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
김혼비 지음 / (주)안온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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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언가에 절실해지면 심지어 맞춤법 책에서까지 위로와 자기합리화의 소스를 기어이 찾아낸다는 교훈을 남긴 이 일화와 정도만 다를 뿐, 소소하게라도 독서라는 행위 안에서 책과 내가 주고받는 상호작용에는 이런 식의 자기 편향성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독서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이유겠지만, 독서량이 결코 지성의 척도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소문난 다독가 중에도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이를 일컫는 단어도 표준어로 등재되어야 한다. '쓸책없다' 정도?).

(김혼비, 『다정소감』中에서)



나는 내가 잘 노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노는 일에도 체력이 필요하다는걸. 나인 투 식스 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꼴랑 8개월 했는데 어느새 몸이 그걸 기억하고 더 잘 수 있는데도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휴대전화 시계 한 번 보고 밤 사이 부지런한 유튜버들이 올린 영상을 누워서 보다가 다시 잔다. 아, 좋다 이러면서. 오래 잔 것 같은데도 10시나 11시. 베개 옆 인형을 거치대 삼아 놓은 전자책 리더기의 전원을 누른다.


닥치고 위로. 무조건 위로. 그냥 하는 위로. 영혼 없는 위로. 온갖 위로를 듣고 싶다. 해서 내가 선택한 건 책 읽기. 김혼비의 산문집 『다정소감』에 나오는 말처럼 '사람이 무언가에 절실해지면' 어떤 것에라도 기대게 된다. 저녁 뉴스를 보면서.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올라온 동영상을 보면서. 사놓고 잊어버린 책을 읽으면서. 발화자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닌데도 의미를 찾아가며 위로를 주입한다. "내가 무능력했지 무기력하기까지 할까 봐!"라고 외치는 김혼비의 말에 위로뽕을 맞고 휘청인다.


명절날 여자들이 남의 집 제사에 목숨 걸고 일하는 것에. 축구를 해서 좋아진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집주인과 잘 싸우게 된다는 것에. 사내 정치에 휘말려 이상한 부서에 가서 개고생 한 것에. 동료들이 새벽부터 찾아와 머리 올려주고 화장해 준 일에. 한 마디로 고생 고생하다가 주변인들이 보여준 다정함에 무능력과 무기력을 떨쳐 버린 일화를 읽으며. 비겁하게도 남의 고생담을 읽으며 나는 누워서 힘을 낸다. 일어나 두부와 계란을 부쳐서 밥을 먹는다. 간식도 챙겨 먹는다.


『다정소감』은 그렇게 날 일으켰다, 인생 최대의 고비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까지는 아니고. 읽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어렵게 쓰지 않는 문장이, 사랑해 마지않는 말장난이 섞인 문장이, 선을 넘지 않은 농담을 적절하게 구사하며 쓰는 문장이 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현실도 벅찬데 읽고 있는 책마저도 어렵고 난해하면 난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다정소감』은 독자를 힘들게 하지 않는 책이다.


어떤 마음이 있는데 말로 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무슨 감정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어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힘들어서. 내가 이상한 건가, 이 기분을 설명하지 못하는 나는.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인 책 읽기를 부단히 했는데도. 남은커녕 나를 납득 시킬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뾰족한 방법은 없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다정소감』의 문장들, 김혼비의 논리적인 유머 앞에서 마음이 풀어졌다. 시대가 변했으니 쓰지 말아야 하는 용어를 알려주기도 하는 해박함 앞에서도.


지금의 내 기분을 알아주는 문장을 『다정소감』에서 발견했다. 사람 사는 거 다르지 않구나. 돈 벌어먹고사는 거 나만 어렵게 느끼는 거 아니구나. 욕만 안 했지 비언어적·반어적 표현으로 그동안 나를 괴롭힌…. 끊임없이 나를 자책하게 만들었던…. 뭣 같은 시간을 나만 겪어낸 건 아니구나. 김혼비는 다정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날 수 있었다. 친구가 해준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을 먹고. 7년 동안 반장을 하면서 겉도는 애들이 없는지 신경을 쓰고. 가식이라도 애쓰는 사람들의 행동을 예쁘게 봐주면서.


책은 누워서 읽지만 리뷰는 앉아서 쓴다. 나를 일으켜 주는 책. 자칫 자책과 후회로 지낼 뻔한 시간에 김혼비의 『다정소감』은 있는 다정 없는 다정을 내 곁에 슬쩍 놓아준다. 너한테도 있다. 다정한 사람과 다정한 추억이. 네가 말하지 못한 걸 내가 말해줄 테니, 혼자 울지 마. 축구 잘하는 언니는 위로도 박력 있게 해준다. 「가식에 관하여」는 꼭 읽었으면 한다. 나의 유일한 무기, 친절함, 혹자는 가식이라고 부르는 그거,에 대해 괜찮다고 등을 팡팡 두드려주는 글이다. 모든 게 괜찮고 괜찮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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