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동안 잘 다니던 마트가 있었다. 금요일 밤에 주로 갔다. 주말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먹고 놀려고. 어느 날 마트 계산원이 알은체를 했다. 참 건전하게 사신다고. 네? 다른 사람들은 술도 많이 사 가는데 그런 게 없다고. 네에. 하고 이제는 안 간다. 그냥 매주 보니 반갑고 매주 무얼 사나 들여다보니 내적 친밀감이 생겨서 말을 건넨 것일 텐데. 좀 부담스러워져서 안 가고야 말았다.


계산원이 궁금해했던 거. 술. 금요일 밤. 어리바리하게 생긴 이 사람은 술을 사지 않는다. 두부, 어묵, 과자, 햄, 콜라. 가끔 싸게 나왔다 싶은 사과를 사서 나간다. 한때는 술 좀 마셨다. 해지는 거 보고 들어가서 해 뜨는 걸 보고 나와 세수하고 아침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제는 코로나 시국이라 그렇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술만 마시면 지구의 자전을 온몸으로 느끼느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냉장고에 술을 일렬종대로 세워 놓은 모습과 텔레비전을 보면서 배달 음식과 술을 마시는 모습이 신기할 뿐이다. 그에 비해 나의 냉장고 안에는 각종 우유와 한 달 전에 사 놓은 빵, 김치가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마시는 건 진한 초코 우유. 김혼비의 산문집 『아무튼, 술』을 읽다 보면 마트 주류 코너에도 한 번씩 가볼까 고민이 든다. 그땐 그랬지. 어디든 앉기만 하면 술자리가 됐었지. 물처럼 마시면서 엄청 웃어댔지. 그리운 건 절대 아닌 약간의 부끄러움이 깃든 추억이 떠오른다.


요즘 나는 문자를 자주 보낸다. 나이/성별/사는 곳/경력. 슬래시가 섞인 사무적이고 무미건조적인 문자. 대체로 답문은 없다. 전화가 오기도 해서 이력서를 들고 갔다. 잠깐만 앉아 있으라고 해서 앉아 있었는데 20분이 되어 가는데도 나한테 오지를 않았다. 나를 뻔히 보고 있었는데도. 나중에서야 면접 보는 걸 잊었다는 식의 이해 불가한 말을 했다. 평소 자주 가던 매장이었는데 이상한 행태로 단골손님을 잃었네.


김혼비의 『아무튼, 술』에서 내가 책갈피를 하고 오랫동안 들여다본 일화는 「술 마시고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 인생의 암흑기를 건너가던 시기 김혼비는 그래도 즐거운 척 그러다 보니 즐거워지면서 술을 마셨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굳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힘들어서 마시는데 마시다 보니 즐거운 날. 치과 치료를 했지만 치료한 부위에는 술이 닿지 않게 나 자신 칭찬해 하며 기술적으로 마시고 노래방까지 갔다. 기억은 거기까지.


다음날 아침. 노래방 리모컨이 현관에 떨어져 있고 가방에 지갑은 없다. 김혼비는 드문드문 기억을 꺼낸다. 택시에서 벌인 광란의 질주가 떠오른다. 오락실 운전 게임인 줄 알았는데. 착하고 수다스러운 택시 기사님 덕에 지갑을 찾고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기사님은 김혼비에게 짧은 문자를 보내온다. '네. 힘내세요.' 김혼비는 기사님의 문자를 친구에게 이야기해주다 운다. 힘내세요 라니.


슬래시 가득한 문자를 보내고 그렇게 보내라고 해서 보냈지만 짧은 인사도 하지 않은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것 같은 문자를 보낸 나 자신이 한심하다. 그런 문자에 '네. 힘내세요.'라는 글이 전송되어 오면 나도 김혼비처럼 울까.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20분을 앉혀 놓고 있다니. 내 시간은 묻지도 않고 언제까지 오라는 틀린 하십시오체로 시간 변경을 두 번이나 해놓고 막상 갔더니 불법을 아주 자랑스럽게 한다는 식의 멘트를 뻔뻔하게 날리다니. 코로나로 어려운 건 님만이 아닙니다.


노래방 리모컨을 운전대로 착각할 만큼 술을 마실 사연은 아니지만 암막 커튼을 다시 쳐 놓고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잠시 숨어 있고 싶은 일이다. 며칠 동안의 일. 김혼비는 택시 기사님의 문자를 받고 결심한다. 평소에는 효용성이 떨어져 쓰지 않던 힘내라는 말을 자주 쓰기로. 힘을 내라고 하지만 도저히 그 말로는 힘이 나지 않아 있던 힘도 떨어지게 만드는 힘내라는 말을 매번 해보기로. 암흑기를 지나고 있던 시기에 뒤에 후광을 달고 나타나 잃어버릴 뻔한 지갑까지 찾아주면서 성스러운 멘트를 날린 천사 같은 택시 기사님을 만난 이후로 김혼비는 힘을 낸다.


나의 귀염둥이 펭수는 힘내라는 말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둘 다 좋은 말이다.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다. 『아무튼, 술』에는 주류 이야기와 비주류 이야기가 잘 말은 소맥의 비율처럼 적절히 배합돼 계속 읽어 보고 싶도록 만든다. 글이 들어간다. 쭉쭉쭉. 읽어라. 읽어. 언제까지 어깨 춤을 추게 할 거야. 페리 안에서 술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달려와 같이 듣자고 말하는 평생의 동반자가 있는 한 암흑기는 없다는 아니고 있어도 이게 어두운 거 맞아 하면서 지나갈 거다. 그럴 거다. 꼭. 그래야 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