 소니가 있었다. 아무래도 테이프는 불편했다. 파나소닉으로 계속 가고 싶었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했다. 뒤로 감기를 하고 멈춤을 눌러야 하는 정확한 타이밍을 익혀야 하는 노력과 기술.(나중엔 그걸 잘했다. 뒤로 감기 버튼을 부르고 삐리릭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깐 쉬었다가 정지 버튼과 재생 버튼을 동시에 누르는.)


엄마 찬스를 쓰자. 엄마 또 미안해. 소니 시디플레이어를 사니 부드러운 파우치를 주었다. 알지? 양쪽 줄을 잡아당기면 복주머니 스타일로 되는. 소중한 소니. 리피트 버튼을 눌러 놓으면 무한 반복으로 한 곡을 들을 수 있었다. 한 곡이 있었다. 가방에 넣고 이어폰 줄 한가운데에 있던 조작 버튼을 눌러가며 학교와 집을 다니던 키 작은 내가 보인다. 롤러코스터와 윤상을 들었다. 〈어느 하루〉와 〈우연히 파리에서〉. 교과서 보다 열심히 봤던 가사집. 가사집을 보면서 노래를 들었으니 안 외워질 리가 없었다.


그러니 90년대 베스트 추천 음악을 들으면서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는 거다. 『아무튼, 인기가요』를 읽는 내내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피해를 받을망정 남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내가 있다. 한동안의 플레이리스트는 이러했다. 출근할 때 힘이 나는 노래. 쉼이 필요할 때 듣는 음악. 뇌의 휴식을 주는 노래.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아 심장이 두근대고 호흡이 힘들었다. 버텨야 한다고들 하는 데 그럴 필요 없다. 버티면 죽는다. 잘 새겨 들어. 문학소녀가 말하는 거니까.


오마이걸의 〈Dolphin〉 받고 위위의 〈멀어지지 않게〉 그리고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



#플레이리스트


이승철


오직 너뿐인 나를


산타나


Smooth


본조비


It's my life


롤러코스터


어느 하루


윤상


우연히 파리에서


백예린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권진아 


다 알면서(feat. 박재범)


위위


멀어지지 않게


S.E.S


너를 사랑해


카디건스


Carnival


이규호


머리끝의 물기


임재범


이 밤이 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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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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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잘 다니던 마트가 있었다. 금요일 밤에 주로 갔다. 주말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먹고 놀려고. 어느 날 마트 계산원이 알은체를 했다. 참 건전하게 사신다고. 네? 다른 사람들은 술도 많이 사 가는데 그런 게 없다고. 네에. 하고 이제는 안 간다. 그냥 매주 보니 반갑고 매주 무얼 사나 들여다보니 내적 친밀감이 생겨서 말을 건넨 것일 텐데. 좀 부담스러워져서 안 가고야 말았다.


계산원이 궁금해했던 거. 술. 금요일 밤. 어리바리하게 생긴 이 사람은 술을 사지 않는다. 두부, 어묵, 과자, 햄, 콜라. 가끔 싸게 나왔다 싶은 사과를 사서 나간다. 한때는 술 좀 마셨다. 해지는 거 보고 들어가서 해 뜨는 걸 보고 나와 세수하고 아침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제는 코로나 시국이라 그렇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술만 마시면 지구의 자전을 온몸으로 느끼느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냉장고에 술을 일렬종대로 세워 놓은 모습과 텔레비전을 보면서 배달 음식과 술을 마시는 모습이 신기할 뿐이다. 그에 비해 나의 냉장고 안에는 각종 우유와 한 달 전에 사 놓은 빵, 김치가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마시는 건 진한 초코 우유. 김혼비의 산문집 『아무튼, 술』을 읽다 보면 마트 주류 코너에도 한 번씩 가볼까 고민이 든다. 그땐 그랬지. 어디든 앉기만 하면 술자리가 됐었지. 물처럼 마시면서 엄청 웃어댔지. 그리운 건 절대 아닌 약간의 부끄러움이 깃든 추억이 떠오른다.


요즘 나는 문자를 자주 보낸다. 나이/성별/사는 곳/경력. 슬래시가 섞인 사무적이고 무미건조적인 문자. 대체로 답문은 없다. 전화가 오기도 해서 이력서를 들고 갔다. 잠깐만 앉아 있으라고 해서 앉아 있었는데 20분이 되어 가는데도 나한테 오지를 않았다. 나를 뻔히 보고 있었는데도. 나중에서야 면접 보는 걸 잊었다는 식의 이해 불가한 말을 했다. 평소 자주 가던 매장이었는데 이상한 행태로 단골손님을 잃었네.


김혼비의 『아무튼, 술』에서 내가 책갈피를 하고 오랫동안 들여다본 일화는 「술 마시고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 인생의 암흑기를 건너가던 시기 김혼비는 그래도 즐거운 척 그러다 보니 즐거워지면서 술을 마셨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굳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힘들어서 마시는데 마시다 보니 즐거운 날. 치과 치료를 했지만 치료한 부위에는 술이 닿지 않게 나 자신 칭찬해 하며 기술적으로 마시고 노래방까지 갔다. 기억은 거기까지.


다음날 아침. 노래방 리모컨이 현관에 떨어져 있고 가방에 지갑은 없다. 김혼비는 드문드문 기억을 꺼낸다. 택시에서 벌인 광란의 질주가 떠오른다. 오락실 운전 게임인 줄 알았는데. 착하고 수다스러운 택시 기사님 덕에 지갑을 찾고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기사님은 김혼비에게 짧은 문자를 보내온다. '네. 힘내세요.' 김혼비는 기사님의 문자를 친구에게 이야기해주다 운다. 힘내세요 라니.


슬래시 가득한 문자를 보내고 그렇게 보내라고 해서 보냈지만 짧은 인사도 하지 않은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것 같은 문자를 보낸 나 자신이 한심하다. 그런 문자에 '네. 힘내세요.'라는 글이 전송되어 오면 나도 김혼비처럼 울까.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20분을 앉혀 놓고 있다니. 내 시간은 묻지도 않고 언제까지 오라는 틀린 하십시오체로 시간 변경을 두 번이나 해놓고 막상 갔더니 불법을 아주 자랑스럽게 한다는 식의 멘트를 뻔뻔하게 날리다니. 코로나로 어려운 건 님만이 아닙니다.


노래방 리모컨을 운전대로 착각할 만큼 술을 마실 사연은 아니지만 암막 커튼을 다시 쳐 놓고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잠시 숨어 있고 싶은 일이다. 며칠 동안의 일. 김혼비는 택시 기사님의 문자를 받고 결심한다. 평소에는 효용성이 떨어져 쓰지 않던 힘내라는 말을 자주 쓰기로. 힘을 내라고 하지만 도저히 그 말로는 힘이 나지 않아 있던 힘도 떨어지게 만드는 힘내라는 말을 매번 해보기로. 암흑기를 지나고 있던 시기에 뒤에 후광을 달고 나타나 잃어버릴 뻔한 지갑까지 찾아주면서 성스러운 멘트를 날린 천사 같은 택시 기사님을 만난 이후로 김혼비는 힘을 낸다.


나의 귀염둥이 펭수는 힘내라는 말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둘 다 좋은 말이다.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다. 『아무튼, 술』에는 주류 이야기와 비주류 이야기가 잘 말은 소맥의 비율처럼 적절히 배합돼 계속 읽어 보고 싶도록 만든다. 글이 들어간다. 쭉쭉쭉. 읽어라. 읽어. 언제까지 어깨 춤을 추게 할 거야. 페리 안에서 술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달려와 같이 듣자고 말하는 평생의 동반자가 있는 한 암흑기는 없다는 아니고 있어도 이게 어두운 거 맞아 하면서 지나갈 거다. 그럴 거다. 꼭. 그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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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
김혼비 지음 / 안온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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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언가에 절실해지면 심지어 맞춤법 책에서까지 위로와 자기합리화의 소스를 기어이 찾아낸다는 교훈을 남긴 이 일화와 정도만 다를 뿐, 소소하게라도 독서라는 행위 안에서 책과 내가 주고받는 상호작용에는 이런 식의 자기 편향성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독서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이유겠지만, 독서량이 결코 지성의 척도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소문난 다독가 중에도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이를 일컫는 단어도 표준어로 등재되어야 한다. '쓸책없다' 정도?).

(김혼비, 『다정소감』中에서)



나는 내가 잘 노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노는 일에도 체력이 필요하다는걸. 나인 투 식스 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꼴랑 8개월 했는데 어느새 몸이 그걸 기억하고 더 잘 수 있는데도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휴대전화 시계 한 번 보고 밤 사이 부지런한 유튜버들이 올린 영상을 누워서 보다가 다시 잔다. 아, 좋다 이러면서. 오래 잔 것 같은데도 10시나 11시. 베개 옆 인형을 거치대 삼아 놓은 전자책 리더기의 전원을 누른다.


닥치고 위로. 무조건 위로. 그냥 하는 위로. 영혼 없는 위로. 온갖 위로를 듣고 싶다. 해서 내가 선택한 건 책 읽기. 김혼비의 산문집 『다정소감』에 나오는 말처럼 '사람이 무언가에 절실해지면' 어떤 것에라도 기대게 된다. 저녁 뉴스를 보면서.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올라온 동영상을 보면서. 사놓고 잊어버린 책을 읽으면서. 발화자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닌데도 의미를 찾아가며 위로를 주입한다. "내가 무능력했지 무기력하기까지 할까 봐!"라고 외치는 김혼비의 말에 위로뽕을 맞고 휘청인다.


명절날 여자들이 남의 집 제사에 목숨 걸고 일하는 것에. 축구를 해서 좋아진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집주인과 잘 싸우게 된다는 것에. 사내 정치에 휘말려 이상한 부서에 가서 개고생 한 것에. 동료들이 새벽부터 찾아와 머리 올려주고 화장해 준 일에. 한 마디로 고생 고생하다가 주변인들이 보여준 다정함에 무능력과 무기력을 떨쳐 버린 일화를 읽으며. 비겁하게도 남의 고생담을 읽으며 나는 누워서 힘을 낸다. 일어나 두부와 계란을 부쳐서 밥을 먹는다. 간식도 챙겨 먹는다.


『다정소감』은 그렇게 날 일으켰다, 인생 최대의 고비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까지는 아니고. 읽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어렵게 쓰지 않는 문장이, 사랑해 마지않는 말장난이 섞인 문장이, 선을 넘지 않은 농담을 적절하게 구사하며 쓰는 문장이 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현실도 벅찬데 읽고 있는 책마저도 어렵고 난해하면 난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다정소감』은 독자를 힘들게 하지 않는 책이다.


어떤 마음이 있는데 말로 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무슨 감정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힘들어서. 내가 이상한 건가, 이 기분을 설명하지 못하는 나는.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인 책 읽기를 부단히 했는데도. 남은커녕 나를 납득 시킬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뾰족한 방법은 없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다정소감』의 문장들, 김혼비의 논리적인 유머 앞에서 마음이 풀어졌다. 시대가 변했으니 쓰지 말아야 하는 용어를 알려주기도 하는 해박함 앞에서도.


지금의 내 기분을 알아주는 문장을 『다정소감』에서 발견했다. 사람 사는 거 다르지 않구나. 돈 벌어먹고사는 거 나만 어렵게 느끼는 거 아니구나. 욕만 안 했지 비언어적·반어적 표현으로 그동안 나를 괴롭힌…. 끊임없이 나를 자책하게 만들었던…. 뭣 같은 시간을 나만 겪어낸 건 아니구나. 김혼비는 다정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날 수 있었다. 친구가 해준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을 먹고. 7년 동안 반장을 하면서 겉도는 애들이 없는지 신경을 쓰고. 가식이라도 애쓰는 사람들의 행동을 예쁘게 봐주면서.


책은 누워서 읽지만 리뷰는 앉아서 쓴다. 나를 일으켜 주는 책. 자칫 자책과 후회로 지낼 뻔한 시간에 김혼비의 『다정소감』은 있는 다정 없는 다정을 내 곁에 슬쩍 놓아준다. 너한테도 있다. 다정한 사람과 다정한 추억이. 네가 말하지 못한 걸 내가 말해줄 테니, 혼자 울지 마. 축구 잘하는 언니는 위로도 박력 있게 해준다. 「가식에 관하여」는 꼭 읽었으면 한다. 나의 유일한 무기, 친절함, 혹자는 가식이라고 부르는 그거,에 대해 괜찮다고 등을 팡팡 두드려주는 글이다. 모든 게 괜찮고 괜찮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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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총총 시리즈
이슬아.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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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보다는 오해가 쉬운 세상에서 이들의 오해는 아름다워 보인다. 이슬아, 남궁인 작가가 서로를 향해 주고받은 편지로 묶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길에서 읽었다. 별로 친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둘은 어쩌다 편지를 쓰게 된 걸까. 말로는 하지 못할 이야기를 글로 나눈다. 말이 쉬운가. 글이 쉬운가. 둘 다 어렵다면 차라리 글로 나누는 게 감정적인 소모가 덜 할 거다.


아닌가. 귀가 뜨거울 정도로 전화를 하다가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는 게 더 쉬운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그 둘은 말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쓰고 고치는 걸 선택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을 이슬아 작가는 마지막에 해소해 주었다. 편지의 목적. 남궁인 작가는 편지란 상대를 궁금해하다가 나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 쓰는 글이라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결국 나에 대해 말하고 싶어 쓰는 글. 예의상 초반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묻다가 현 상황에 처해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바뀌는 글. 편지. 이슬아 작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상대를 내내 궁금해하는 것. 질문하고 상대의 잘못을 알려주고 선물을 해준다. 편지란 너의 안부를 내가 이렇게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고.


세상이 점점 좋아질 거라는 믿음은 애초에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는 했다.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닐 거야. 어라. 전부 나쁘잖아. 라고 생각하는 일의 반복. 책으로 세상을 배운 자의 말로다. 이게. 사전 투표를 하기 위해 읍사무소로 갔다.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평일인데. 날씨도 좋은데. 공휴일이 아닌데. 대체 어쩌자고 이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겠다고 줄을 서 있는 건가.


님들. 일 안 하세요? 나만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만 놀아야 하는데. 인구밀도가 낮기로 유명한 도시에서 30분 넘게 줄을 서서 무언갈하다니. 살다 살다 이런 날도 오네요. 이왕 기다릴 거 책이나 읽자. 혹시 몰라 가지고 간(혹시, 만약에 라는 가정법을 사랑한 나머지 나의 가방은 늘 무겁다.) 전자책 리더기의 전원을 켰다. 아침에도 읽은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나는 앞으로 전진.


그래서 이슬아, 남궁인 작가는 친해졌을까. 계약 조건에 의해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 서로 원고를 얼마나 썼나 세어보고. 일로 만난 사이는 일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이슬아 작가는 쓴다. 우리는 변하고 싶어서 계속 글을 쓰는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글을 쓰고 어떤 이들은 좋은 날에 줄을 서서 투표를 한다. 도장을 찍는 손이 떨리고 인주가 말라야 하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호호 불지는 못하고 손바람을 일으켜 말리고. 살짝 반으로 접어서 투표함에 넣는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오해로 가득한 책이다. 서로를 알기 위해서 쓴 글은 오해를 낳고 오해를 정정하고 그러느라 다시 오해를 한다. 네가 잘 쓰나. 내가 잘 쓰나. 배틀이라도 하는 건가 오해를 하면서 읽었는데 그건 의미 없음으로 결론이 났다. 친절한 사람들이 나누는 오해는 친절하고 싶어 애쓰는 누구라도 읽으면 도움이 될 정도로 그들의 오해는 유익하다. 오해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니까.


살다 보니 오해를 자주 한다. 오해를 풀고 싶은 상대가 있고 에라 모르겠다 손절이다 하면서 지지를 칠 때가 있다. 후자의 경우가 더 많은 듯. 현실에서 그들이 어떻게 오해를 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신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의 안에서는 상냥하고 다정하고 일견 쿨한 태도로 서로를 향한 오해를 풀어간다. 현피를 할만한 오해의 양을 쌓은 건 아니라서 몸과 정신의 건강을 걱정해 주면서 마무리를 한다.


실패에 대한 남궁인 작가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일은 사실 실패이며 매번 우리는 실패한다는. 실패란 게 특별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었다. 인생은 스포츠 경기와는 달라서 승패가 명확하게 갈리지 않는다. 이겼다, 졌다의 구분이 없다. 맞고 틀리고의 차이가 존재할 뿐. 내 기준에서 맞는 걸 선택하면 된다. 기준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 변하기 위해 글을 쓰고 줄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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